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진짜 사고가 뭔지 보여 줘? (2)
소림승들을 발견한 화산과 해남의 제자들이 일제히 손을 멈추었다.
가장 앞에 선 소림승이 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소리쳤다.
"감히 신성한 소림의 경내에서 싸움을 벌이다니! 그대들이 소림을 무시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소?! 당장 손을 멈추시오. 그러지 않을 시엔 그대들의 문파에 죄를 묻겠소!"
"쯧."
"에이."
화산의 제자들이 해남파 제자들의 멱살을 놓고, 패던 놈들을 밀어 낸 뒤 뒤로 물러난다.
그 모습을 본 소림승이 노기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소속을 밝히시오!"
화산의 제자들이 우물쭈물하며 눈치만 살피는데, 그사이 신색을 정비한 백천이 앞으로 나서서 포권 했다.
"저희는 화산파의 제자들입니다. 본의 아니게……."
"화산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승이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화산파의 장문인은 어디에 계시오! 내 이 일의 책임을 물어야겠소!"
백천의 얼굴이 굳었다.
사고를 친 게 사실이라 할 말은 없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저들의 반응이 격하다.
"대사. 저희는……."
"긴말할 것 없소! 장문인은 어디 계시오!"
노승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제자들을 어찌 관리했기에 다른 문파를 저리 곤죽을 만들어 놓는다는 말이오. 화산은 협의도 모른다는 말이오? 어디 약한 문파……."
말을 하던 노승이 고개를 갸웃한다.
"약한……. 약……. 어?"
그리고 그의 쪼글쪼글한 눈이 점점 커졌다.
신나게 얻어맞아 서글프게 널브러진 이들을 보던 그는 결국 경악을 참지 못하고 신음처럼 말했다.
"……해남?"
"……."
"아, 아니. 해남파……. 약한? 어?"
당황한 시선이 화산과 해남을 오고 간다.
그러자 화산과 해남의 제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다 같이 고개를 숙였으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달랐다.
화산의 제자들은 친구를 괴롭히다가 걸린 아이 같은 얼굴인 반면…….
'미치겠네.'
'이제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냐.'
해남파 제자들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상황이 너무도 명명백백하여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
이쯤 되면 차라리 얻어맞고 끝나는 게 속이 편할 지경이다.
소림이 이 상황을 목격했으니 곧 소림에 와 있는 모두가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 아닌가?
"……해남파가…… 화산에? 해남파가?"
노승은 도무지 이 상황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는다는 듯 혼란스러워 보였다.
해남파가 어떤 곳인가?
바로 구파일방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명문 거파다.
물론 해남이 구파일방에서는 말석이나 다름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는 하나, 고작 그런 이유로 구파일방이라는 커다란 이름의 빛이 바래지는 않는다.
그 말석에 들기 위해 천하의 모든 문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해남파가…….
'화산에 패한다고?'
아니, 이건 패한 수준도 아니다.
해남의 제자들의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있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이런 상황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대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반면에 화산의 제자들은 겸연쩍어 보일 뿐, 딱히 다친 곳도 보이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이 두 문파가 맞붙으면 결과가 반대로 나오는 게 정상이 아닌가?'
구파일방인 해남과 이제는 몰락하여 이름만 남았다는 화산의 싸움이다.
강호인들을 모아 내기를 걸라고 하면 화산에 거는 쪽은 미친놈 소리를 듣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말인가.
"사형."
"음? 으음? 아, 그렇지."
노승이 화들짝 놀란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화산이 이겼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들이 소림의 경내에서 패싸움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크흠."
크게 헛기침하여 분위기를 환기한 노승이 다시 굳은 얼굴로 백천을 바라본다.
"다시 한번 묻겠소. 화산의 장문인은 지금 어디에 계시오?"
백천이 낮게 한숨을 쉬고 대답을 하려던 찰나였다.
"여기에 있소이다."
장내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돌아간다.
현종이 굳은 얼굴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를 현상과 현영이 뒤따랐다. 현영은 적잖이 난감해 보였다.
노승은 현종을 보자마자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화산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저는 소림의 계율원에 소속되어 있는 공화(空和)라 합니다."
"공화 대사셨구려. 화산의 현종입니다."
"대사라는 말은 제게 버겁습니다. 그저 공화라 불러 주십시오."
현종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았으면 서로 덕담을 주고받았을 상황이지만, 지금은 그저 굳은 얼굴로 해야 할 말을 고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현종이 슬쩍 고개를 돌려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화산 제자들의 고개가 벼락처럼 아래로 꺾였다.
필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외면하는 제자들을 보며, 현종의 입에선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끄으으으응."
