272화. 명문은 대가리가 없대? (2)
강호인들은 강자를 좋아한다.
스스로 강함을 추구하고 천하제일인을 동경하는 만큼, 강자라는 존재 자체에 크나큰 애정을 가지는 이들이 바로 강호인들이다.
그런 이들이 눈앞에서 벌어진 이 말도 안 되는 사태에 환호하지 않을 리 없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화산신룡! 화산신룡!"
"화산파 만세!"
비무가 끝난 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는 잦아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른 비무장에서도 하나둘 승부가 나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그 결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청명이 보여 준 일격이 지나치게 강렬했던 것이다.
"세상에, 해남파의 대제자를!"
"검도 쓰지 않고서 잡다니!"
"화산신룡, 화산신룡 하기에 얼마나 대단한가 했더니! 이건 소문보다 더하지 않은가?"
"기, 기습이었지 않나?"
"기습? 기습은 얼어 죽을! 비무대 위에서 방심하는 놈이 미친놈이지. 그리고 공초 대사가 비무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주었는데 방심은 무슨 놈의 방심인가? 실력일세, 실력!"
"그렇지. 억울하면 이겨야지!"
"화산파가 정말 강해졌구나! 저 해남을 일격에 꺾다니."
사소한 이견들은 깔끔하게 무시되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훗날 강호를 이끌어 갈 천하의 인재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그저 승리만 해도 환호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단 소리다. 그런데 심지어 눈앞에서 이런 광경을 보았으니 어찌 열광하지 않으랴.
하지만 그 엄청난 함성 속에서도, 청명은 그저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뭐, 대단한 일 했다고."
"화산신룡! 화산신룡! 화산파! 화산신룡!"
"별것도 아닌……."
"화산! 화산! 화산신룡!"
"……."
청명의 입가가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백천이 그런 그의 모습을 떨떠름하게 보았다.
'좋아 죽네, 좋아 죽어.'
"아, 아니. 뭐……. 이런 별것도 아닌……. 꺄, 꺄르……."
"……그냥 웃어라, 청명아. 그러다 어디 한 군데 터지겠다."
"좋기는. 저런 조무래기 하나 잡았다고!"
"조동아리는 그리 말하지만, 몸은 솔직한걸?"
그러자 청명이 애써 손으로 입가를 쫙쫙 펴 댔다.
백천은 한숨을 푹 쉬었다.
단 일 격.
정말 말 그대로 일 격이었다.
그 일 격만으로 청명은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이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아 버렸다.
그걸 노리고 일 격에 끝낸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귀찮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목적이 무엇이었든 그 결과는 같다.
이제 분명 비무대회가 이어지는 내내 모두가 청명을, 그리고 화산을 주목할 것이다.
"조심해라, 청명아."
"응?"
청명이 고개를 슬쩍 돌려 백천을 바라보았다.
"과하게 주목받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야. 봐. 벌써 다들 너를 경계하기 시작했잖아."
백천의 눈짓에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아까보다 많은 시선들이 쏠려 있다.
미칠 듯이 환호하는 관객들의 주목이야 당연하다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눈빛도 모조리 그에게로 쏠려 있었다.
대회에 참가한 각파의 제자들이다.
누군가는 동요하는 눈빛으로, 또 누군가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살핀다.
그들도 눈이 있으니 지금 청명이 한 짓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경계를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일 것이다.
하지만 그 시선을 받는 청명은 되레 눈을 부라렸다.
"이 새끼들이, 어디서 눈을 치켜 떠?! 눈알을 확 그냥!"
"아니, 이 미친놈아!"
다행히 옆에 대기하고 있던 백천이 잽싸게 청명을 내리누르며 진정시켰다.
"그런 모습을 보여 줬으니 경계할 수밖에 없잖느냐!"
"제까짓 것들이 경계하면 뭘 어쩔 건데? 어차피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어…….
그건 그렇지.
확실히 청명은 경계를 하고 어쩌고 해서 감당할 수 있는 이가 아니다. 저들이 그걸 아는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그때, 청명이 슬쩍 입술을 핥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기억해 둬, 사숙."
"응?"
"인정사정 봐주지 마."
"……."
"적당히 상대해 주면 다음에는 잘만 하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기 마련이야. 그리고 만만하게 보지. 이길 때는 피도 눈물도 없이 짓밟아 버려야 해. 그래야 다음에 만나면 기가 죽어 눈을 못 마주치거든."
"……우리가 흑도냐?"
"흑도 애들에게도 배울 건 있는 법이지. 그놈들은 체면이고 나발이고 살아남는 게 우선이고, 이득이 우선이라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이거든."
