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진짜 사고가 뭔지 보여 줘? (3)
"헤헤. 그렇죠? 역시 방장님이랑은 말이 잘 통하네요!"
"방장!"
"어찌……."
소림의 공자 배가 놀라 법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법정은 여전히 부드러운 얼굴로 되레 물었다.
"저 소도장의 말에 틀린 것이 있더냐?"
"……저들은 소림을 모욕했습니다!"
"모욕당한 것은 소림이 아니라. 네 작은 자존심이 아니더냐."
"……."
법정이 고개를 슬쩍 저었다.
"소도장의 말이 옳다. 이곳에 타파의 제자들이 모인 이유는 서로 싸움박질을 벌이기 위해서지. 그 시기와 방법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해서 어찌 저들을 탓하겠는가?"
"하지만 해남의 제자들이 상하지 않았습니까?"
공화의 말에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아니, 그럼 해남파가 직접 따질 일이지, 왜 대사님이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네요. 해남이 소림 지파도 아닌데. 해남파는 말할 입도 없대요?"
"……."
공화는 너무 경악한 나머지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고 청명을 보았다.
'뭐 저런 놈이?'
주변의 중인들이 저 말을 모두 들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소림이 해남을 비호해 화산을 탓해 버리면 해남은 이런 일 하나 해결하지 못해 소림의 손을 빌리는 팔푼이가 되어버린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말을 지어내길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이런 좋은 먹잇감을 놓칠 리가 있겠는가?
말 몇 마디만으로 상황을 여기까지 몰아간 청명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공화가 울분을 꾹 눌렀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서글프게도, 청명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 아니다. 기왕에 말 나온 거, 직접 물어보죠? 야, 너희들!"
"……."
청명이 해남 제자들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그러자 모두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니들 조금 전에 처맞은 복수를 비무대 위에서 제 손으로 할 거냐, 아니면 얻어맞았으니 쟤들 때려 달라고 소림에 징징댈 거냐?"
해남 제자들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저놈이 저리 말해 버리면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차라리 얻어맞고 후일을 도모하는 약자가 되는 게 낫지, 자신의 복수를 남에게 맡기는 소인배가 될 수는 없다.
명문의 제자를 자처하는 이들이라면……. 아니 강호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너무나도 당연한 선택이다.
"다, 당연히 우리 손으로 복수를 할 것이다!"
"검만 들었으면 너희 같은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절대 봐주지 않을 테니까!"
청명이 심드렁한 눈으로 다시 공화를 바라본다.
"그렇다는뎁쇼?"
"……."
그 덕에 공화는 숫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당사자가 저리 나오면 소림에서는 할 말이 없어진다.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애들끼리 놀다 보면 주먹다짐도 좀 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코피도 좀 터지고 하는 거죠.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우르르 달려와서 장문인 나오라 마라……. 에잉. 소림이 언제부터 이런 곳이 되었는지. 그렇지 않습니까? 장문방장?"
"허허. 틀린 말은 아니로다."
"방장!"
공화가 속이 터지다 못해 문드러진 듯한 얼굴로 법정을 애타게 불렀다.
하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을 본 순간 공화는 말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소림의 입장을 정리하겠소."
법정이 현종을 돌아보며 말했다.
"소림의 경내에서 싸움을 벌인 일은 분명 지탄을 받아야 할 일이나, 비무 대회를 위해 모인 이들은 당연히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소. 그에 대한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소림의 책임이라 할 수 있으니, 내 해남과 화산에 소림의 이름으로 사죄를 드리겠소."
법정이 합장을 하더니 깊이 고개를 숙인다.
현종은 기겁을 했고, 해남의 제자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장문방장! 방장께서 이러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든 법정이 다시 부드럽게 웃는다.
"각 파에서 서로 쌓은 연은 비무 대회에서 풀 수 있을 것이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이 일은 각파에서 풀어야 할 일이니 소림은 더 관여하지 않겠소이다."
"으음."
현종이 침음을 흘렸다.
"다만."
법정이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비무 대회를 앞두고 이런 일이 자꾸 벌어진다면 모두가 격해질 수밖에 없으니 모두 위상과 체면에 맞는 행동을 보여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법정이 가볍게 합장을 했다.
