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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62화 (262/1,567)

262화. 아니, 근데 저 새끼들이? (2)

"끄으응."

현종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꾹 눌렀다.

그리고 도끼눈을 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팔 똑바로 들지 못하겠느냐?"

청명이 슬그머니 내렸던 팔을 다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는 가엽게도 객잔의 한쪽 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팔을 들어 올리는 벌을 받는 중이었다.

"야, 이놈아! 그 잠깐을 못 버티고 사고를 치느냐!"

"아니…… 저 새끼들이 먼저 화산을 욕했다니까요!"

"그래도 이 녀석이!"

"쳇!"

"끄으으으으응!"

현종이 뒷목을 잡고 넘어가려 하자 현상이 재빨리 곁에서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장문인."

"끄윽…….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다."

현상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현종을 바라보았지만,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현영은 심드렁하기 짝이 없었다.

"회춘하면서 많이 늘었을 테니 좀 줄어도 됩니다. 그보다 왜 애 밥을 굶기고 그럽니까! 벌을 주더라도 밥은 먹여야지. 청명아, 어서 일어나거라. 밥 먹어야지!"

그러자 또다시 현종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내가 지금 벌을 주고 있잖……!"

하지만 현종은 움찔하며 말을 멈췄다.

현영이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바라본 탓이었다.

저건…… 사람이라도 잡아먹을 기세가 아닌가?

"장문인."

"……으응?"

음산하기 짝이 없는 그 목소리에 현종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잊으셨습니까? 문파에 곡식이 떨어져 애들이랑 같이 산짐승을 사냥하고 나무뿌리 캐 오던 기억을?"

"……아니. 안 잊었지."

"명문이라 자부하던 화산이 먹을 게 없어서 풀뿌리나 캐 올 때, 제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 아십니까?"

"그, 글쎄?"

현영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중에 돈을 벌어 먹고살 만해지면, 내가 뒈지는 한이 있어도 애들 밥은 안 굶길 거라고 다짐했습니다. 벌주는 것도 좋지만 밥때는 안 넘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말 이해하십니까?"

"……응."

그제야 낯빛을 푼 현영이 빙그레 웃으며 청명을 돌아보았다.

"청명아. 가서 밥 먹어라. 어서."

"넵!"

청명이 벌떡 일어나서 고기가 가득한 식탁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현종은 통증이 밀려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게 사제고, 저런 게 문도란 말인가.

한숨을 푹푹 내쉰 그는 고개를 슬쩍 돌려 현영과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래……. 하긴, 어려운 시절을 잘……."

그때였다.

"장로님! 술 시켜 먹어도 돼요?"

"그래, 그래! 마음대로 먹어라! 이왕 먹을 거면 최고 좋은 걸로 먹어야지!"

"꺄르륵! 꺄륵!"

"옳지! 옳지! 내 새끼."

현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귀를 막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게 현종의 서글픔이었다.

'신경을 끊자.'

저런 걸 보고 있어 봐야 기껏 늘려 놓은 수명이 줄어드는 결과밖에 남지 않는다.

현종은 굳은 얼굴로 앞에 앉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현종의 눈이 그중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입술이 터져 있는 이를 보니 면목이 없다 못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청명에게 신나게 얻어맞은 조말생이 겸연쩍은 얼굴로 손사레를 쳤다.

그 옆에 앉아 있던 말상의 사내, 문평(門平)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괘념치 마십시오, 장문인. 타문파의 흉을 보다가 들키는 날에는 목이 달아나도 할 말 없는 곳이 강호 아닙니까? 그나마 이정도로 끝내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끄응……. 그래도……."

"이 친구도 이번 일로 배우는 것이 있을 겁니다. 평소 말을 너무 함부로 해서 언젠가는 호되게 경을 치는 날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문평이 슬쩍 조말생을 돌아보았다.

그도 이에 대해선 할 말이 없는지 입만 삐죽거릴 뿐이었다.

"쯧쯧."

문평이 혀를 찼다.

'그래, 내 언제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지.'

강호에서는 무엇보다 입을 조심해야 한다. 말을 함부로 하는 이는 반드시 화를 입기 마련이다.

화산이 나름 도가이고 정파를 자처하는 곳이라 이정도로 끝난 것이지. 손속이 잔인한 자를 만났다면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려 변명조차 못했을 것이다.

다만, 놀라운 것은…….

