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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55화 (255/1,567)

255화.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5)

문이 열렸지만, 누구도 선뜻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긴장감과 불안함, 그리고 기대감까지.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그저 열린 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는 다름 아닌 현영이었다.

"장문인."

"……그래."

"들어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래야지."

현종이 침중한 눈으로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무섭다.

저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을까 봐.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난다는 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후욱!"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는 이내 배에 힘을 주고 열린 문 안으로 발을 옮긴다. 그 뒤를 장로들과 운자 배가 뒤따랐다.

그 모습을 본 현영은 청명을 부축해 일으켰다.

"청명아."

"끄응."

"고생 많았다. 만년한철을 자르다니,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뭐, 별것도 아닌데요. 헤헷."

그렇게 잘하는데도 의외로 칭찬은 별로 못 듣고 살았던 청명인지라 누가 칭찬만 하면 입이 벌어지고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가자꾸나."

"예."

청명이 현영을 따라 비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들어선 현종이 일렁이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이……."

소탈하다.

비고라기보다는 서가에 가깝다. 세 개의 책장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소탈함을 넘어 곤궁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나 이 모습이 화산의 장문인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전해 주는 것 같아 되레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현종이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서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아……."

그 자리에서 그만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선조이시여……. 화산의 선조이시여! 어찌…… 어찌 저희를 이토록 보살피시나이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간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까닭이었다.

"자, 장문인 이건……!"

"세, 세상에!"

현상과 현영의 눈도 등잔처럼 커졌다.

"자, 장문인! 이거 암향표입니다, 암향표! 실전되었던 화산의 신법입니다!"

"매, 매화보! 칠성보도 아니고 매화보라니!"

"히익! 구궁검이 있습니다! 장문인 여기 구, 구궁검이!"

말 그대로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하나의 서가에 화산의 무학들이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중 태반이 이미 화산에서 실전된 무학들이었다.

영영 잃었다 여겼던 상승 무학들이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화산의 무학을 관리하는 무각주 현상은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갔다.

"……이, 이런 일이."

그는 넋을 아예 놓아 버린 듯 멍하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얼마나 찾아 헤맸던가?

그가 그토록 바라고 찾던 모든 것이 이곳에 잠들어 있었다.

감히 손을 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현종과 현상 대신, 현영이 조심스레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오오! 이토록 깨끗하게 보존되다니! 마치 새 책 같습니다. 장문인!"

뒤쪽에서 장로들이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청명이 그 말을 듣고는 움찔했다.

아……. 흙 좀 묻힌다는 걸 까먹었네.

등허리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오오오오! 얼마나 보존이 잘됐는지 아직 묵향이 납니다, 장문인!"

아……. 제대로 말렸어야 했는데.

"심지어…… 어…… 이거 글자가 좀 덜 마른 것 같은뎁쇼?"

현영마저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청명은 삐질삐질 비지땀을 흘리며 이 사태를 수습할 방도를 필사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이게 어……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허허허허허."

그때 돌연 현종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선조께서 왜 굳이 이 창고를 한철로 만드셨나 했더니, 이런 의도셨구나. 내 한철로 만든 상자는 냉기를 머금어 안에 든 것을 상하지 않게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도 비슷한 말을 들어 봤습니다."

"이 서책들이 이리 깨끗한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겠느냐?"

응. 아니야.

아, 아니지. 아니지! 이게 아니지!

크으! 장문인!

이래서 장문인이지!

굳이 나서서 뭘 할 필요도 없이 말을 딱딱 맞추는 현종을 보며 청명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알아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 주네.'

아이고, 이 깜찍한 것들!

그때였다.

"자, 장문인! 여, 여기!"

"무, 무슨 일이더냐?"

"여기, 여기 좀 보십시오! 여기!"

"어디?"

"여기요!"

현영이 다급하게 한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현종의 몸이 석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졌다.

서가 아래쪽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스물다섯 권의 비급.

"서, 설마……."

서책의 제목이 흡사 허공에 떠오르기라도 하는 듯 커다랗게 보인다.

이십사수매화검법도해(二十四手梅花劍法圖解).

"어……. 어어……."

서가를 바라보는 현종의 얼굴이 멍하게 풀어졌다.

이십사수매화검법.

심지어 그냥 이십사수매화검법도 아니고 도해본이다.

"도, 도……. 도……."

"자, 장문인!"

"도해……. 끄르르륵!"

급기야 현종이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갔다.

"아악! 장문인!"

"정신 차리십시오! 아니, 이 양반이 여기서 넘어가면 어떡합니까! 일어나십시오, 장문인!"

