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진짜 사고가 뭔지 보여 줘? (1)
미친 듯이 달려드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곽환소가 움찔했다.
'이 새끼들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
이곳은 소림의 경내다.
천하의 무인들이 가장 신성시 하는 곳이고, 현 강호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가진 문파의 배 속이라는 말이다.
기세에서 지고 싶지 않아 배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이리 나오면 적당한 시점에서 화산이 한발 물러 줄 거라고 생각했다. 저들 역시 이곳에서 사고를 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웬걸?
'뭐가 이렇게 후퇴가 없어?'
화산 놈들에게선 머뭇거림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다.
저 청명인가 뭔가 하는 놈이 지시를 내리자마자 마치 장군의 명령을 받은 군대처럼…….
아니, 그보다는 그냥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렸다고 판단한 곽환소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그리고 눈을 희번덕대며 달려드는 이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중에서도 선두에 선 이들은 그 기세가 확연히 유별났다.
"가라! 사숙! 사고! 사형!"
등 뒤에서 뭔가 외치는 소리와 함께 백천과 유이설. 윤종과 조걸이 선두에서 해남파를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손에 검은 들려 있지 않았지만, 그들이 내뿜는 기세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가장 선두에서 일직선으로 곽환소를 향해 달려들던 백천의 어깨를 윤종이 슬쩍 민다.
"뭐냐!"
"저 새끼는 제가 맡겠습니다, 사숙!"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인데, 사질이라는 놈이 사숙 걸 뺏어 먹으려고 해?"
"화산에 위아래가 어디 있습니까!"
"거참 옳은 소리다. 이 망할 놈아!"
백천이 윤종의 가슴을 손으로 쭉 밀어 내고는 다시 곽환소를 향해 돌진했다.
"이놈들이 나를 만만히 봐?"
곽환소가 눈에서 불을 뿜었다.
해남파 이대제자의 대제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감히 화산 놈들이 제 눈앞에서 서로 상대하겠다고 다투고 있으니 참을 수가 없었다.
"죽여 버리겠다! 기생오라비 같은 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곽환소가 백천을 향해 되레 달려들었다.
쇄애애애액!
권기(拳氣)를 품은 곽환소의 주먹이 백천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해남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일 권!
절정에 달한 격랑세(激浪勢)였다.
웬만한 그의 또래라면 아무리 명문의 제자라고 할지라도 쉽사리 맞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일 격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를 맞이하는 이는 백천이었다.
곽환소의 주먹을 본 백천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부드럽게 휘둘러진 그의 팔이 날라드는 곽환소의 손목에 착 달라붙어 가볍게 옆으로 밀어 냈다.
"엇?"
상대의 얼굴을 향해 쾌속하게 날아가던 곽환소의 주먹이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옆으로 비껴 나간 것이다.
'이, 이게 뭔?'
그리고 그의 눈에 허리를 뒤로 뒤트는 백천의 모습이 들어왔다.
한계까지 뒤틀린 몸이 일시에 회전했다.
이내 탄성을 잔뜩 실은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곽환소의 아래턱에 깔끔하게 틀어박힌다.
쿵!
사람의 주먹이 사람의 얼굴을 쳤는데 어이없게도 커다란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곽환소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몸뚱이가 팽이처럼 팽그르르 회전하며 날아가더니 담벼락에 그대로 처박혔다.
쾅!
해남의 제자들이 일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의 시선이 뒤쪽에 처박힌 곽환소에게로 천천히 돌아간다.
'뭐야?'
'뭔 일이 벌어진 거야?'
경악과 당황이 동시에 휘몰아쳤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사…형?"
"세, 세상에……. 한 방에?"
게거품을 물고 경련하는 곽환소를 보며 해남의 제자들이 연신 부릅뜬 눈을 비벼 댔다.
일 격.
단 일 격이다.
'어떻게 대사형이 일 격에 의식을 잃을 수가 있지?'
상대가 권각을 주로 익히는 소림의 제자라면 어떻게 이해하려 노력이라도 해 보겠다.
그런데 검문의 제자와 맞서서 단 일 격에 박살이 난다고?
그것도 심지어 화산에게?
도무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해남의 제자들을 보며 백천이 혀를 찼다.
"어디 내 앞에서 주먹질이야. 내가 지금까지 죽빵만 못해도 천 대는 맞은 사람인데."
때린 게 아니라 맞았다는 게 슬프다.
윤종이 떨떠름한 얼굴로 속삭인다.
"사숙. 그거 자랑 아닙니다."
특히나 사질한테 얻어맞은 건 더더욱 자랑이 아니다.