"……."
"명심해. 절대 봐주지 마. 이기려면 압도적으로 이겨야 돼! 그래야……."
청명의 시선이 슬쩍 위로 향했다.
단상 위에 있는 각 파의 장문인들에게로.
"저들도 실감할 테니까. 이 판이 누굴 위해 깔린 판인지 말이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문인들을 훑는 그의 눈에는 명백한 조소가 어려 있었다.
한편.
"허어?"
연단 위에서 비무를 지켜보던 각 파의 장문인들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실로 놀랍습니다. 저 화산의 아이의 실력이 정말 출중하지 않습니까?"
"상대가 크게 방심한 것도 아니었는데, 순간적으로 저도 움직임을 놓쳤습니다."
"화산신룡이라는 이름이 몇 차례 들린다 싶더니, 정말 훌륭한 동량이 될 아이가 아닙니까?"
그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감탄이 확연히 묻어났다.
청명이 보여 준 실력은 구파와 오대세가의 수장들조차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들의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경계의 빛 또한 드러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일 격이라니.'
'저 곽환소라는 이의 실력도 절대 모자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반응조차 하지 못했단 건가?'
이건 누구의 실력이 더 뛰어난가 하는 문제를 넘어섰다.
적어도 한 배분 이상의 차이가 나야 노려 볼 수 있는 결과다.
아니, 한 배분 이상의 차이가 난다고 해도 대부분은 곽환소를 일격에 쓰러뜨릴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그 어려운 일을 저 화산신룡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화산신룡이라. 화산신룡……."
"듣던 것 이상이로군요."
이곳에 있는 장문인들 중 대부분은 화산신룡이 천하제일 후기지수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았었다.
정확하게는 화산신룡을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천하제일 후기지수라는 허명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
사실상 그 자리는 흘러나온 평가와 강호에 나선 이들의 행적으로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후기지수들을 모두 일일이 비교해 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게다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쯤 되는 대문파라면 각 파마다 미래를 걸고 키우는 동량 하나쯤은 있는 법.
'내 제자가 강호에 나서면 저런 평가쯤은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
이게 각 장문인들이 내심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어쩌면 화산신룡이 얻은 명성이 결코 허명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과연…… 자신들의 제자들이 저런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그 질문에는 누구도 쉽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못할 것이다.
의례적으로 오고 가던 덕담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황당한 결과가 해석이 되기 시작하자 경계심이 감탄을 앞서기 시작한 탓이다
"크흐흠."
그 기묘한 분위기 속에 현종은 고무줄이라도 당겨 놓은 듯이 자꾸만 쫙쫙 펴지는 어깨를 진정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자꾸만 말을 잃어 가는 장문인들의 속내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황당하겠지.'
하지만 조금 더 황당해도 된다.
현종은 그 황당함을 몇 년째 겪고 있으니까. 그 모진 세월을 버텨 온 대가로 드디어 이 순간이 온 것이다.
화산의 청명이라는 이를 천하의 모두에게 선보이는 바로 이 순간이!
그때, 당군악이 고소를 머금으며 슬쩍 현종에게 말을 건다.
"축하드립니다, 화산 장문인."
"하……. 하하. 운이 좋았겠지요."
"운이라니요. 겸손도 지나치면 비례가 되는 법입니다. 저만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이가 또 있겠습니까?"
당군악의 말에, 누군가가 끼어들어 답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조금 놀란 현종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대화에 끼어든 이가 종남의 장문인인 천하검 종리곡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화산신룡 청명입니다. 예전 종화지회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군요. 가히 후대의 천하제일인을 노릴 수 있는 인재입니다."
'이 양반이?'
뭘 잘못 처먹었나?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종리곡을 바라보던 현종이 이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수작이로군.'
천하에서 청명에게 가장 큰 망신을 당한 곳이 바로 종남이다.
그 결과를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청명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주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래야 종남이 별것 아닌 자에게 망신을 당한 머저리 같은 문파가 되지 않을 테니까.
물론, 속으로야 청명을 몇 번이고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싫겠지만 말이다.
"과연 그렇습니다."
"흐음. 역시나 화산신룡입니다."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허도진인도 청명을 치켜세우기 시작한다.
당군악과 허도진인. 이 두 사람의 말은 그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다.
허도진인까지 나서니 다른 장문인들도 모두 경계심을 감추며 덕담과 칭찬을 건네기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장문인."
