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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59화 (259/1,567)

259화. 뭐가 열린다고? (4)

청자 배와 백자 배들이 암담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들은 청명을 충분할 정도로 겪어 보지 않았던가.

만약 다른 문파의 제자들에게 패하는 상황이 나올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충분히, 아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너무 상상이 잘돼서 문제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제자들이 한숨을 푹푹 내쉬자 청명이 혀를 찼다.

"자신이 없어?"

"아, 아니 자신이 없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아니지?"

백상의 얼굴이 살짝 질렸다.

'이놈 진짜 할 생각인가?'

그가 대체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였다.

"그런데 청명아."

"응?"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삼대제자 염진(廉晉)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의심하는 건 아닌데……."

"쫌생이처럼 왜 그래? 그냥 시원하게 말해 봐. 어디 내가 말꼬투리나 잡는 그런 사람이야?"

"어."

"……그래?"

그랬었나?

이상하네.

"……그럼 이번에는 꼬투리 안 잡을 테니까 그냥 이야기해 봐."

염진이 미묘한 표정으로 잠깐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우리가 구파의 제자들을 이길 수 있느냐?"

청명이 눈을 찌푸렸다.

"내가 없는 이야기하는 것 봤어?"

"어."

"……그래?"

거참 이상하다…….

그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진짜야. 이길 수 있다."

"흐음."

염진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뭘 그리 겁내. 이미 종남 놈들도 깨부숴 봤잖아."

"그렇긴 한데……."

염진이 확답을 듣고도 머뭇거리자 백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신 입을 열었다.

"이긴 건 삼대제자와 너지. 이대제자는 모두 졌다."

"여하튼 결과적으로 이겼으면 됐지, 뭐."

"그리 생각하면 속이 편하겠지만 내심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일 그때 그 삼대제자들이 이대제자의 배분이 되어 종남의 상승 무학을 제대로 익혀 냈다면 정말 이길 수 있었을까?"

청명의 뚱한 눈을 마주하며 백상이 말을 이었다.

"천하삼십육검의 맛도 제대로 보지 못한 이들을 이겼다 해서 종남을 꺾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소리다. 종남을 이긴 건 너지, 우리가 아니다."

"그러니까……."

백상의 말을 들은 청명이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제대로 된 무학을 익힌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제자들을 이길 자신이 없다?"

"말하자면 그렇지."

청명이 피식 웃었다.

"거 듣고 보니 좀 이상하네. 저기 저 허여멀건 양반이 그 검룡인가 뭔가를 꺾어서 이미 증명했잖아. 화산이 무당보다 세다는 걸."

"……사숙한테 손가락질하는 거 아니다."

그리고 허여멀겋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새끼야!

백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본 백상은 낮게 웃고는 말했다.

"백천 사형은 특별한 사람이지 않느냐."

"……."

청명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백천을 돌아본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백천의 볼이 살짝 떨렸다.

얼굴 펴라, 이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숙한테 그리 대놓고 썩은 얼굴 보이기 있냐?

"그리고 윤종과 조걸, 유 사매도 특별한 사람이지. 그들의 재능은 모두가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의 재능은 평범하기 그지없지."

"그래서 자신이 없다고?"

백상이 고개를 내저었다.

"청명아. 오해하지 마라. 네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패배가 일상이었던 사람들이다. 지는 게 두려워서 이러는 게 아니다. 그저 겁이 날 뿐이다."

"응?"

지는 건 두렵지 않은데 겁이 난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청명의 의문 어린 시선에 백상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화산은 더없이 빠르게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가고 있다. 나는 내가 그런 화산에 걸림돌이 될까 봐 겁이 난다. 화산은 너를 비롯한 다섯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나오게 될까 봐. 그래서 겁이 난다."

"흐으으음."

청명이 미간을 확 좁혔다.

잠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평소라면 뭐라도 말했을 청명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살짝 조급해진 백천이 입을 열었다.

"뭐가 그리 겁이 나더냐? 화산은 이제 과거의 무학도 되찾았고, 너희는 자소단도 복용하지 않았더냐? 남은 기간 동안 자소단의 기운을 흡수하고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익혀 낼 수 있다면 뭐가 두렵겠느냐?"

"사형. 상대는 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고르고 고른 후기지수들입니다. 자소단을 복용했다 하나, 그들의 내력은 그런 우리보다 높을 것입니다."

"그건……!"

