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뭐가 열린다고? (5)
짹짹짹.
창으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
그리고 기분 좋게 울려 퍼지는 새소리.
천천히 눈을 뜬 현종은 빛을 잔뜩 쏟아내는 창을 응시했다.
그러다 이윽고 새하얀 이불을 걷어 내고 자리에 앉아 조금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이로군.'
마침내 숭산으로 떠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가볍게 세안을 마친 현종이 자신의 앞에 놓인 의복을 바라본다.
화려한 매화 문양이 새겨진 검은 무복. 빛을 받아 반사되는 옷의 빛깔이 한눈에 보아도 고급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해도 부득불 새 옷을 지어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현영의 작품이었다.
현종이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만큼이나 이번 행사가 중요하다는 뜻이겠지.'
몇십 년 만에 화산이 강호의 동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다. 쉬이 얕보이지 않고 싶은 마음을 그라고 왜 모르겠는가?
사라락.
평소보다 몇 배는 경건한 자세로 의복을 차려입은 그는 요대를 질끈 동여매었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더 해야 할 준비는?'
없다.
이미 모든 준비는 완벽하게 마쳤다.
"음."
그는 작은 침음성을 흘렸다.
지난 반년간 현종과 장로들은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하무림대회에 참가할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한데 왜…….
"으으음."
현종은 그리 밝지 못한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낮게 한숨을 내쉬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끼이이익.
느릿한 손길에 문이 열리고, 그는 맑디맑은 하늘을 응시하다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장문인, 나오셨습니까?"
"음, 그래."
문 앞에 시립하고 있던 운암이 그를 마중했다.
"제자들은 준비를 마치고 장문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벌써?"
"날이 날이니만큼 잠이 잘 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허허. 먼 길을 가야 할 터인데."
푹 쉬고 출발하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지만, 굳이 제자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설레고 떨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은 현종도 마찬가지니까.
이제는 감정이 웬만큼 닳아 버린 현종도 이러한데, 어린 제자들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가자꾸나."
"예, 장문인."
운암이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가만히 따르며 현종이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도 더없이 좋고.'
청명한……. 아니, 이 표현은 좀 피하고 싶으니까……. 아주 맑은 하늘이 그들의 길을 축복해 주는 것 같다.
그러니 원래라면 발걸음이 아주 가벼워야 하는데…….
"끄응."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어 버린 현종이 손사래를 쳤다.
'선인들이시여.'
마침내 대연무장에 도착한 그는 깊게 심호흡하고 단상 위로 올랐다.
이미 장로들이 그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까진 좋다.
여기까지는 참 좋은데…….
이 단상 앞에 그동안 노력해 준 백자 배와 청자 배들이 있다.
그 힘들었던 수련을 불평 한마디 없이……. 아니, 불평은 더럽게 많았지만, 어쨌든 포기하지 않고 따라와 준 제자들을 보면 뿌듯한 마음이 절로 생겨나야 하는데…….
힘없이 단상 가장 앞으로 걸어가 도열해 있는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저게 어딜 봐서 도가의 제자들의 몰골이란 말이더냐?'
슬그머니 실눈을 뜨니 우락부락한 화산의 제자들이 보인다.
딱 벌어진 어깨.
옷 위로도 보일 만큼 탄탄한 팔뚝.
거기까진 좋다 이거다.
저 터질 듯한 가슴 근육과 구릿빛 피부, 그리고 한눈에 봐도 험상궂기 짝이 없는 얼굴까지…….
게다가 왜 도가의 제자들 눈에서 저리 살기가 번들거리는가?
'누가 이놈들을 도가의 제자라고 생각하겠는가?'
뭣 모르는 이가 지금 화산에 들어서면 일단 가진 전낭과 패물들을 모조리 바닥에 내던지고 살려 달라 싹싹 빌 판이다.
그게 아니면 언제 화산이 화산채로 바뀌었느냐는 소리가 나오겠지. 빌어먹……. 아니 무량수불!
현종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된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열해 있는 이들 뒤쪽에, 넉살도 좋게 의자까지 가져다가 떡하니 앉아 있는 청명을 보고 있자니 수십 년간 쌓아 온 수양이 일거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끄으으응."
"장문인 얼굴 펴십시오, 얼굴. 이 좋은 날에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
네가 더 문제야, 이놈아!
실실 웃고 있는 현영을 보고 있으니 속이 터지다 못해 복장이 뒤집힌다.
"끄응. 준비는 다 끝났느냐?"
"예, 장문인. 한마디 하시지요."
한마디?
무슨 한마디?
반드시 작업에 성공해서 오늘 밤에는 술과 고기를 먹자? 지나가는 놈들은 모조리 잡아들여라?