문평의 시선이 슬쩍 돌아갔다. 저쪽 탁자에 앉아서 호쾌하게 술을 들이켜는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화산신룡이라.'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실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조말생도 가벼운 입과는 달리 나름 힘깨나 있는 사람인데, 반항도 해 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터졌다.

기습?

'설마.'

무인이 기습 운운하는 것보다 추한 것이 없다. 강호를 살아가는 이라면 언제나 기습과 암수에 대비하는 것이 기본이니까.

조말생이 그걸 모를 사람도 아니니, 정말 실력으로 패했다는 뜻이다.

'화산의 실력이 듣던 것 이상이구나.'

어쩌면 이번 비무대회에서 화산이 폭풍을 불러올지도 모르겠다.

'화산신룡뿐만이 아니다.'

그의 시선이 청명의 옆에서 고기를 뜯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점소이! 여기 고기 추가!"

"만두도!"

"술! 수울……."

백천이 눈을 부라리자 술을 외치던 백자 배가 찔끔하여 고개를 푹 수그렸다.

"꼭 한 발 더 나가는 놈이 있지."

"……죄송합니다."

"확 마."

"……."

말 그대로, 게걸스럽게 음식을 퍼먹는 화산의 제자들.

문평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생각하던 화산과는 조금 다르긴 하네…….'

화산이라 하면, 뭐랄까…….

무당에 비해 도가적인 성향이 조금 약한 대신에 검에 대한 자존심이 높은 검수들의 집단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화산은 그야말로…….

"산적 같은 놈들."

"그래, 산저……. 너는 입을 좀 다물어라!"

"……."

입을 삐죽이며 한마디 했던 조말생이 문평의 호통에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진짜로 산적 같긴 하지.'

동물 가죽이 아닌 질 좋아 보이는 무복 차림이고, 몸가짐이 산적보다 정갈해 보이니 망정이지.

옷만 벗겨 놓으면 딱 마을 털러 내려온 산적들이다.

허리춤에 달랑달랑 매달린, 매화가 새겨진 검만 아니었다면 문평도 이들이 정말 화산인지 의심했을 것이다.

"크흠."

헛기침을 한 문평이 현종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럼 지금 천하비무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가시는 중입니까?"

"그렇소이다. 식사도 미리 주문할 겸 아이를 먼저 보냈는데, 설마 그사이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제가 면목이 없습니다."

현종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문평이 고소를 머금었다.

'이분은 지위에 맞지 않게 순박하시구나.'

타 문파의 장문인이었다면 사정을 듣는 즉시 감히 자신의 문파를 무시한 조말생의 죄를 물으려 들었을 것이다.

그를 단죄한 화산신룡은 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상을 받았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이토록 미안한 표정이라니.

'더없이 도인 같은 장문인과…….'

슬쩍 화산의 제자들을 다시 본 문평이 헛웃음을 짓는다.

'전혀 다른 제자들의 조합이라. 대체 이 문파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하구나.'

그리고 자세를 조금 더 낮추었다.

"장문인. 저희가 죄를 지었건만 이리 곤란해하시면 저희가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제가 이 사람을 대신해 사과를 드릴 터이니, 부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없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한다는데, 그게 어찌 죄가 되겠습니까?"

"없는 곳에서는 욕하지만, 있는 곳에서 욕을 하다가는 목이 달아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문평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강호에 말 많은 친구들은 저희를 마서이객(馬鼠二客)이라 부르곤 합니다. 저희가 강호의 소식에는 나름 빠른 편이니, 죄도 갚을 겸 천하비무대회에 관한 은밀한 이야기가 들려오면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 더없이 감사한 일이지요."

문평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포권을 했다.

"허락해 주신다면 저희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묵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닙니다. 잠시 들른 것뿐입니다."

사실은 오늘 이곳에서 묵을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이리되고도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낯짝은 없었다.

문평이 불만 어린 얼굴로 슬쩍 눈치를 주자 조말생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거듭 죄송합니다, 장문인. 제가 방정맞게……."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깊게 읍을 한 조말생이 어색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문평도 읍을 하고는 그를 따라 나섰다.

"끄으응……."

상황이 마침내 정리되자, 현종은 한숨을 내쉬며 장로들을 돌아보았다.

"걱정이구나."

"뭐가 말입니까?"

"벌써부터 저리 사고를 쳐 대는데…… 숭산에서는 과연 조용할지."

그 말을 들은 현영이 피식 웃었다.