그렇게 더 숙이다간 목 부러지겠다, 이놈들아!
'어떻게!'
하루도 아니고, 반나절도 아니고, 반 시진이다. 어떻게 고작 반 시진을 버티지 못하고 사고를 친단 말인가!
'처소에 던져 놓은 봇짐에 먼지도 안 가라앉았겠다!'
현종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다.
이 산 도적 같은 놈들을 소림 한가운데에 던져다 놓고 아무런 사고도 없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나!
불과 반 시진 만에 이리 쾌속하고 깔끔하게 사고를 쳐 대다니!
"끄응."
어쩌겠는가? 이게 장문인의 업보인 것을.
한숨을 푹푹 내쉰 현종은 무안한 얼굴로 공화를 바라보았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우리 아이들을 단속해야 했었는데."
"죄송이란 말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장문인."
공화가 차갑게 끊었다.
"이곳은 소림이고, 저들은 소림 내부에서 죄를 지었소. 이건 말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저들을 모두 계율원으로 압송하여 치죄해야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현종의 얼굴에 눈에 띄게 굳어졌다.
"지금 계율원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계율원은 소림의 징죄를 담당하는 곳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화산의 제자들이 그곳에 들어야 한단 말입니까?"
"소림의 법도가 그러하외다."
현종이 이를 악물었다.
"나는 화산의 장문으로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장문인!"
공화가 놀란 눈으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정녕 이리 나오실 것입니까?"
"뭐라 말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이 아이들을 소림의 계율원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
공화의 수염이 파들파들 떨렸다.
"지금 소림을 무시하시겠단 겁니까?"
"말이 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소림을 무시하는 일이라면 감수해야겠지요."
"자, 장문인!"
놀란 현상이 저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소림과 척을 지다니.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종의 발언에 공화도 놀랐는지 부릅뜬 눈을 어찌하지 못했다.
"……어찌 이리까지 하십니까? 저들의 잘못이 명백하거늘!"
"내 아이가 잘못을 했으면 따끔하게 벌을 주는 게 당연하지요."
"그런데 왜?"
"하나 어떤 죄를 지었고, 그 죄에 상응하는 벌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건 소림이 아니라 화산의 장문인인 접니다! 저는 제 제자들의 처분을 소림에 넘기지 않습니다."
단호한 말이었다.
화산의 제자들이 떨리는 눈으로 현종을 바라본다.
그 당당한 등을 보고 있으니 뭔가 뿌듯하게 차오르는 것만 같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뒤늦게 실감되었다.
'참았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왜 열이 올라서는.'
모두가 죄책감에 얼굴이 검게 죽어 가는 가운데, 선두에 선 백천은 더욱 그 무게가 더했다.
아이들을 말렸어야 할 그가 오히려 더 날뛴 꼴이 아닌가.
'이 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내가 져야 한다.'
백천이 그리 결심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두 어른의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렸다.
"정녕 이리 나오시겠습니까? 화산이 문파 차원에서 저들을 비호한다면 소림은 화산에 죄를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잘못이듯, 제자들의 잘못은 화산의 잘못이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외다!"
"으음! 아미타불. 정 그러하시다면……!"
불호를 외운 공화가 막 싸늘하게 일갈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요."
"응?"
공화와 현종의 고개가 동시에 한곳으로 돌아간다.
한 사람이 쪼그려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현종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 안 돼!'
청명이 히죽히죽 웃고 있다.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아무래도 당장 달려가 입을 틀어막아야겠다 생각한 현종이 발을 떼려는데…….
쓱.
'응?'
누군가가 그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돌아보니 현영이 속닥거리며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냅두십시다.'
'하나!'
'사고는 쳐도 수습은 확실한 놈 아닙니까?'
'어…….'
그렇지. 청명이가 사고를 쳐도 수습은 확실…….
"진짜?"
"……."
쟤가 수습을 한 적이 있다고?
정말?
현종의 시선이 격하게 청명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그의 입을 막기는 늦어 버렸다.
"듣다 보니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묻는 건데요. 땡……. 아니, 스님."
공화의 눈썹이 꿈틀댄다.
"그대는 누군가?"
"저는 청명이라고 하는데요."
"청명? 화산의 삼대제자인가?"
"네."
공화의 눈썹이 더 격하게 꿈틀댄다.
"화산의 어린 제자는 예의와 법도도 모르는가? 장문인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 어찌 삼대제자가 나선단 말인가?"
"소림 일대제자도 우리 장문인이랑 대화를 하는데 화산 삼대제자인 제가 소림 일대제자랑 대화 못 할 건 뭐죠?"
"……."
공화의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어디 어린놈이 함부로 나서냐는 말에
'너도 우리 장문인이랑 대화할 위치가 안 되는데 어디서 갑질이냐.'