끄으으응.
도무지 도가 사람의 몰골이 아닌, 화산의 자랑스러운 동량들을 보던 현종은 눈물을 머금고 말았다. 하늘이 부옇다.
괜찮을까?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
'선조이시여.'
아아. 나의 화산이…….
"장문인."
"크흠, 그래."
현종이 크게 헛기침을 하고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오늘은 숭산으로 출발하는 뜻깊은 날이다. 그간 노력한 아이들을 봐서라도 사기를 북돋워 주어야겠지.
"다들 고생이 많았다."
많았겠지.
고생이 많았으니 그 생기발랄하던 놈들이 전쟁터에서 십 년은 구르다 온 백전노장 같은 얼굴로 서 있는 있겠지.
"아닙니다. 장문인!"
"고생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다른 구파 놈들의 대가리를 깨 버리겠습니다!"
서글픈 건 저 마지막 말을 한 놈이 청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화산채도 아니구나.'
이건 숫제 청명파가 아닌가?
대충 낙양이든 어디든 내려 보내서 자리만 잡게 해주면 한 달도 걸리지 않아서 뒷골목을 모조리 접수할 기세다.
"……이번 천하무림대회는 친선을 다지는 자리다. 우선은 회합을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러자 현영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끊었다.
"장문인."
"으응?"
"씨도 안 먹힐 소리 하지 마십시오. 애들이 웃습니다."
"……."
야, 인마!
너는 도사라는 놈이 그게 어? 말이 어?
"얼른 끝내십시다. 누가 보면 장문인은 안 가시는 줄 알겠습니다. 같이 갈 건데 뭘 그리."
"……네가 마무리하거라."
"아, 그럴까요?"
현영이 빠르게 나서서 모두를 쭉 훑었다.
"오늘 우리는 숭산으로 간다. 다들 자신은 있겠지?"
"물론입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장로님!"
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챙길 물건 다 챙겼는지 확인 한 번씩 더 하고, 일대제자들과 각 항렬의 대제자들은 아이들 짐을 한 번씩 확인하거라."
"예!"
그 말과 동시에 한쪽에 서 있던 운자 배들이 바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흘끗 본 현영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뜨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각 문파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다. 너희들의 행동 하나하나, 몸가짐 하나하나가 모두 화산을 평가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러니 모두 몸가짐을……. 어딜 보냐, 너희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뒤로 돌아간다.
그 시선의 끝에 당연하게도 청명이 있었다.
"응? 나 왜?"
"……아니, 뭐 그냥."
"어쩐지 한번 봐야 할 것 같아서."
청명이 피식 웃는다.
"에이, 왜 이래. 나만큼 얌전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저 조동아리를 확!'
'진짜 묻어 버리고 싶다.'
육 개월 동안 청명에게 철저하게 시달린 탓인지 그를 노려보는 제자들의 눈에는 한층 더 짙은 독기가 어려 있었다.
심지어 화산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당소소조차 눈을 부라리며 청명을 흘기고 있었다.
제자들 사이에 살기가 오고 가는 그 참담한 광경을 현영은 더없이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준비 끝났으면 출발하자꾸나."
"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가장 앞에 서 있던 제자들이 앞으로 나서자 뒤에 선 제자들이 다들 큰 목소리로 그들을 응원했다.
"지면 돌아올 생각하지 마라."
"숭산에서부터 여기까지 기어서 와라. 알았어?"
"져 봐. 한번 져 봐. 모가지를 따서 매화나무에 걸어 버릴 테니까!"
따뜻하기 짝이 없는 응원에 대표로 나선 이들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뭐래. 약해 빠진 놈들이."
"마당이나 잘 쓸고 있어라."
그야말로 훈훈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현종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화산은 망했어.'
여긴 이제 글러 먹었다.
불과 육 개월 사이에 어쩌다 여기까지 와 버렸는가?
"내가 죽어서 선조들을 어찌 봬야 한단 말인가?"
"뭐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다들 칭찬하실 텐데."
"으응?"
"애들 보십쇼."
현종이 고개를 슬쩍 들어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명문의 제자다운 기세 아닙니까?"
"……."
현영아…….
네가 아는 명문이랑 내가 아는 명문이 조금 다른 것 같은데…….
현종이 한숨을 푹 내쉰다.
하지만 그나마 어깨를 펼 수 있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확실히 기세는 굉장하구나.'
쫙 편 어깨에서 대단한 자신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근거 없는 자신감만은 아니었다.
칼날 같은 기세.
어디에도 당당하게 '검수'라 말할 수 있는 기세다.
