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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65화 (265/1,567)

265화. 아니, 근데 저 새끼들이? (5)

쪼르르륵.

차가 잔에 따라지자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한 향이 방으로 퍼져 나갔다.

소림이라는 곳과 퍽 잘 어울리는 차향이다.

잔을 앞쪽으로 슬쩍 내민 소림의 방장 법정(法整)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차가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현종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방장께서 직접 따라 주시는 차인데, 입에 맞고 아니고가 있겠습니까. 생전 처음 받아 보는 호사입니다."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내젓는다.

"차는 그저 차일 뿐이지요. 황제가 따라도, 양민이 따라도 그저 다 같은 차일 뿐입니다. 편히 드시지요."

"예, 감사합니다."

현종이 잔을 받아 들고는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입이 쩍 벌어지는 소림의 경관과는 달리, 방장이 머무는 처소는 소탈하다 못해 초라할 정도였다.

'과연.'

법정 역시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소림의 방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그의 앞에 보이는 이에게서는 특별한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다.

몸에 걸치고 있는 황포자락이 주는 위엄을 제외한다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노승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사람을 더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드높은 자리에 앉아 그 자리가 주는 위엄을 스스로 내려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과연 소림의 방장이라는 무거운 자리를 맡을 만한 사람이구나.'

현종은 내심 감탄하며 법정을 바라보았다.

그때 법정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부드러움이 묻어난다.

"정말 먼 곳에서 오는 이들에 비한다면 섬서에서 온 저희가 감히 멀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보다 갑작스러운 인사 요청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법정이 현종을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눈가에 주름이 가득 졌다.

"되레 제가 감사할 일이지요. 장문인들께서 도착하시면 당연히 마주하게 될 줄 알았건만, 이상하게도 먼저 만나러 오시는 분이 없더군요. 장문인께서 제 체면을 살려 주셨습니다."

현종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 다들 소림 방장을 마주하고 싶은 생각이 없겠는가? 부담스러워 감히 먼저 요청할 수 없을 뿐이다.

현종 역시 별 기대 없이 그저 넌지시 청을 넣었던 것인데, 이리 덜컥 자리하게 되어 당황하는 중이었다.

"하여……."

법정이 가만히 현종을 보더니 운을 떼었다.

"최근 화산의 기세가 무척 좋다고 들었습니다. 화산에 다녀온 혜방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고 하더군요."

"하하……."

인상적이었겠지.

청명이를 봤으니까.

"좋은 일입니다. 천하의 명문이자 검문인 화산이 그 힘을 잃어 간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곤 했는데, 이리 장문인을 뵈니 화산의 미래가 얼마나 밝은지 알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법정이 도호를 외우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현종 역시 살짝 놀라며 마주 합장을 했다.

"듣자 하니 화종지회에서 화산이 좋은 성적을 거뒀다지요? 장문인께서 실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게 어찌 저의 공이겠습니까? 본문의 아이들이 노력해 준 덕입니다."

투명하게 가라앉은 법정의 눈이 현종을 살짝 훑는다.

"장문인."

"예, 방장. 말씀하십시오."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화산의 기세는 한층 더 상승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조심하라니?

조금 갑작스럽고 의아한 말에, 현종이 답 없이 물끄러미 법정을 보았다.

노승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람이란 참으로 안타까운 존재지요. 타인의 즐거움을 온전히 자신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은 시기와 질시의 마음을 품기 마련입니다."

"……."

"화산 역시 그런 질시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현종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가만히 법정을 보았다.

"대사의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화산은 아직 타문파의 시기를 받을 만큼 반석에 올라서지 못했습니다."

"흐음."

"그러니 그 걱정은 조금 미뤄 두고 일단은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얻는 것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아미타불. 제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낮게 불호를 외우는 법정을 보며 현종이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소탈하기 짝이 없구나.'

하지만 절대 지금 그가 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천년소림을 이끌어 가는 소림의 장문방장은 결코 평범한 이가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법정은 현종을 낱낱이 분해하여 평가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떤 성적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눈도장은 찍어 둬야지.'

그래야 앞으로 마주할 일이 있을 때 조금 더 편해질 테니까.

현종이 막 다른 말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음."

바깥이 소란스러워진 것을 느낀 현종과 법정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현종이 살짝 눈을 찌푸린 것과는 다르게 법정은 그저 평온한 얼굴이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예?"

법정이 빙그레 웃는다.

"사람이 이만큼 모이면 크고 작은 사고가 있기 마련이지요. 대부분은 별일 아닌 경우가 많으니 괘념치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에 현종의 얼굴은 되레 새하얗게 떴다.