"또한, 우리는 이제 막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익히는 것이지만, 저들은 어릴 때부터 각 문파의 상승무학을 익혀 왔을 겁니다."

백천이 잠깐 망설이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백상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아아, 됐어!"

그때, 청명이 백상의 말을 끊어 버렸다.

"우는소리 듣는 건 질색이야."

양손으로 귀를 막고 고개를 휘휘 내저은 청명은 어깨를 쭉 폈다.

"그러니까 결론만 놓고 말하면, 다른 문파의 정예들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다까지는 아니고, 그냥 걱정……."

"백천 사숙 같은 양반은 이길 수 있겠지만 사숙들은 아니다?"

"으음."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백상을 두고 청명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럼 결정 났네."

"……응?"

씨익 하고 웃은 청명이 백천을 가리켰다.

"그럼 앞으로 육 개월 내에 저 양반만큼만 강해지면 되는 거잖아. 그게 된 사람들만 대회에 나가면 되겠네?"

백상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아, 아니, 이놈아. 그게……."

"아아. 됐어.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뭐."

"……."

어렵지 않아?

백상이 슬쩍 고개를 돌려 백천을 바라보았다. 백천은 반쯤 해탈한 얼굴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명아. 그게 그렇게……."

"됐다니까."

"아니."

"괜찮아. 괜찮아."

"내 말은……."

"별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니……."

"됐어! 됐어!"

사람 말 좀 들어, 인마!

백상이 속이 터지다 못해 아파 오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이놈이랑 대화를 하고 있다 보면 정말 절로 도가 닦이는 기분이다.

청명이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사숙도 참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하네."

"응?"

"내가 사숙들이 그딴 놈들한테 지게 내버려 둘 것 같아?"

"……."

청명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질 수 있으면 어디 한번 져 봐."

"……."

사색이 된 백상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처, 청명아. 내 말은……."

"걱정하지 마, 사숙. 사숙이 왜 걱정하는지 내가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응?"

청명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노오력이 부족한 거지! 노오력이! 정말 내가 뒈질 만큼 열심히 했으면 그런 생각이 들 수가 없어. 눈에 보이는 놈들은 다 대가리를 깨 버리겠다는 생각만 들지."

청명아.

잘 생각해 봐라. 그건 노력이 아니라 인성의 문제다.

평범한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생각은 안 한단다. 청명아.

"한동안 살 만하다 싶으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이건 다 내 탓이다. 내가 사숙들을 더 열심히 굴렸으면 지금쯤 자신감이 들어차서 반쯤 날아다녔을 텐데! 내가 게을러서! 이 내가 게을러서!"

"……."

눈에 핏발을 세우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는 청명에, 제자들의 얼굴은 점점 시커멓게 죽어 갔다.

그리고 곧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백상에게로 모인다.

'아니, 왜 쓸데없는 말을 해 가지고!'

'이렇게 될 줄 몰랐나?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망할! 망할! 망하아아알!'

등 뒤로 매섭게 꽂히는 시선을 느낀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만 그런 생각한 거 아니잖아, 이놈들아!'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는 그를 보던 백천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 당황하지 마라."

"사형!"

백상이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얼굴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나마 이 미친놈을 말려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도 청명의 말에 동의한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진짜 뒈질 만큼 열심히 수련하다 보면 겁이 없어진다. 이만큼 했는데 질 리가 없다는 생각만 가득해지더구나."

"……네?"

"그러니 너희도 할 수 있다! 나도 열심히 거들어서 너희가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품지 않도록 해 주겠다!"

"……."

백천이 굳게 다짐하며 주먹을 꽉 쥔다. 그리고 백상은 혼이 날아간 얼굴로 사형을 바라보았다.

지옥에서 마주친 게 부처님인 줄 알았더니 아수라였다.

'아니, 그런데 진짜로 이 양반들은 대체 운남행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온 거야.'

왜 청명 같은 놈이 늘어나냐고!

지금도 지옥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에요."

설상가상으로 유이설이 백천을 거들고 나섰다.

"자신이 쌓아 올린 것. 그게 자신감의 원천."

"그렇지."

백천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겁이 난다는 말은 정말 지옥같이 굴러 보고 나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이다. 아직 너희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사형은 겪어 본 것처럼 말합니다?"

"나?"

백천의 입매가 비틀렸다.