"크흠!"
낮게 헛기침을 한 백천이 해남파를 향해 턱짓했다.
"긴말할 것 없다! 쓸어 버려!"
"존명!"
기세를 탄 화산의 제자들이 눈앞에 보이는 해남파의 제자들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곽환소가 일 격에 날아가는 것을 본 해남파의 제자들은 충격을 미처 다 떨치지 못한 채 화산의 제자들을 맞이해야 했다.
"으아아아아!"
전신을 탄탄한 근육으로 무장한 화산의 제자들이 육탄으로 밀어붙여 온다.
"이 새끼들이!"
"다시 입 털어 봐, 새끼들아!"
맞는 데는 이골이 나 있고, 무시당하는 것은 일상이나 다름없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지난 육 개월간 그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봤다면, 역적질을 하다 잡혀 저 먼 북부의 오지에서 탄광 노동을 하고 있는 죄수들도 자신들의 삶에 감사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무시당하는 것엔 딱히 분노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시당하는 것과 화산이 무시당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안 그래도 니들 마음에 안 들었어."
"뭐? 구파일방? 해남 놈들이 언제부터 구파일방이라고 화산을 무시해?"
가슴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구파일방에서 쫓겨났다는 울분이 지금 터져 나오고 있었다.
조걸이 바로 앞에 있는 해남 제자의 얼굴을 움켜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어 버렸다.
쿵!
"끅!"
쿵! 쿵! 쿵! 쿵!
사람의 머리를 망치 삼아 바닥에 신나게 찧어 버린 조걸이 눈을 희번덕대며 다음 먹잇감을 찾는다.
"너!"
새로운 먹이를 발견한 조걸이 막 주먹을 휘두르려는 순간, 옆에서 비호처럼 나타난 윤종이 깔끔한 날라차기로 먹잇감의 턱주가리를 돌려 버렸다.
콰득.
"끄륵……."
바닥으로 털썩 쓰러지는 해남의 제자를 보며 조걸이 눈을 부라렸다.
"아니, 내가 팰 놈인데! 사형!"
하지만 윤종은 조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먹이를 찾는 맹수처럼 다음 해남 제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헉!"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윤종을 본 해남 제자가 헛바람을 삼켰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아한 도사 같은 놈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사람을 턱주가리를 깔끔하게 돌려 버리고 있다. 절제된 동작으로 농부가 벼를 베듯 착착 주먹을 날리는 모습이 공포스러울 정도다.
"아, 아니 어떻게?"
"뭘?"
"너, 너희는 검문이잖으냐?"
검문.
검을 주로 쓰는 문파를 일컫는 말.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누구나 팔방미인이 될 수는 없기에 주력으로 삼는 병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저 화산 놈들은 아무리 봐도 권각술에 너무 익숙하다.
'그러고 보면……?'
몸뚱아리도 딱 권각을 주로 쓰는 형태가 아닌가? 저 딱 벌어진 어깨와 잔 근육이 자글자글 들어찬 팔뚝이 의구심에 더 불을 지핀다.
"그래서 뭐?"
윤종이 피식 웃으며 해남 제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차라리 검을 뽑지 그랬냐. 우리가 맨 몸뚱어리로 구르는 건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럽거든."
어느 누구 때문에 정말 지옥 같은 짓거리를 하고 살았지. 너 줄 하나 없이 까마득한 절벽 올라 봤냐?
그거 한번 해 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뀐다, 인마.
"이, 이건 사기……."
"그럼 관아 가서 이야기해라, 이 새끼야!"
윤종은 낮은 회축으로 다리를 걷어 버리고 쓰러진 이에게 올라타 본격적으로 주먹을 휘둘러 댔다.
조걸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잘 싸운다, 우리 사형.'
저 양반이 도사란다. 아이고…….
그는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윤종뿐만이 아니었다. 화산의 제자들이 일방적으로 해남의 제자들을 후려 패고 있었다.
우선 백천이 곽환소를 일 격에 날려 버리며 기선을 제압했다는 것이 주요하게 작용했고, 저놈들이 명문의 제자들이라고는 하나 이런 패싸움은 처음 경험해 본다는 게 컸다.
"경험이 다르다고, 경험이! 이 자식들아!"
이쪽은 청명이 놈 주둥이에 주먹 한 방만 꽂아 보겠다고 단체로 달려들었다가 절벽 아래로 던져진 경험만 열 번이 넘는단 말이다!
모두가 날뛰는 와중에도 유별나게 눈에 띄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우선은 당연히 백천.
