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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56화 (256/1,567)

256화. 뭐가 열린다고? (1)

"……끄으으으응."

화와 복은 항시 함께 온다고 했던가?

현상은 그게 무슨 말인지 절절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일단 맞이한 복은 이보다 더 기꺼울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실전되었다고 생각한 화산의 무학이 돌아왔으니까.

물론 과거에 보유하고 있던 무학이 모조리 다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확보한 무학만으로도 화산의 뼈대를 다시 세우는 데는 성공한 수준이다.

도해본으로 입수한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제외하고도 무려 스무 가지가 넘는 비급이 데굴데굴 굴러들어 왔다.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쫙 진열해 놓은 비급을 보고만 있어도 황홀할 지경이다. 어떠한 미주도 그를 이리 취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화를 불러온 것 역시 이 비급들이었다.

"매, 매화산수는…… 우선 상급으로!"

"예!"

무각원들이 재빠르게 매화산수를 받아 들고는 한쪽으로 달려간다.

"상급이면?"

"열 권!"

"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자꾸나."

그때, 한 무각원이 슬쩍 현상의 눈치를 보더니 운을 뗐다.

"그런데…… 각주님. 조금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벌써 나흘째입니다."

"끄응. 아직 반도 못 했는데 내가 어떻게 쉴 수 있겠느냐? 장문인께서 저리 닦달을 하시는데, 이놈아."

"이러다 건강을 해치십니다. 장문인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장문인께서 닦달하시는 게 문제가 아니다. 내가 지금 잠이 오겠느냐?"

핏발이 선 현상의 눈을 보며 무각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아주 간단했다.

단기간에 수많은 비급을 손에 넣다 보니 이 비급들을 확인하고 분류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왜 그런 절차가 필요하냐고?

보통 명문 거파라 불리는 곳은 최소 수십 종에서 많게는 수백 종의 무학을 보유하고 있기 마련이다.

저 소림의 장경각에는 칠십이종절예(七十二種絶藝)를 비롯하여 일천 종에 가까운 무학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하나,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 보유한 무학이 일천 종이라 해서 사람이 천 가지 무학을 모두 익힐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각 문파들은 제자들이 기본적으로 익혀야 하는 무학의 체계를 정해 두고, 적성과 능력에 맞춰 함께 익힐 수 있는 무학들을 선별해 두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화산 역시 이번에 얻은 무학들의 체계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사람은 당연히 화산 무학의 전반을 담당하는 무각주 현상이었다.

"끄으으응. 언제 이걸 다 마무리하는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많은 비급의 내용을 파악하고 체계를 정비하는 것도 어렵지만, 더 큰 문제는 이 비급의 수준이 현상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버렸다는 점이다.

하나하나가 새로운 무학이고 지금껏 현상이 접해 보지 못한 상승의 무학이다.

당장 현상부터 머리를 싸매고 배워야 할 판에 어떤 것이 더 훌륭하고 기본이 될 무학인지 구분하라니. 될 리가 있겠는가?

현상이 양손으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핏발이 선 그의 눈이 아직 남은 비급들을 노려본다.

그때였다.

"좀 어떻습니까?"

현영이 무각의 문을 열고 들어오며 현상을 바라본다.

"……어렵다."

"거, 사람 몰골이 아니시구만. 그러다가 머리 다시 셉니다. 좀 쉬어 가며 하십쇼."

"내가 그럴 시간이 있겠느냐? 지금 장문인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신데."

"쯧쯧쯧쯧. 그러니 그 쓸데없는 자존심 좀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존심?"

현상이 되묻자 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러 사형이 머리를 싸맵니까. 청명이 불러다가 하라고 하면 되지."

"……응?"

청명?

여기서 청명이 왜 나오는가?

"청명이라니……?"

"청명이가 사형보다 세잖습니까."

"……."

현상이 입을 다물었다.

어…….

그게 그렇긴 한데……. 그게…….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애써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제는 화산의 모두가 은연중에 청명을 화산의 최고수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 이건 화산의 무학을 분류하는 일이다. 그러니……."

"사형. 사형. 답답한 소리 좀 그만하십시오."

"응?"

"사형도 이 무학들에 대해서 아는 게 없잖습니까."

"……."

"새로 무학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일입니다. 늙은 우리가 잘하겠습니까? 빠릿빠릿 어린 녀석이 잘하겠습니까? 괜히 고생하지 마시고 청명이나 찾아보십시오."

입만 열면 청명을 찾아 대는 현영을 보며 현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청명이 놈이 무슨 도깨비 방망이도 아닐진대, 너는 무슨 일만 있으면 그 녀석을 찾는구나."

"도깨비 방망이 같은 어쭙잖은 건 가져다 대지도 마십시오. 도깨비 방망이를 백날 두드려 본들 이십사수매화검법의 도해본이 나오겠습니까?"

"……그도 그렇구나."

생각해 보면 실로 굉장하긴 하다.