"하하. 화산이 옛 명성을 되찾는 것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종의 입가가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부모의 면을 세우는 것은 자식이고, 장문인의 면을 세우는 것은 제자다. 이곳에서 이보다 더 확실하게 그의 면을 세워 주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크흐흠. 크흠! 다들 감사드립니다."
현종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연신 헛기침을 했다.
아래를 바라보니 백천과 드잡이를 하는 청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때로는 정말 평생 쌓아 온 도고 나발이고, 올라타서 냅다 까 버리고 싶게 만드는 청명이지만, 이럴 때는 또 이렇게 예쁠 수가 없다.
일단 청명의 일이라면 싸고도는 현영의 심정을 지금 이 순간 절절히 느끼고 있는 현종이었다.
내심이야 어떻든 모두가 화산을 축하하는 와중에 그 분위기에 끼지 못하는 한 명이 있었다.
"그저 기습으로 벌어진 일이 아닙니까!"
"음."
"크음."
그 황당한 말에 고개를 돌렸던 이들이 목소리를 낸 자를 확인하고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해남파의 장문인인 금양백(金洋魄)이었다.
그는 붉다 못해 거의 검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승부의 결과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 아이가 방심하지 않았다면 이리 쉽게 결판이 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변명에 듣고 있던 당군악이 쓰게 웃었다.
'자기 얼굴에 먹칠을 하는군.'
무인에게 있어서 방심한다는 것은 실력이 없는 것보다 더한 수치다. 특히나 정식으로 승부를 겨루는 비무대 위에서 방심이라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동시에 금양백의 심정을 이해했다.
'아마 지금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힘들겠지.'
애지중지 키워 온 제자가 일 격에 박살이 나고 해남의 이름이 곤두박질친 상황이다.
일파를 이끌어 가는 장문인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
"두고 보십시오. 해남의 실력이 이 정도가 아니라는 걸 곧 다른 아이들이 증명해 줄 테니 말입니다!"
노기 어린 금양백의 말에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모두의 머릿속에 한 단어만은 확실히 파고들었다.
'다른 아이들이라.'
명성 자자하던 화산신룡 청명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렇다면 화산의 다른 제자들의 실력은 어떨 것인가?
장문인들의 시선이 모여 있는 화산파의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그 결과에 따라서…….
'어쩌면 이 비무대회는 화산파를 위한 장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장문인들의 얼굴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잘 들어라."
백천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절대로 이놈을 따라하지 마라."
그리고 옆에서 의자에 앉아 육포를 촥촥 찢어 먹는 청명을 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고, 우리가 청명이 놈을 따라하려 들다간 대가리가 깨지는 법이다. 절대 단숨에 승부를 내려 하지 말고 실력을 모두 발휘하는 데만 집중해라! 알겠느냐?"
"예, 사형!"
"알겠습니다! 사숙!"
"음!"
모두가 백천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청명만은 생각이 다르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힌다.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사숙."
"시끄럽다!"
백천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네가 할 수 있는 걸 시키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시키라고, 인마!"
"저 새끼들 잡는 게 뭐 별일이라고."
"끄으응!"
결국 그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획 돌렸다. 그리고 다시 신신당부했다.
"여하튼 그러니까 절대 청명이 놈이 하는 짓을 따라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예!"
아무리 청명이 놈이 무섭다고는 해도 이렇게 대놓고 백천과 청명의 의견이 충돌하게 되면 일단은 백천의 말을 따르는 게 옳다.
그 순간이었다.
"사, 사형! 조걸이 시합 시작합니다!"
"엇!"
백천이 화들짝 놀라며 얼른 소리쳤다.
"조걸이 너도 일단은 침착……!"
쾅!
"……."
"……."
갈 곳 잃은 백천의 외침이 쑥 들어갔다.
모두가 멍한 눈으로 비무대 위만 바라보았다.
일 격으로 상대를 비무장 밖으로 날려 버린 조걸 역시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장외에 떨어져 경련하는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치, 침착하게……."
조걸이 자신의 검과 쓰러진 상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백천과 눈이 마주친 그는 몇 번 입을 벙긋거리다 억울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 사숙."
"……으응?"
"……이 새끼들이 너무 약합니다."
"……."
약해?
구파일방의 제자들이?
그때 둥그렇게 호선 그린 눈으로 이쪽을 보던 청명이 낄낄 웃기 시작했다.
"배애애애앱새?"
"……."
"그럼 쟤들은 뭐 지렁이쯤 되는 모양이지? 크으, 그런 의미였구나. 우리 동룡이 거만한 것 좀 보소."
"……."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 아니, 과하게 잘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는 백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