"글쎄. 잘 모르겠구나. 너희가 나와 같은 짓거리를 해 보고도 과연 그 말을 할 수 있을지 말이다."

"……."

"걱정할 것 없다. 나도 유 사매도. 그리고 윤종과 조걸도 너희를 도울 것이다. 우리가 겪은 그대로!"

사형.

왜 그 좋은 말을 하면서 이를 가십니까?

저희한테 분풀이하시는 건 아니죠? 그렇죠, 사형?

"예! 저희도 돕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세상에는 꼭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것들이 있다.

하필 그런 것들을 사질로 둔 것이 백상의 불행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숙들도 사형들도 알아야 할 게 있어."

"으응?"

청명이 모두를 한번 바라보고는 답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약해서 지는 경우는 있어도, 화산의 무학이 약해서 지는 일은 없어. 사형들이 이십사수매화검법만 제대로 익혀 낼 수 있다면 상대가 누구든 겁먹을 필요 없다. 그게 무당이든 소림이든."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

낮고 조용한, 그래서 더욱 진정성 있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그리고 화산이 사숙들을 강하게 만들어 줄 거야. 천하의 누구도 감히 사숙들을 무시할 수 없도록 말이야."

백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의 말이 효과가 있었음일까?

제자들 사이에서 기이한 열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청명이 헛소리는 자주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걸……. 아니, 거짓말도 가끔 하기는 하지만 이럴 때는…….

음.

여하튼 거짓말 같지는 않다.

백천이 청명의 말을 받아 이었다.

"잊지 마라."

백천이 모두를 둘러보고는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장문인과 장로님들께서 이끌어 주시고, 사숙들께서 도와주시지만, 결국 화산의 영광을 재현해야 할 이들은 바로 우리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어깨를 펴라. 잊지 마라. 너희는 당당한 화산의 검수들이다."

"예, 사형!"

"명심하겠습니다! 사숙!"

우득. 우드득.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었다.

"그럼 다 동의한 것으로 알고……."

"응?"

청명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더니 검을 검집째 뽑아 들었다.

"시작하자고."

"……벌써?"

"뭐 굳이 시간 끌 것 있나? 시간 아깝게."

청명이 턱짓을 하자 백천과 유이설이 이대제자들 앞에 선다. 그리고 윤종과 조걸은 삼대제자들 앞에 섰다.

"이제 기초는 얼추 다졌으니, 실전으로 넘어가야지. 삼 개월. 딱 삼 개월이다. 삼 개월만 죽었다고 생각해. 거기서 살아남으면……."

청명이 씨익 웃는다.

"매화검수라 불릴 자격을 얻게 될 테니까."

매화검수(梅花劍手).

아득하게 잊혔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화산의 제자들이 모두 몸을 떨었다.

한때 매화검수라는 이름은 화산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감히 누구도 자칭할 수 없는 그 매화검수의 이름이 청명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대신."

청명이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모든 이름에는 그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이름을 짊어진다는 건 그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짊어진다는 뜻이야. 살아서 지옥을 보지 않고서 그 이름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제자들의 눈이 단호해진다.

"어차피 지금도 지옥인데 뭘 새삼스럽게."

"시작하자. 네 말대로 시간 끌지 말고."

"어쭈?"

청명이 피식 웃는다.

조금 전까지는 징징거리던 것들이, 이제 결심이 좀 선 모양이다.

"시작해."

"알겠다."

청명이 뒤로 슬쩍 물러나자 백천이 소리쳤다.

"앞에서부터 한 명씩 나서라. 대련한다. 대련을 마친 이들은 청명에게로 가서 다시 대련할 것이다. 시간 끌지 말고 움직여!"

"예!"

가장 앞에 서 있던 이들이 짓쳐 달려든다. 그 모습을 보며 청명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햇병아리 같은 것들이.'

그래도 이제는 조금씩 깃털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남은 시간 동안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전수하고 지옥같이 굴린다면?

'할 수 있겠지.'

천하무림대회는 화산의 부활을 선포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겸사겸사 구파일방 대가리도 좀 깨고.'

씨익 웃은 청명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형.

장문사형.

조금만 기다리쇼!

내가 화산의 이름을 천하에 떨쳐 드릴 테니까.

낄낄 웃은 청명이 검을 움켜잡았다.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흐른다.

화산의 시간 또한 공평하게 흘러갔다.

하루.

이틀.

그리고 한 달.

육 개월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덧, 천하무림대회에 참가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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