과거의 화산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
"이 아이들을 보면 구파일방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화산이 이제 더는 몰락해 가는 문파가 아님을 말입니다."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다들 나서거라."
그들이 소림으로부터 받은 것은 금첩.
금첩으로 동행할 수 있는 수는 마흔이다. 모두가 함께 갈 수는 없으니 그중에서 대표를 뽑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지만, 결국 현종이 선택한 것은 백자 배와 청자 배의 아이들을 하나라도 더 데려가는 것이었다.
화산에게 있어 이 무림대회는 단순히 과시를 위한 기회가 아니다.
화산의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해 줄 수 있는 기회다.
그렇기에 현종은 아이들을 관리하기 위한 최소의 인원을 제외하고, 남는 자리를 모조리 백자 배와 청자 배로 채워 넣었다..
"운암아."
"예."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장문인."
운암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숭산으로 가 화산의 이름을 떨치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나, 화산을 지키는 것 역시 그보다 못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제자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내 믿고 있으마."
마음이 놓인다는 듯 푸근하게 웃던 현종은 돌연 살짝 도끼눈을 뜨고 옆을 흘겼다.
"……거,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어디 저를 빼놓고 가시려고 하십니까!"
"끄응."
그러다 포기한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본래라면 장문인 대신 남아 화산을 돌봐야 할 현영이 부득부득 따라가겠다고 악을 쓴 덕에 운암이 남아 장문 대리를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림에 가는 어른은 현자 배 셋과 아이들을 관리할 운검까지 하여 총 넷이었다. 남은 이들은 모두 백자 배와 청자 배였다.
"관리할 인원이 너무 적은 건 아닐까?"
"관리한다고 그게 되겠습니까?"
"……그도 그렇다."
현종이 허탈하게 웃고는 봇짐을 진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가장 앞에 백천이 서 있다.
새로 만든 매화 무복을 입고, 머리에 영웅건까지 두른 백천을 보자 절로 마음이 훈훈해진다.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화산의 검수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 옆에 선 윤종과 조걸의 모습 역사 헌앙하기 그지없다.
'그래. 나쁘게만 볼 게 아니야.'
장문인이라면 제자들을 좋은 눈으로 봐 줘야지.
우선은 내가 저 아이들을 믿…….
"안 갑니까?"
……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새를 못 참고 뒤쪽에서 고개를 빼꼼 내미는 청명을 보니 뿌듯하게 차올랐던 자랑스러움이 화산 절벽 아래로 추락한다.
"……청명아."
"네?"
"옷은 왜 안 갈아입었느냐?"
"새 옷이잖아요."
"그게 왜?"
청명이 씨익 웃는다.
"가는 길에 흙먼지 묻을 텐데. 새 옷은 거기 가서 입어야죠."
"……."
똑똑하다.
우리 청명이 정말 똑똑하구나. 그래.
이왕 똑똑할 거, 단체 생활이라는 게 뭔지도 알면 좋을 텐데.
하지만 애초에 청명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게 헛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현종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크흠. 가자!"
"예!"
그는 몸을 돌려 화산의 산문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그 뒤를 현자 배와 운자 배가 따르고, 백천을 위시한 제자들도 따라나섰다.
저벅. 저벅.
단호한 걸음으로 나아가던 현종이 산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가만히 산문 너머를 바라본다.
현영과 현상이 입을 다물었다.
장문인이 왜 멈췄는지를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가 화산의 장문인이 된 지 벌써 수십 년.
하지만 그간 단 한 번도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행사를 치르기 위해 화산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이제껏 그가 화산을 나서는 건 돈을 꾸기 위해 애원할 때나, 빚쟁이들을 만나 사정하기 위해서가 전부였다.
그러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이 걸음은 현종이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처음 산문을 나서는 한 걸음이나 다름없다.
그걸 알기에 아무도 현종을 재촉하지 않았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한동안 산문 너머를 바라보던 현종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문인."
현종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일 보는 화산에 있어 역사적인 한 걸음이 되겠지요."
현종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저 망둥이 놈.
"가자꾸나."
그가 마침내 미련 없이 걸음을 내딛는다.
산문을 넘어 화산을 빠져나가는 제자들을 향해 환호성이 쏟아졌다.
"이기고 돌아와라!"
"장문인! 장로님! 몸 건강히 돌아오십시오!"
"화산의 이름을 만방에 떨치고 오셔야 합니다!"
"청명아! 올 때 당과!"
"방금 어느 새끼야?"
화산의 문도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화산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아주 작은 일.
하지만 강호에 있어선 커다란 변화의 시작점이 될 일.
그 발걸음이 향한 곳은 소림이 있는 숭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