식겁한 현영이 현종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며 언성을 높였다. 한참을 짤짤 흔들고서야 현종이 번쩍 눈을 떴다.

"허어어억!"

"정신이 좀 드시……."

"비켜라!"

벌떡 일어난 현종은 현영을 잡아 날려 버리고는 거의 기다시피 서가로 달려들었다.

"도해! 도해본! 이십사수매화검법의 도해본!"

열흘 굶은 사람이 음식을 본 것 같은 기세다. 서가 바로 앞에 서서 비급을 씹어 먹을 기세로 노려보던 현종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다는 듯 덜덜 떨어 댔다.

"이, 이런 일이. 이……. 허허. 허!"

도해본이 무엇이던가.

비급을 좀 더 쉽게 익히기 위해서 그림과 함께 분석하고 설명해 둔 해석본이다.

하나의 무학을 완전히 설명하다는 것이 너무도 어렵고 지난한 일인지라, 웬만해서는 잘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도해본이었다.

하지만 스승도 없이 무학을 익혀야 하는 그들에게 있어선 무엇보다 더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도해본이었다.

"화, 확인해 보십시오, 장문인! 어서!"

현상의 외침에 현종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이십사수매화검법의 비급을 뽑아 들었다.

사라락.

조심스러운 손길로 표지를 넘기자 웅혼한 필체로 쓰인 첫 장이 드러났다.

대 화산파 십삼 대 제자 청명이 후대에 전한다.

"처, 청명?"

"네! 여기 있습니다."

"너 말고, 인마!"

"……."

나 맞거든, 인마?

청명이 뚱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지만, 현종은 그런 그에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청명.

얼마나 그리고 또 그렸던 이름인가?

얼마나 바라고 또 바랐던 이름인가?

그 이름자를 보는 순간, 현종은 도무지 밀려드는 격한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마음속에 내내 품고 있던 그 별호를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매화검존이시여."

잊힌 화산의 전설.

그 오랜 시간 동안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가 화산을 부여잡을 수 있게 해 준 그 이름이 여기에 있다.

"매, 매화검존이라니! 그럼 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매화검존께서 직접 남기셨다는 말입니까?"

현영이 현종의 옆에 바짝 붙어 고개를 내밀었다.

"처, 청명이라니!"

이윽고 그의 몸도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화산의 제자로 있는 이들 중 매화검존을 흠모하지 않는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현종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이어지는 글귀를 읽기 시작했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은 화산의 근본이고, 화산의 정화다. 본도는 후인들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각 초식에 대한 도해를 남긴다.

후인들은 이 도해를 참고하여,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완전히 익혀 낼 수 있다면 천하의 어떤 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리라.

명심하라.

후인들이 잇는 것은 검이 아니라 화산의 의지다. 나는 이 스물네 권의 도해에 내가 가진 화산의 의지를 담는다.

이 의지가 이어지는 한 화산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 진짜 매화검존의 도해본이다! 매화검존의!"

"으하하하하하핫! 세상에! 이런 미친!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핫!"

현영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이십사수매화검법만 있다 해도 화산이 떠나가라 잔치를 벌이고 남는데, 이건 심지어 그 매화검존의 도해본이다. 천금, 아니! 만금과도 바꾸지 않을 보물 중 보물이다.

"백 년 전의 물건이라니! 으하하하하하하! 이런 복이 있나! 이런!"

현영이 현종에게 와락 달려들어 그가 들고 있는 비급을 빼앗아 들었다.

"어디! 어디……."

격앙된 손짓으로 책장을 넘기려던 현영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뭔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장문인."

"음?"

"……먹이 너무 덜 말라서 앞장과 뒷장이 서로 붙어 있습니다……?"

"……."

현종과 현영이 묘한 시선으로 서책을 바라본다.

그와 동시에 청명의 등골에선 다시금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더럽게 꼼꼼하네, 진짜.'

대충 좀 넘어가자, 얘들아. 대충 좀! 뭐가 그렇게 섬세하니! 니들이 언제부터 그랬다고!

"으음. 매화검존께서 이 도해를 만들고 바로 이곳에 넣은 모양이구나. 그래서 먹이 마르지 않은 채로 보존이 된 게 아닐까?"

"그렇겠죠?"

"하하하하. 당연한 말을. 이 만년한철로 만든 비고에 누가 들어왔다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것도 최근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하하하하핫!"

청명의 뒤통수를 타고 땀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저놈은 아까부터 왜 자꾸 땀을 흘리지?'

정말 내상이 있었던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때였다.

