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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63화 (263/1,567)

263화. 아니, 근데 저 새끼들이? (3)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은데?"

"나는 이제 멀미가 나려고 한다."

화산의 제자들이 질린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게, 걸으면 걸을수록 주변의 사람이 더 늘어나는 느낌이다.

"촌에서 온 티 좀 그만 내고 입 좀 다물어라!"

백천의 말에 백자 배들이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촌에서 온 건 맞잖습니까. 화음이면 촌이죠. 뭐."

"화음 정도면 나름 도시라고 할 수 있지."

"낙양 보니 전혀 아니던데?"

"……낙양이랑 비교하면 안 되지."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라고 사제들의 반응을 아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신기하긴 하겠지.'

백자 배든 청자 배든 대부분은 아주 어릴 적부터 화산에 입문하여 평생을 산만 보고 살던 이들이다. 사람들이 이리 몰린 모습을 볼 일이 있었겠는가?

"소림이라고 해서 고아한 절간을 생각했는데. 이건 뭐……."

백상의 말에 조걸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입니다. 향화객이 내는 향화금만으로도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문파를 자처할 수 있는 곳인데 어찌 한적하겠습니까."

"으음."

"유명한 문파는 가만히 있어도 돈이 벌립니다. 문파들이 자신들의 강함을 증명하려 드는 이유가 꼭 무학에만 있지는 않다는 뜻이지요."

"그렇지."

앞쪽에서 조걸의 말을 듣고 있던 현종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다.

화산만 하더라도 종화지회에서 승리한 이후부터는 금전적인 어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던가.

화산이 그럴진대 소림은 오죽하겠는가?

'그러니 이만한 대회를 열 수 있겠지.'

금첩이니 은첩이니 하며 참가할 수 있는 이들의 수를 제한한 것은 사실이지만, 천하에 명문이라 불리는 이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못해도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오는 이들의 수는 일천을 우습게 넘어갈 것이다.

향화객이나 구경 오는 이들이야 숙식을 알아서 해결한다고 해도 이곳에 초청받아 오는 이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화산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을 소림은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것이다.

"새삼 이 대회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겠다. 이거 하나를 보기 위해 이토록 많은 이들이 숭산에 오르는 것만 보아도."

"백 년 내에 이런 일이 없었잖습니까."

"그렇다 해도 오늘은 비무가 열리는 날도 아닌데."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이렇게 먼저 온다는 건, 미리 올라 좋은 자리를 보아 두겠다는 뜻이겠죠."

"으음, 과연."

아니나 다를까.

산을 오르는 그들을 본 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지? 초청을 받았으면 나름 유명한 문파일 텐데."

"글쎄……. 매화를 상징으로 쓰는 문파가 있었나?"

"매화? 옳다. 화산이로구나!"

"화산?"

"거 있잖은가. 예전에 잘나갔던."

백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예전에 잘나가?'

지금도 잘나갑니다, 이 양반들아!

생각 같아서는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구경꾼들과 드잡이질을 하여 좋을 게 없다.

그리고 다행히 듣기 좋은 소리도 조금씩 들려왔다.

"요즘 기세가 좋다고 하던데? 무당과 붙어서 이겼다는 말도 있고."

"에이, 설마."

"소문이지, 소문. 하지만 강호의 소문은 괜히 나도는 게 없기 마련일세."

"강호의 소문만큼 믿을 게 없는 것도 사실 아닌가."

"그도 그렇지."

백천이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지만 그래 봤자지. 어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상대가 되겠는가? 이번에는 참가에 의의를 두는 수준이겠지."

저들은 나름 몰래몰래 작게 말하고 있지만, 수련을 빙자한 청명의 패악질과 갈굼으로 무위가 드높아진 화산의 제자들에게는 너무도 똑똑히 들렸다.

발끈한 백자 배들이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나, 그 순간.

"뭐 해? 안 올라가고?"

뒤쪽에서 뒷짐을 지고 있던 청명이 심드렁하게 잘랐다.

그리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백자 배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 양반들이랑 싸워서 증명하게?"

그 말이면 충분했다.

어차피 평가란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

화산이 예전과 다르단 것은 비무 대회를 통해 증명하면 된다.

"조금 서두르자꾸나."

"예, 장문인."

현종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이 촉박한 것은 아니었다. 도착해야 할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제자들이 자꾸 주변에 눈을 뺏기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일단 여기서 괜히 그들을 단속하기보다는, 얼른 소림에 도착하여 짐을 푸는 쪽이 나아 보였다.