'사고?'

크고 작은 사고?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이자 법정이 고개를 갸웃한다.

"왜 그러십니까?"

"하……. 하하. 그게……."

현종은 자기 객관화에 아주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자기 객관화는 자신뿐 아니라 화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곳에 아무리 많은 이들이 모여 있다고는 하나…….'

일단 사고라고 하면 화산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잖은가?

천하의 소림 한복판에서 사고를 칠 만한 망둥이들이 다른 문파에도 있을까?

'그럴 리가.'

현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문인?"

법정이 의아한 듯한 시선을 보내자 현종은 움찔하며 어색하게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밖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너무 궁금하여……."

"아……. 그러시다면."

법정이 문 쪽을 향해 눈길을 주며 낮게 말했다.

"공심(空心)."

즉시 문밖에서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 장문인."

"밖에 무슨 일이더냐?"

"……본사를 방문한 타파의 제자들이 충돌한 모양입니다."

"으음."

법정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혈기왕성한 이들을 모아 놓을 때부터 이런저런 사고를 피할 수 없으리라 각오는 했었다.

하지만 문호를 개방한 첫날부터 사고를 치는 대담한 이들이 있을 줄이야.

"어느 문파더냐?"

"해남과 화산이라 합니다."

"그래. 해남과……."

응?

"……어디?"

"해남과 화산입니다."

"화산. 그래 화산……. 화산이라면……."

법정의 고개가 슬쩍 올라갔다.

"……."

그와 눈이 마주친 현종이 움찔했다.

"……."

순간 지옥처럼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천하의 소림방장 법정조차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제, 제가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 그럼!"

현종이 부리나케 밖으로 튀어 나갔다.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던 법정은 헛웃음을 지으며 슬그머니 손을 회수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화산이라.'

정말 혈기방장한 녀석들이 아닌가?

"고얀지고."

아무래도 직접 한번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쓴웃음을 지은 법정이 천천히 방을 벗어났다.

* * *

"……저놈이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냐?"

해남도까지 기어가게 해 줘?

"허?"

해남파의 이대제자 중 대제자인 곽환소(郭歡騷)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백천을 바라보았다.

검을 검집째 바닥에 꽂고 팔짱을 끼고 있는 백천을 보고 있자니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게 울컥울컥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그를 화나게 하기에 과할 만큼 충분한 언행이었다.

심지어 곽환소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그렇게 건방지게 팔짱을 낀 백천의 모습이 은근히 멋지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저 허여멀겋게 생긴 놈이!'

당당한 해남의 바다 사나이로서, 저 모습이 멋지다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차라리 저 뒤에 있는 저 구릿빛의…….

"……너희 배 타냐?"

"뭐래?"

"아, 아니."

곽환소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 중원 얌생이들에게서 거친 바다 사나이의 향기가 난단 말인가?

그때 뒤에서 재촉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형."

"크흠."

그제야 정신을 차린 곽환소는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쓰며 목청을 높였다.

"망해 버린 문파 놈들이 입은 살았구나. 평소 같았으면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았겠지만 내 이번에는 특별히……"

그 순간 백천이 손을 살짝 들어 곽환소의 말을 막았다.

"……뭐냐?"

졸지에 말이 끊긴 곽환소가 얼굴을 구기며 묻자 백천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한다.

"해남 놈들은 주둥이로 싸우는 모양인데, 화산은 검으로 싸운다. 덤빌 거면 덤비고, 아니면 그냥 가라. 도망치는 놈 잡아 때리는 취미는 없으니까."

"……그런데 이 새끼가?"

발끈한 곽환소가 당장 앞으로 튀어 나갈 듯하자, 좌우에서 뻗어 나온 손이 그를 다급하게 움켜잡았다.

"사형!"

"여기가 어딘지 잊지 마십시오."

"이이익!"

곽환소는 눈에 핏발을 세우며 백천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놈들. 여기가 소림만 아니었으면.'

아무리 그들이 해남의 제자라지만 소림의 경내에서 타문파와 칼질을 할 담량은 없었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여기가 소림이 아니었으면 너는 지금쯤 곤죽이 되었을 테니까."

"아. 도망치시겠다고? 그래, 그럼. 그러든지."

백천의 비아냥거림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곽환소는 아예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이가 부러져라 갈아붙이며 으르렁거렸다.

"이 거지발싸개 같은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성난 멧돼지처럼 포효하는 그를 보며, 윤종과 조걸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숙도 이제 사람 긁는 데는 경지에 오르셨네.'

'보고 배운 놈이 그놈인데 말해 뭐 합니까.'