"사고 좀 치면 어떻습니까?"

"으응?"

현영의 얼굴이 살짝 싸늘해졌다.

"힘없는 놈이 사고를 치면 사고라 하지만, 힘 있는 놈이 사고를 치면 기개가 되는 법이지요. 막말로 지금까지 소림이나 무당 놈들이 남 일에 끼어들어 개판 낸 적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그때마다 강호인들이 뭐라 했습니까? 그게 기개고 협의다 하지 않았습니까?"

"으음."

"내버려 두십시오. 어차피 저희가 죽고 나면 저놈들이 이끌어야 할 화산입니다. 무작정 저희가 아는 틀에 맞추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저 청명이를 내버려 두라고?"

현종의 말에 현영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악!"

청명은 자신의 고기를 노리는 조걸을 젓가락으로 무자비하게 찔러 대고 있었다.

"……쟤는 좀 자제시키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끄응."

걱정이다. 걱정이야.

그런 현종의 걱정과는 달리, 화산의 여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물론 중간 중간 청명이 엉뚱한 짓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이제는 만성이 되어 버린 백천의 뒤치다꺼리와 현영의 중재 덕분에 다행히 큰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기를 며칠.

화산의 제자들이 마침내 숭산의 아래에 도착했다.

"오!"

"숭산!"

숭산을 바라보는 화산의 제자들이 저마다 감탄을 내뱉는다.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산은 아닐지언정, 강호에서는 가장 유명한 산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바로 숭산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이 숭산에 소림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천년소림(千年小林).

숭산의 소실봉(少室峰)에 자리하고 있다 하여 소림으로 이름 붙은 이 불가 문파는 오랜 세월 동안 굳건히 강호를 이끌어 왔다.

언제나 말로만 듣던 소림을 방문하게 되었으니, 모두의 마음이 설렘으로 가득 찬 것도 당연했다.

"산이 뭔가 있어 보이지 않냐?"

"산이 다 똑같은 산이지. 있어 보이기는 무어가."

"아니. 그래도 화산이랑은 느낌이 많이 다르잖아."

화산이 고고하고 드높다면, 숭산은 부드럽고 완만하다. 모든 것을 포용할 듯한 따뜻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그것만 해도 화산의 제자들에게는 색다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사람이 뭐 이렇게 많아?"

"무인이 아닌 것 같은데?"

소실봉으로 향하는 길은 향화객과 난전을 연 장사치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언제나 한적하고 고즈넉한 화산에 익숙해져 있던 제자들에게는 이것만으로도 별세계나 다름없었다.

그때 윤종이 의아한 듯 물었다.

"장로님. 숭산은 원래 이리 방문자가 많습니까?"

"으음, 글쎄다. 나도 숭산에 이리 직접 와 본 건 처음이라."

장로들이라고 별다를 게 있을 리 없었다. 평생 화산에만 매여 살았던 건 제자들이나 장로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새삼 소림의 위상을 실감하니 벌써 살짝 기에 눌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평소엔 이 정도까진 아니야. 아마 대회를 보러 온 사람들이 몰려서 그럴 거야."

"그래?"

윤종이 답을 해 준 청명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너는 그런 걸 어떻게 아냐?"

"……어. 예전에 거지 생활 할 때 한 번 와 봤어."

"산에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절밥 먹으러 왔다."

"……."

청명은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을 바라보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예전에는 화산이 이랬겠지."

"으음."

별것 아닌 듯 나직한 그 목소리가 화산의 문도들의 마음을 깊숙하게 찌르고 들었다.

백천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문인."

"음?"

"이번 무림대회가 끝나면 화산도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겠죠?"

현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그리되어야겠지."

"네. 그럼……."

청명이 쫙 기지개를 폈다.

"어디 명문 정파라는 분들이 얼마나 대단하신지 한번 구경 가 보죠."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명문 정파를 제대로 경험하는 건 그들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다.

다만.

'저들에게도 처음이겠지.'

청명 같은 놈을 겪는 건 말이다.

그리 생각하니 되레 저들이 불쌍해지는 장로들이었다.

"가자꾸나!"

"예!"

화산의 제자들이 눈에 결연한 의지를 품고는 숭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소림이라.'

가장 뒤에서 따라가던 청명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너희가 생각하는 무림대회는 이미 끝났어.'

이 무림대회는 오로지 화산을 위한 대회가 될 것이다.

바로 이 청명이가 그리 만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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