청명이 뭔가를 손댈 때마다 화산은 말이 되지 않는 속도로 발전한다. 불과 이 년 반 전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화산은 상전벽해라는 말도 무색할 정도로 달라졌으니까.

"그러니 사형도 쓸데없이 용빼지 말고 어서 청명이 놈이나 찾아보십시오."

"찾다니. 청명이가 어디 가기라도 했다는 말이더냐?"

"이 녀석이 안 보입니다. 끄응……. 대체 어딜 간 건지. 내가 잉어도 고아 놨는데."

……그만 좀 먹여.

그러다가 애 굴러다니겠다.

사라라락.

불어오는 훈풍에 옷자락이 휘날린다.

청명은 백매관 처마 위에 드러누워 간만에 편히 쉬는 중이었다.

'아, 살 것 같다.'

사실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기는 했다. 폐관을 마치고 매화동에서 나온 이후로 제대로 쉬어 본 기억이 없다. 남영에서부터 섬서, 사천에 운남까지. 거의 중원을 횡단하다시피 하지 않았는가?

'이제 할 거 다 했지 뭐.'

자소단으로 내력도 빵빵하게 채워 줬고, 익힐 무학도 줬다. 그리고 백천들을 어르고 달래서(?) 알아서 자체적으로 수련하는 분위기도 만들었다.

처음 화산으로 돌아와 세운 첫 목표는 이제 달성했다고 봐도 좋다.

'그러니 한동안은 좀 빈둥대 볼까?'

수련이란 반드시 몰아붙인다고 능사가 아니다. 때로는 적절한 휴식이 과격한 수련보다 나을 때도 있다.

딱 한 달만……. 아니, 보름만 빈둥…….

"응?"

그때 청명의 눈에 낯선 이가 산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화산의 제자가 아니다.

"거지?"

청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화산에 웬 거지가……. 아니, 잠깐만. 어디서 본 거지 같은데?

"화산신룡!"

때마침 처마 위에 누운 청명을 발견한 그 거지가 부리나케 달려오기 시작했다.

눈도 좋지.

파팟!

경공을 펼쳐 단숨에 처마 위까지 뛰어오른 거지는 청명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대뜸 인상을 찌푸리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누구세요?"

"……."

거지의 얼굴이 시뻘겋다 못해 시커멓게 달아올랐다.

"나다, 이놈아! 홍대광!"

"어……. 그러니까……?"

청명이 여전히 모르겠다는 눈치를 보이자 홍대광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퍽퍽 쳐 댔다.

"개방 낙양 분타의 분타주였던 홍대광이다! 이놈이 운남에 갔다 왔다더니 정신을 놓고 왔나?"

"아아. 거지 아저씨?"

"그래! 거지 아저……. 그렇게 부르지 마라, 이놈아!"

청명이 반색을 하며 홍대광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홍대광과는 검총에서 나름 좋은 관계를 만들었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여기는 웬일이에요?"

"못 들었느냐?"

"뭘요?"

"끄응. 장문인께서 말씀을 해 주지 않으신 모양이구나. 전에 네가 내게 화음에 분타를 열라고 하지 않았느냐?"

"거지 몇 상주시켜 달라고 했죠. 분타를 열어 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거지가 몇 상주하면 그게 분타지. 우리 분타가 뭐 별거 있느냐? 움막 하나 치고 거지가 들어앉으면 그게 분타지."

어.

그건 그렇네.

"그래서요?"

"내가 그 개방 화음 분타의 분타주로 왔다."

"……굳이?"

"굳이라니, 이놈아! 내가 허락을 받아 내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홍대광이 억울해했지만 청명은 여전히 뚱한 시선만 던졌다.

영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에 다시 울컥한 홍대광이 분통을 터트렸다.

"기뻐해야 할 것 아니냐! 기뻐해야!"

"아니…… 뭐 굳이……. 거지가 다 똑같은 거지지."

"평범한 거지와는 다르다, 평범한 거지와는! 본좌는 이래 봬도 개방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개방도 어지간히 인재가 없는 모양이네요."

"끄으으으응."

홍대광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이걸 확 팰 수도 없고.'

패기는커녕 되레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홍대광도 개방에서는 나름 방귀 좀 뀌는 사람이지만, 이 괴물 놈에게는 어림도 없다. 당장 검총에서도 무당의 장로와 드잡이하던 놈이 아니던가?

"그리고 보니 너 그거 진짜냐?"

"뭐가요?"

"네가 그 당가의 장로와 붙어 이겼다는 말이 있던데. 워낙에 황당한 정보라 아직 개방에서도 진위 여부를 확인 중이거든."

"아, 그거요."

"그래! 사실이냐?"

청명이 뚱한 얼굴로 홍대광을 바라보더니 한 손을 앞으로 쭉 내밀어 펼쳤다.

"……뭐?"

"아무리 거지라 날로 먹는 게 일상이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정보를 얻는 건데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어요? 아저씨가 저한테 정보를 공짜로 준 것도 아니고. 거래는 확실하게 해야죠."