"그럼."
이윽고 그가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가자 화산을 노려보던 소림 공자 배들도 빠르게 그 뒤를 따랐다.
"과연 소림이다."
"훌륭하구나!"
그 깔끔한 처사에 지켜보던 중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일이 모나지 않게 마무리되어 다들 안도했다. 이 일이 크게 번졌다면 어디까지 커졌을지 모를 상황 아니었는가?
"그래도 소림은 소림이라는 건가?"
청명이 중얼거리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잘 해결됐으니…….
턱.
그 순간 누군가 청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청명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움찔.
그리고 그는 보았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은 현종을 말이다.
"……따라오너라."
"……."
……이상하네.
여기는 소림사인데…… 왜 아수라가 있지?
허허…….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법정의 우측으로 따라붙은 공화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장. 어찌 일을 이리 처리하십니까?"
다른 공자 배들도 같은 생각인지 얼굴에서 불만을 감추지 못했다.
"저들은 소림을 모욕했습니다. 저 어린아이들이 소림의 경내에서 싸움을 벌이다니. 이건 소림을 완전히 모욕하는 처사가 아닙니까?"
"벌을 줬어야 합니다!"
법정의 낯빛이 천천히 바뀌었다.
부드럽기 짝이 없던 그 얼굴이 아니다. 천년소림의 방장다운 위엄과 절도가 가득한 얼굴로 그가 싸늘히 일갈했다.
"그럼 내가 그 많은 이들 앞에서 소림의 허락을 받고 칼질을 하는 것은 괜찮으나, 허락 없이 주먹질을 한 것은 죄라고 말했어야 한단 뜻이더냐?"
"그, 그건……."
"으음."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저 어린아이의 심계조차 따라잡지 못하다니."
법정이 낮게 불호를 외웠다.
'칼날 같았다.'
장난처럼 건들건들 던지는 말속에 벼린 칼날이 숨어 있었다.
'거기 내가 없었다면?'
공화는 아마 저들을 압송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순순히 잡아들일 수는 있었겠지만…….
'소림이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워 타 문파를 핍박한다는 말이 반드시 새어 나왔겠지.'
그는 이미 화산의 장문인에게 경고한 바가 있었다.
기세가 좋은 문파에는 반드시 시기하는 눈이 따라붙는다고 말이다.
그 말 그대로라면 천하에서 가장 시기를 많이 받는 문파는 무조건 소림일 수밖에 없다.
틈만 나면 소림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 이 일은 좋은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소림은 제대로 징벌하지도 못할 이들을 잡아들인 대가로 위선자라는 이름을 얻었을 것이다.
"허허."
법정이 낮게 웃었다.
'정말 여기까지 보고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인가? 그 어린아이가?'
잠깐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입을 열었다.
"공화."
"예, 방장."
"그 청명이란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으음."
대답은 공화가 아닌 다른 공자 배에게서 나왔다.
"화산의 청명이라면 당금 강호의 천하제일 후기지수로 불리는 화산신룡일 것입니다."
"화산신룡?"
"예. 종남의 진금룡을 가볍게 이기고, 무당과의 승부에서도 승리했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검증되지 않는 뜬소문까지 포함한다면 무당의 무진과의 비무에서 승리하고, 사천당가의 가주와의 비무에서도 이겼다고……."
"어디 감히 장문방장께 그런 헛소문을 전하는가!"
"……송구합니다."
공화의 일갈에 말하던 이가 움찔하며 입을 닫았다.
"무당의 무진까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사천당가의 가주라니!"
"그저 소문이 그렇다는……."
"되었다."
법정이 두 사람의 대화를 자제시켰다.
'화산신룡이라.'
그 이름이 법정의 뇌리에 단단히 틀어박힌다.
"화산이 최근 기세가 좋다고 하더니 저런 아이가 있었구나. 확실히 걸물이로다. 저런 아이가 있으면 주변의 아이들도 당연히 이끌릴 수밖에 없겠지."
"……검을 들지 않고 싸운 결과였다고는 하나, 해남의 제자들을 일방적으로 쓰러뜨린 것은 결코 좌시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닙니다. 어쩌면……."