툭툭 던지는 말로 곽환소의 이성을 반쯤 으깨 버리는 백천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감탄했다.

'그래, 화산의 대제자쯤 되면 입으로도 지지 않아야지.'

반면 입으로 지고 있는 곽환소는 화가 머리꼭지까지 치밀다 못해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화산파.

과거 구파일방이었던 문파. 이제는 몰락하여 해남에 그 자리를 빼앗기고 몰락하는 문파다.

그런데 그깟 놈들이 감히 해남을 도발하고 있지 않은가?

분을 참지 못하는 그에게 사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으셔야 합니다. 사형. 어차피 저놈들은 망신만 당하고 돌아갈 겁니다. 굳이 우리가 손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소림에서 화산의 제자들을 두들겨 팼다는 말이 나오면 장문인께서 진노하시지 않겠습니까?"

"으으음."

사제의 말에, 씩씩 거친 숨을 내뱉던 곽환소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열이 치미는 건 사실이지만, 여기서 사고를 쳐서는 안 된다. 그 정도 생각은 있었다.

"후. 좋다. 이번에는 그냥 가도록 하지. 다만 너희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누구라도 이번 대회에서 우리를 만나게 된다면 뼈 하나 부러질 각오는 해야 할 테니까. 비무장에서는 이곳에서 맛보지 못한 해남의 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엄중한 경고와 함께 백천을 한번 노려보고 멋지게 몸을 돌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누가 보내 준대?"

"……응?"

그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저 뒤쪽에서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놈이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그러더니 삐딱하게 선 채 심드렁한 말투로 말했다.

"요즘 애들은 왜 이리 강단이 없지?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일단 시비 붙었으면 마지막 놈 하나만 서 있을 때까지 가는 거지. 어디 주둥이로만 나불대며 살살 긁다 내빼려고? 해남에선 너희를 그렇게 가르치디?"

"허?"

곽환소가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삼대제자 같은데?'

감히 이런 상황에 삼대제자가 나선다고?

"넌 뭐 하는 놈이냐?"

"알 것 없어, 새끼야."

생각지도 못한 폭언에 곽환소가 눈을 부릅떴다.

그 반응을 보며 피식 웃은 청명은 검을 풀어 바닥에 던졌다.

"뭐? 소림이라 칼질을 못 해? 그럼 주먹질하면 되지. 나와. 그 못난 턱주가리 아예 반대쪽으로 예쁘게 돌려 줄 테니까."

"이……."

"아, 벌써 겁먹어서 속곳까지 벗어 놓고 도망갔나? 왜 이렇게 소식이 없어?"

곽환소의 볼이 파들파들 떨렸다.

"사, 사형."

"그만!"

이성을 잃은 그의 눈은 이제 반쯤 돌아 버린 것 같았다.

"여기가 소림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모욕을 받고도 그냥 물러선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 생각하겠느냐?"

그의 말에 곽환소의 사제들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구경꾼들이 모여들고 있다. 조금 난감하지만, 이제 물러서기에는 늦었다. 저들 앞에서 해남이 화산을 피해 달아나는 것 같은 모양새는 보일 수 없다.

"오냐! 주먹질이라 이거지?"

곽환소가 눈을 부라렸다.

"검으로는 못 이겨도 맨손이면 해볼 만하다 생각한 모양인데. 화산 따위는 무슨 짓을 해도 우릴 이기지 못한다는 걸 알려 주마. 너희가 왜 구파일방에서 쫓겨났는지 똑똑히 알고 돌아가라."

해남파의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끌러 바닥에 꽂았다.

그 모습을 본 조걸이 고개를 획 돌려 윤종을 바라본다.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윤종이 씨익 웃더니 검을 끌러 바닥에 꽂았다.

"저 아가리부터 뭉개 놓고 생각해야지. 화산이 어떻고, 구파가 어째? 저 새끼는 내가 맡는다."

"……."

이미 눈이 돌아 버린 윤종을 보며 조걸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여긴 이제 글렀어.'

더는 이성적인 사람이 없다.

그럼 별수 있나.

조걸도 이 흐름에 몸을 던질 수밖에.

검을 모두 끄른 해남과 화산의 제자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청명이 목을 두어 번 좌우로 꺾는다.

"사고 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 그런데!"

청명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화산을 욕한 새끼들을 패는 건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 짐승 새끼가 아니면 먹여 주고 키워 준 문파가 욕을 먹는데 참을 순 없는 법이지!"

정말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선동이었다. 화산의 제자들의 눈에 광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묻어 버려!"

"오오오오! 대가리를 깨자!"

청명파……. 아니,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고함을 내지르며 해남파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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