"이 벼락 맞을 놈이! 지금 거지한테 돈을 갈취하겠다는 거냐?"

"거 편리하네. 어떨 때는 거지고, 또 어떨 때는 정보상이고. 하나만 합시다, 하나만. 적당히 두 다리 걸치다가 필요할 때마다 갈아타지 마시고."

"끄으응."

홍대광이 앓는 소리를 내더니 허리춤에 찬 호리병을 꺼내 청명에게 내밀었다.

"옜다."

"뭔데요?"

"보면 모르느냐? 술이다!"

"돈이 좋은데."

"먹고 죽으려 해도 없다, 이놈아! 앞으로 개방에서 정보 받을 때마다 돈을 낼 생각이면 가져다주마!"

"에이. 누가 그러쟤요? 헤헤."

청명이 히죽히죽 웃자 홍대광이 입맛을 다셨다.

'능구렁이 같은 놈.'

얼굴은 어린 티가 팍팍 나는 놈이 어디 영감이 들어앉았나? 왜 이리 능글맞은가.

"먹던 건 아니죠?"

"새거다, 새거!"

"감사히 먹겠습니다."

청명이 곧장 술병의 마개를 따고는 꿀꺽꿀꺽 들이켰다. 얼마나 시원하고 달게 들이켜는지, 보는 사람이 다 군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크으! 좋네요."

"끄응. 도사라는 놈이……."

입맛을 다신 홍대광은 재빨리 말을 이어 갔다.

"마셨으니 빨리 진위 여부나 말하거라. 사실이냐?"

"뭐, 영감님 한 분 때려잡기는 했죠."

"……사실이구나. 세상에."

홍대광이 경악하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놈은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지?'

검총에서 무당의 장로와 대등하게 싸울 때도 괴물 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한술 더 떠서 당가의 장로와 싸워 이겼단다.

홍대광이 청명이라는 놈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면, 이 정보를 물어 온 거지의 귀싸대기를 날려 버렸을 것이다.

'본 게 있으니 믿지 않을 도리도 없고.'

아니, 무엇보다 저 태연자약한 모습이 더 황당하다. 이놈에게는 당가의 장로를 이긴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듯해서 말이다.

'아니, 실제로 아무것도 아닌 건지도 모르지.'

대체 이 상황을 윗선에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황당하기만 한 홍대광이었다.

그때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런데 왜 온 거예요?"

"아! 그렇지!"

홍대광이 후다닥 어깨에 힘을 주더니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어서 이 어르신께 감사를 표하거라. 내가 중요한 정보를 가져왔으니까."

"엥?"

"곧 화산도 알게 될 일이기는 하지만……."

"거, 뜸 들여 봐야 판돈 올라갈 일 없으니까 그냥 빨리 이야기하세요."

"끄응."

도무지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없는 놈 같으니라고.

홍대광이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툭 내뱉듯 말했다.

"소림이 움직였다!"

"……그게 왜요?"

"소림이 움직였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왜요?"

"……."

청명은 아까보다도 더 뚱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홍대광은 믿을 수 없어서 눈을 연신 꿈벅였다.

"어……. 그동안 숨을 죽이던 소림이 움직였다니까?"

이 새끼, 설마 소림이 움직였다는 게 어떤 의미인 줄 모르는 건가?

홍대광이 막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주워 먹을 게 생긴 모양이죠."

"응?"

"원래 그 땡중 놈들이 그렇잖아요. 평소에는 점잔 빼면서 온갖 근엄한 척은 지들끼리 다 하다가, 뭐 하나 주워 먹을 게 생기면 득달같이 승복 자락 찢어져라 달려오고."

"……."

홍대광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천하에서 소림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이놈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뭐 어떻게 움직였다는 건데요?"

"……대회를 열 모양이다."

"네? 대회요?"

뜬금없는 말에 그제야 청명이 관심을 보이는 듯 되물었다. 홍대광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 무림 대회를 크게 열 모양이다! 숭산에서 배첩을 날린다고 하는구나!"

"뭐가 열린다고?"

지금까지 태연하기만 하던 청명의 눈빛이 일순 달라졌다.

"무, 무림……."

"무림 대회?"

"그, 그렇다."

"그러니까 비무 대회?"

"그렇지."

"……구파일방이 다 참가하는 비무 대회?"

"소림에서 여는 비무 대회니 당연히 그렇……."

그 순간 청명이 와락 달려들더니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홍대광이 기겁을 하여 움찔 물러난다.

"왜, 왜 이러느냐?"

"배첩."

"……응?"

"배첩 어딨어?"

"……."

청명의 눈은 완전히 돌아 버린 지 오래였다.

"그 무림 대횐지 나발인지 참가할 수 있는 배첩 어디에 있냐고!"

잘 걸렸다, 이 새끼들!

싸그리 다 머리털을 뽑아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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