라는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저, 저 튀겨 죽일!'
노기가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차올랐지만, 이건 절대 화를 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화를 내는 순간 그가 지금까지 현종에게 보였던 격한 언사가 칼이 되어 되돌아올 테니까.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듣다 보니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묻는 건데요."
"뭐가 이해가 안 가는가?"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부터 자꾸 죄가 어쩌고 하시던데."
"응?"
"저희가 뭘 잘못했죠?"
"……."
공화의 눈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지금 뭐라고?"
"우리가 뭘 잘못했냐고요."
청명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다. 비꼬는 기색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이 맑고 순수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재수 없다.'
'진짜 패고 싶다.'
'죄송합니다, 스님.'
되레 공화보다 화산의 제자들의 속이 더 뒤집어졌다.
'저, 저놈이 또 무슨 억지를 부리려고.'
당황한 현종이 얼른 상황을 수습하려 입을 열었지만, 안타깝게도 청명이 더 빨랐다.
"계율원에서 치죄를 하시겠다 했는데, 그러려면 저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말씀하셔야 압송할 명분이 있는 것 아닌가요?"
"죄가 없다?"
"네. 제 생각에는요."
공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림의 경내에서 싸움을 벌이고도 죄가 없다는 것이더냐!"
"소림의 경내가 뭐 다를 것 있어요?"
"뭐라?"
청명이 하품까지 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까부터 자꾸 소림, 소림 하시는데, 여기가 뭐 특별할 게 있는 곳이냐고요. 난전에서 싸움질을 벌이는 거랑 소림에서 싸움질을 벌이는 건 뭐 다른가요?"
"……."
공화가 입을 다물었다.
다르다. 당연히 다르다.
하지만 이건 절대 다르다고 대답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이런 상황에선…….
그가 슬쩍 주변을 훑는다.
어느새 몰려든 구경꾼들이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마당에
'당연히 소림의 경내는 신성한 곳이니 시장 바닥과 비교할 수는 없다.'
라는 대답을 하란 말인가?
불자로서 그건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다.
"물론 소림의 경내가 시장 바닥과 다를 것은 없다! 하지만 너희는 허락 없이 대규모로 싸움을 벌이지 않았느냐?"
"네. 그러니까 그게 왜 잘못이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쯧쯧. 진짜 이해를 못 하시네."
청명이 끙차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허리를 쭈욱 늘어져라 폈다.
"소림이 우릴 여기 불렀잖아요."
"그렇다. 초청을 받은 객이라면 당연히 예의를 지켜야……."
"왜 불렀는데요?"
"……음?"
"왜 불렀냐고요. 쌈박질하라고 부른 것 아닌가요?"
공화가 입을 쩌억 벌렸다.
"아, 아니 그게……."
이게 대체 뭔 개소린가?
"그대들을 초청한 이유는 무림 대회와 비무 대회를……."
"네. 그 비무 대회요. 그게 싸움박질 아닌가요?"
"……."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무림 대회인가 뭔가는 장문인분들만 참가하면 될 일이고, 우리는 싸우려고 같이 온 거잖아요. 그래서 싸웠는데 이게 뭔 큰 잘못이라고 아까부터 자꾸 그렇게 호들갑을 떠시는지 모르겠네요."
"그것과 이게 어찌 같으냐! 그건 정식 비무고 이건 싸움이 아니더냐!"
"뭐가 다르죠?"
청명이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밀어붙였다.
"비무는 칼 들고 하는 싸움질인데, 그건 소림에서 허락한 일이니 괜찮은 거고. 우리는 칼 내려놓고 주먹질을 했는데, 소림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안 되는 거다. 지금 이 말씀이신 거죠? 그죠?"
"어……."
공화가 입을 다물었다.
'뭔 말이 이렇게 되지?'
저건 정말 개소리고 궤변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저 말이 사실 그리 틀리지는 않다는 점이다.
비무란 사상자가 발생할 것을 각오하고 벌이는 전투다. 그 결과는 어찌 보면 이 패싸움질보다 참혹할 수도 있다.
그런 비무를 개최하는 이들이 지금의 싸움을 어떤 말로 비난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미타불. 아미타불!"
답답한 마음에 공화가 연신 불호를 왼다.
"화산의 제자들은……."
"아. 잠시만요."
청명이 다시 공화의 말을 잘라 버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를 따라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아!"
그리고 탄성을 내질렀다. 어느새 소림방장 법정이 그곳에 서 있었다.
"아미타불."
불호를 외운 법정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소도장의 말에 가히 틀린 것이 없도다."
날벼락 같은 판정에 모두가 경악하여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