하지만 이 현종의 선택은 딱히 달갑지 않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빠른 걸음으로 인파를 헤치고 산을 오르던 그는 위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장문인."

"으음."

현상도 앞쪽의 인파를 보았는지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가장 만나기 껄끄러운 이들이 산을 오르고 있는 게 보인 탓이었다.

"……종남이구나."

"예."

현종은 슬며시 걸음을 늦추었다.

종남 역시 이번 대회에 참가했고, 피할 수 없는 상대가 될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회 전에 만나는 것은 역시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언제나 그렇듯, 상황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일행의 후미에 있던 종남의 제자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가 화산 일행을 발견한 것이다. 움찔한 그는 재빨리 앞쪽으로 말을 전했다.

"아무래도 알아본 모양입니다."

"크흐음."

현종이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종남의 제자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곤란하군.'

하필이면 소림으로 와 처음 마주한 문파가 '그' 종남이라 게 어이없고 우습다.

물론 저들 역시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상황이 이리된 이상 인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저쪽에서도 그리 생각한 모양이었다. 제자들을 헤치며 한 사람이 뒤쪽으로 걸어 나왔다.

"먼 땅에서 이리 마주하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장문인."

건장한 풍채와 새하얀 백발이 인상적인 노인이 먼저 포권을 해 왔다.

현종은 표정을 애써 갈무리했다.

그는 눈앞의 이자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현종과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온 자. 내내 화산에 눌려 구파의 말석에 불과했던 종남을 당당한 구대문파의 중진으로 키워 낸 자.

바로 종남의 당대 장문인인, 천하검(天下劍) 종리곡(鍾離穀)이었다.

"장문인."

현영이 옆구리를 살짝 찌르자 움찔한 현종이 자신의 실책을 알아채고는 재빨리 맞포권을 했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장문인."

그리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속이야 어떻든 만나면 웃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 아니던가?

"가히 십 년 만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워낙 서로 바쁘다 보니 왕래할 시간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종리곡이 빙그레 웃었다.

"지척에 서로를 두고도 가까이 하지를 못하니, 화산과 종남의 관계가 예전만 못한 것 같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서라도 조금 더 친교를 나눌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현종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종리곡을 바라본다.

'이상하구나.'

같은 장문인이라고는 하나 워낙 처한 위치가 다르다 보니 자주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쨌든 둘 다 섬서에 위치한 문파를 대표하다 보니 아주 가끔씩은 볼 일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현종은 늘 속이 들끓는 느낌을 받곤 했었다.

옛 영광을 잃어 가는 화산의 장문인인 그의 처지가, 하루하루 발전해 가는 종남의 장문인인 종리곡의 처지와 너무도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만나고 돌아올 때면, 현종은 남몰래 술잔을 기울이며 쓰린 속을 달래고는 했다.

하나 지금은 이상하게도 속이 아주 편안하기만 하다.

되레 언제나 여유로웠던 저 종리곡이 여유를 잃은 듯한 얼굴을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모습이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마음이 편해지니 좋은 일이 있더군요. 허허."

종리곡이 가만히 현종을 보다가 눈꼬리를 굽힌다.

"하하. 좋은 일이라. 좋은 일. 그렇지요. 이전 종화지회에서는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화산이 그토록 발전했을 줄이야…….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장문인."

현종이 미소를 짓는다.

발전을 축하한다는 것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나 하는 말이다. 저 말에는 뼈아픈 패배를 겪었음에도 종남은 여전히 화산을 위로 보지 않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운이 좋았을 따름입니다."

"운……. 운이라."

종리곡이 미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운이 반복된다면 그 운 역시 실력이라 할 수 있겠지요. 어떻습니까? 이번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겠습니까?"

현종이 그런 그를 가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리고 슬쩍 뒤에 선 제자들을 바라본다.

종남.

화산의 제자들에게는 뱃속에 들어앉은 돌덩이 같은 이름이다. 과거 화산의 제자들은 종남의 제자들을 볼 때마다 기가 죽거나 화를 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그들은 이제 딱히 감정이 실리지 않은, 담담한 눈으로 종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더는 상대하지 못할 이들이 아니라는 거겠지.'

제자들이 그리 생각하는데 장문인인 그가 기가 죽을 수는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담담히 대답하는 현종을 보며 종리곡의 입가가 살짝 씰룩인다.

"하하. 과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더니, 장문인께서도 많이 달라지셨군요. 과거와는 비할 수 없는 당당함이 참 보기 좋습니다."