"장문인!"

"왜 그러느냐?"

"필체가 모두 같습니다!"

"응?"

"방금 확인해 봤는데 이곳의 비급이 모두 같은 필체로 쓰여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부 한 사람이 작성한 것 같습니다."

움찔.

청명이 동그래진 눈으로 현상을 바라보았다.

'뭐 그런 걸 알아봐?'

아니, 왜 쓸데없이 섬세하냐고!

"그렇다는 건……?"

"예! 여기의 모든 비급이 매화검존께서 직접 만드신 비급 같습니다!"

"오오. 검존께서! 이리 귀한 물건들이!"

현종은 이제 아예 감동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검존…… 검존이시여. 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

현종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리며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현영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고 탈탈 흔들었다.

"아니! 이 양반이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등선하려고 하네! 그렇게 등선할 거면 회춘은 왜 했습니까, 이 양반아! 죽으려면 자소단 뱉어 내고 죽으쇼!"

"아, 안 죽는다, 이놈아!"

현종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방금 뭔가 푸르고 누런 구름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조심해야겠어.

"허허허허. 홍복이로다! 화산의 홍복이로다!"

세 현자 배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입은 귀에 걸렸고, 엉덩이는 쉴 새 없이 들썩거렸다.

"장문인. 저희도 좀……."

"아, 그래! 그러자꾸나!"

현종이 현자 배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비고 안에 모두가 들어갈 수 없어서 운자 배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자리를 비켜 주자 그제야 다른 제자들도 안으로 들어섰다.

"……매화산수(梅花散手)!"

"사, 사숙! 여기 태허장도 있습니다."

"월녀조화검(月女調和劍)."

겉에 쓰인 비급의 이름만으로도 눈이 돌아간다.

살짝 어지럼증까지 온 백천은 서가에 손을 짚고 호흡을 골랐다.

그런데.

그그극!

"응?"

백천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간다.

"어?"

그 광경을 본 청명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아, 아니. 저? 저거?

"자, 장문인! 여기에 틈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공간이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사숙 새끼가?

"오오? 그래?"

현종이 다시 부리나케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오, 과연 그렇구나!"

"완전히 열어 보겠습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청명이 어찌할 틈도 없이 서가가 치워지고 그 아래의 문이 열렸다.

"내려가 보자!"

"갑시다! 빨리 들어갑시다!"

현자 배들이 우르르 비고의 아래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안은 텅 비어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으으음. 만들어 놓고 활용하지 않은 공간 같구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그래. 이미 얻은 것만으로도……. 응?"

차분하게 말하던 현종이 뭔가를 발견한 듯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이거……?"

"예?"

현자 배들이 현종을 따라 아래를 본다.

"웬 원이…… 있구나."

"동그랗네요."

"……커다랗고."

"……."

현영이 묘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마치 누가 잘랐다가 붙인 것 같지 않습니까?"

"하하하하하하!"

그때 갑자기 터진 웃음소리에 현자 배들이 고개를 돌렸다. 청명이 입구로 고개를 빼꼼 내민 채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누, 누가 한철을 붙여요. 에, 에이. 그건 매화검존 할아버지가 와도 못 하겠네!"

"그렇지?"

"그, 그럼요!"

"그래. 그렇지. 그런데 너 왜 땀을 그렇게 흘리느냐? 내상이 다 낫지 않은 것이냐?"

"무, 문을 자른다고 또 무리를 해서……."

"저런, 저런. 쯧쯧."

현영이 청명을 걱정하는 와중에도 심각한 얼굴로 가만히 원을 바라보던 현종이 마침내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구나."

"예?"

청명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알아? 뭘 알아?

"은밀히 만들어진 공간과 커다란 원. 모르겠느냐? 이건 선인들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고귀한 가르침이다."

"가르침이라고 하시면……?"

"비어 있는 공간, 그리고 비어 있는 원. 충분히 얻을 것을 얻었으면 그것에 만족할 줄 알고 더 큰 욕심을 내지 말라는 뜻이지."

"아아! 과연!"

"선인들께서 저희에게 도를 전하려 하셨군요."

"무량수불. 화산의 본분은 무가 아니라 도에 있음을 잊지 말라는 의미시겠지. 이렇게 또 하나를 배우는구나."

"선인들의 뜻이 더없이 깊습니다. 무량수불."

함께 도호를 외우는 현자 배들을 보며, 온몸에 긴장이 풀린 청명은 털썩 그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도는 얼어 죽을.'

이러다 내 심장이 먼저 멎겠네.

아이고, 내 팔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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