"감히 화산을 욕해? 이리 와. 좋은 말로 할 때 이리 와, 이 새끼들아."
백천이 눈을 까뒤집으며 걸리는 이들은 모조리 후려 까고 있었다.
화산에서 청명에게 가장 고통받은 이 중 하나가 백천이다. 그만큼 청명을 끔찍해하는 백천이지만…….
'싫어하면서 닮는다더니.'
저건 거의 뭐랄까……. 좀 더 훤칠하고 잘생긴 청명이 아닌가.
그 광경을 차마 더 볼 수 없었던 조걸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더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콰드득!
유이설의 발차기가 정확하게 명중한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조걸은 진저리를 치며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끄으으으으……."
가랑이를 움켜잡은 해남의 제자가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구슬픈 신음을 흘리며 무너진다.
바닥에 쓰려져 거품 물고 파들파들 떠는 모습을 보니 당장이라도 달려가 엉치께를 두드려 주고 싶어진다. 숨어 있던 측은지심이 모두 뛰쳐나오는 느낌이다.
하지만 유이설은 인간의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음 희생자를 탐색했다.
'사고가…… 화가 많이 나셨네.'
하기야.
화산에 대한 애정으로 따지면 제자들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사람이 바로 유이설 아니던가?
그런 사람이 화산을 욕하는 말을 면전에서 들었으니…… 이 사태는 저들이 자처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계집이 감히!"
"뭐?"
유이설의 발이 달려들던 이의 명치에 틀어박힌다.
그녀는 새우처럼 허리를 굽힌 이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얼굴에 정권을 박아 넣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조걸이 다시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미안하다, 얘들아.'
알고 보면 화산에서 제일 과격한 사람이 그분이라는 걸 내가 미리 말해 줬어야 하는 건데.
여자?
화산에는 그런 개념이 없단다.
그리고 의외의 활약을 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이 해남 촌놈들이!"
당소소가 바닥에 쓰러뜨린 해남파 제자위에 올라타 주먹을 휘두른다.
퍼억!
"어디 뚫린 입이라고!"
퍼억!
"진짜 뒈지려고 이것들이!"
한 방, 한 방을 꽂아 넣을 때마다 차지게 회전하는 허리가 저 주먹질에 실린 힘을 짐작하게 해 준다.
청명이 마음먹고 시작한 반년의 수련은 예쁘게 비도를 던지던 당가의 여협을 체중 실린 주먹을 연거푸 꽂아 넣는 화산의 호걸로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뒈져! 뒈져!"
아, 물론 성격도 좀 변한 것 같지만.
조걸이 빙그레 웃었다.
'할 게 없네.'
눈에 띄지 않는 이라고 약한 게 아니었다. 다들 자기가 맡은 이들 정도는 가볍게 허리를 접어 바닥에 메다꽂아 버리고 있으니까.
그러다 보니 수는 거의 두 배 가까이 많은 해남이 화산에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만들어 낸 당사자는…….
"잘한다, 잘한다! 옳지! 허리, 허리! 아니, 거기서는 대가리를 후드려 까야지! 뭘 배웠어, 그동안! 에잉."
저어기 뒤에서 열심히 훈수를 두고 있었다.
쪼그려 앉아 소리치는 모양새가, 곧 육포라도 하나 뜯을 기세다.
"아아아악!"
"뒤, 뒤로 물러나! 이 새끼들 미쳤어!"
"사람을 불러와라! 당장 사람을!"
완전히 눌려 버린 해남파의 제자들이 분분히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굶주린 사냥개처럼 그들을 추적했다.
"어딜 도망가!"
"이리 와, 새끼야! 이리 안 와? 도망가다 잡히면 더 맞는다?"
그리고 도망가는 해남파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포위망이 점점 좁아질수록 해남 제자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계속 해보시지. 아직 조동아리는 덜 맞았을 텐데."
"구파에서 쫓겨난 문파 뭐 어쩌고 저째? 다시 한번 말씀해 보시죠?"
완전히 질려 버린 해남의 제자들은 주춤주춤 중앙으로 뭉쳐 들었다. 그들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아무리 저들이 몸을 잘 단련해 왔다지만, 그들은 구파 일방의 해남파다. 그런데 이제는 구파일방도 아닌 화산에 이리 일방적으로 박살이 난다고?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살벌하게 조여 오는 화산의 기세가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명백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합니까?"
"……왜 나한테 물어."
한눈에 봐도 산적 같은 화산의 제자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해남파의 제자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을 질끈 감는 바로 그 순간.
"이게 뭣들 하는 짓이오!"
커다란 호통과 함께 황포를 입은 중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