두 장문인의 대화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듣고 있던 윤종이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청명아."

"응?"

"해석해라."

"예전에는 내 앞에서 고개도 못 들던 놈이 많이 컸다."

"……야, 장문인한테."

"해석하라며."

"끄응."

청명의 해석에, 제자들이 일제히 종리곡을 노려본다. 하지만 그 모욕을 눈앞에서 받은 현종은 여전히 담담할 뿐이었다.

"허허. 제가 당당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화산의 선조들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를 뿐이지요."

"해석."

"역사로 따지면 대대로 화산 마당이나 쓸던 새끼가 아가리는 잘 터는구나."

"……장문인도 입심이 보통이 아니시네."

제자들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현종을 바라본다.

세상에, 우리 장문인께서 저리 고급진 엿을 먹일 수 있는 분이셨다니.

종리곡 역시 현종의 속뜻을 알아들었는지 살짝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화산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충분합니다. 종화지회의 패배는 우리아이들에게도 뼈아픈 일이었지요. 하지만 덕분에 오만했던 우리 아이들이 뼈를 깎는 수련으로 새로이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하하. 이번에는 화산도 쉽지 않을 겁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종리곡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화산도 한 번쯤 같은 경험을 해 보는 게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좋은 일을 저희가 차지해서야 되겠습니까? 종남에 양보하겠습니다."

종리곡은 입에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로 생각했다.

'이놈이.'

아주 한 마디를 지지 않는다.

과거였다면 상상할 수도 없을 일이다.

더 이상 불쾌함을 감추기 어려워진 그는 서둘러 대화를 정리했다.

"과연, 과연. 장문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어차피 강호란 결과로 보여 주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이번 비무 대회, 화산의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종남 역시 좋은 결과를 얻으시길 기원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맞포권을 했다.

윤종이 다시 묻는다.

"누가 이긴 거야?"

"우리 장문인이 저쪽을 패 죽인 급이지."

"역시나?"

윤종의 입가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는 종리곡이 휘적휘적 제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똑똑히 눈에 새겨 두었다.

"가자!"

"예!"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이쪽을 노려보던 종남의 제자들이 모두 몸을 돌렸다.

하지만 단 세 사람만은 여전히 이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하나는 진금룡.

진금룡의 시선은 처음부터 청명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적의와 열기가 뒤섞인 시선을 받으며 청명이 피식 웃는다.

'아서라. 그러다 맞아 죽는다.'

사람이 주제를 알아야지! 주제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송백이었다.

이송백 역시 청명에게 시선을 주고 있지만, 그 의미가 확연히 달라 보였다.

진금룡이 청명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보고 있다면, 이송백은 뭔가 경외 어린 시선을 보내는 중이었다.

흠모가 가득 담긴 그 눈빛을 보니…….

'아, 간지러워.'

차라리 진금룡의 시선이 낫다고 생각하는 청명이었다.

어쨌든, 이 둘이야 익숙한 얼굴이고.

문제는 세 번째 시선이었다.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다만 그 시선이 닿은 곳은 청명이 아니라 바로 청명의 앞쪽에 있는 백천이었다.

슬쩍 백천의 곁으로 간 청명이 중년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아버지야?"

"……그래."

"반갑겠네, 동룡이."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낄낄."

청명이 백천의 어깨를 툭 쳤다.

"말이나 입장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 보여 줄 건 검뿐이야. 그렇지 않아?"

"물론이지."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청명은 슬쩍 백천을 돌아보았다.

표정에서 조금의 동요도 엿보이지 않는다.

'많이 컸네.'

예전에 진금룡 앞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던 백천이 아니다. 검이 성장한 만큼 사람도 성장했다.

새삼 뿌듯함을 느낀 청명이 고개를 끄덕인다.

종남이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자 백천이 화산의 제자들을 돌아보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잘 봤지."

"예, 사형."

"저놈들은 아직 우리가 만만한 모양이다. 얻어맞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놈들은 어찌 해 주어야 하겠느냐?"

"정신을 차릴 때까지 패 줘야지요."

"그래, 그거다."

백천이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너희는 더 이상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그 상대가 형인 진금룡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가자."

"예."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한 화산의 제자들은 오래지 않아 소림의 산문에 도달했다.

대소림사(大小林寺)라 적힌 거대한 편액 앞에서, 그들은 결연한 얼굴로 소림의 산문에 발을 들였다.

이제 그들을 증명할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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