공화가 말끝을 흐린다.
끝까지 듣지 않더라도 법정은 그가 하고자 한 말이 무언지 알고 있었다.
'어쩌면 소림에게도 곤란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아마 공화는 소림을 비롯한 구파일방이 화산을 내쫓았던 일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화산은 당연히 구파일방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을 터.
한데 그런 화산의 입지가 상승하여 구파일방을 위협한다면 당연히 복귀에 대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건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이고, 누구도 편치 못한 일이다.
하지만…….
법정이 자신도 모르게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화산의 제자들이 보인다.
'화산이라.'
옆구리가 따끔하다.
공화는 그 일을 걱정했지만, 법정에게 있어서 그 일은 작은 일에 불과하다.
오히려 더 깊은 곳.
그 이전의 원죄가 법정을 짓누른다.
"하늘을 가린 손바닥을 언제까지 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장문방장?"
"아니, 아니다."
법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지난 일이다.'
심지어 그의 대가 아니라 몇 대 전에 벌어진 일일 뿐이다.
"공화."
"예, 장문방장."
"화산과 저 화산신룡이라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말도록 해라."
"그리하겠습니다."
"가자꾸나."
법정이 발을 조금 재촉했다.
하나 그의 걸음은 조금 전과 달리, 더 무거운 족적을 남겼다.
* * *
"……."
"……."
세상에는 사람을 짓누를 수 있는 말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지금 청명은 새삼스럽게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차라리 말이 나을 것 같은데.'
무릎을 꿇은 그의 세 걸음 앞에 현종이 앉아 있다.
현종은 처소에 도착하자마자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들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게 지금껏 이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청명도 청명이지만 다른 제자들은 지금 거의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백천의 등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차라리 패십시오, 장문인!'
'청명이한테 얻어맞는 게 낫겠다.'
'무, 무셔…….'
그러고 있기를 한참.
아무 말도 없이 청명 일행을 노려보던 현종이 마침내 입을 비틀며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테니, 그냥 사고만 치지 말라고……."
"……."
"그 하나 당부하고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현종의 눈에 새파란 광망이 돌았다.
청명이 그 광경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사람 됐네, 사람.'
처음 봤을 때는 마냥 인자하고 부드럽던 천상 도사였는데, 이제는 눈에 저렇게 살기도 담을 줄 알게 됐다.
"그새를 못 참고 사고를 쳐! 야, 이 망둥이 같은 놈들아! 으아아아아!"
급기야 현종이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양쪽에서 팔을 움켜잡은 현자 배 탓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진정하십시오, 장문인!"
"어허. 왜 이리 화를 내십니까. 심호흡하십시오. 심호흡. 흡흡하하!"
"뭔 놈의 심호흡이 그따위야?"
"아, 이게 아니었나?"
"으아아아! 이놈들아! 이 망할 놈들아!"
현종이 연신 청명을 향해 발길질을 한다. 하지만 현자 배들이 꽉 잡고 있는 덕분에 그의 발은 애처롭게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소림에서! 소오오오오림에서 이놈들아! 내가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창피해서!"
"어?"
그러자 청명이 이해 못 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좀 이상한데요? 저희가 해남파 애새끼들을 후려 깠는데 당연히 자랑스러워하셔야 할 일 같은데! 이제 어깨에 힘을 좀……!"
"으아아아아아아!"
현종이 급기야 신발을 벗어 청명에게 집어 던졌다. 청명은 날아드는 신발을 슬쩍 피하며 배시시 웃었다.
"헤헤. 그렇게 격하게 칭찬해 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자로서 당연한 일을 한 건데요, 뭐."
"나가아아아아아!"
"진짜요?"
"아, 아니다! 나가지 마라! 아니, 절대로 나가지 마! 아무 데도 가지 마!"
현종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연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끄으으으응. 여길 오는 게 아니었어. 여기에 오는 게! 이제 첫날인데 대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어찌 감당하려고! 선조이시여. 선조이시여, 제게 힘을 주소서."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그를 보며 청명이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선조님이 이 선조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잘한 거지. 그렇죠? 장문사형?'
- 제발 그 아가리 좀 다물어.
에이.
거 말이 심하시네.
낄낄낄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