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4)
백천은 터덜터덜 산문으로 들어오는 청명을 보며 서글프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 죽었네.'
좀 죽지, 좀!
유이설과 조걸, 그리고 윤종도 기가 찬다는 듯 산문 쪽을 바라본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하다못해 이제는 화산을 터네! 저거, 저거!"
"제 집을 터는 미친놈이 어디에 있어!"
"답 없음. 총체적 난국."
속이 뒤집어 진다.
'이걸 말할 수도 없고, 말을 안 할 수도 없고.'
장문인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르자니 사태가 커질 것 같고, 그렇다고 꾹 참자니 배알이 뒤틀려서 화병이 날 것 같고.
내가 장님이다, 벙어리다 하고 외치면서 버틸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터덜터덜 걸어 들어오는 놈의 얼굴이 배부른 강아지 꼴이니 어찌 속이 뒤집어지지 않겠는가?
"청명아!"
사정을 모르는 다른 제자들이 청명을 발견하고는 우르르 달려갔다.
"큰일 났다! 어제 화산에 도둑이 들었어! 한철 솥을 도둑맞았다!"
"뭐?"
청명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런.
일.
이.
있.
었.
어?"
연기하지 마, 인마! 너무 어색해서 내가 다 창피할 지경이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다른 제자들은 그 어색함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엄청 강하더라! 윤종 사형이 한 방에 나가떨어졌어."
"쯧쯧쯧. 수련을 게을리해서 그렇지."
저 개새…….
윤종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대체 저 망할 종자는 양심을 어디에다 팔아먹었단 말인가?
"장로님들이 아직 뒤져 보고는 있지만…… 아마도 잡기는 힘들 것 같다."
"씁. 어쩔 수 없지. 내가 있었으면 잡았을 텐데."
잡았겠지.
그래. 잡았겠지, 망할 놈아.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뭐, 이미 잃어버린 건 어쩔 수 없지."
그때였다.
"청명아! 장문인께서 돌아오는 대로 보자고 하셨다."
"알았어."
청명이 피식 웃고는 터덜터덜 장문인의 처소로 향했다. 백천 무리가 곧장 그 뒤로 따라붙으며 눈을 흘겼다.
"양심은?"
"뭐가?"
윤종의 말에 청명이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레 반문했다.
아오, 저 표정!
진짜 죽빵 한 대만 꽂아 넣을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원시천존이시여. 저 새끼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
"끄으응."
윤종은 앓는 소리를 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 옆에서 백천이 이를 갈며 위협했다.
"장문인한테 확 불어 버린다."
"아까부터 자꾸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내상을 입어서 요양을 하고 온 사람을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내상? 내애애애사아앙?"
그게 내상 입은 놈의 혈색이냐, 이 새끼야? 얼굴이 반질반질하다 못해 짜면 기름도 나오겠다!
"여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자꾸 괴롭히지 마. 이런 식으로 못살게 굴면 장로님들한테 이를 거야. 사숙들이랑 사형들이 자꾸 사람 괴롭힌다고."
"……."
누가 누굴 괴롭혀?
누가 누굴?
"어, 어흑!"
"사숙!"
"사숙 정신 차리십시오!"
백천이 화를 못 이겨 뒷골을 잡고 휘청거리자 조걸과 윤종이 얼른 달려들어 그를 부축했다.
청명은 그저 낄낄대며 장문인의 처소로 향했다.
"……화산은 어디로 가는가?"
멀어져 가는 그 뒷모습을 보며 중얼대는 백천의 목소리에선 물기가 묻어났다.
* * *
"그래! 몸은 괜찮아졌느냐?"
"예!"
"오오, 다행이구나. 안 그래도 간밤에 흉적이 들어서 걱정했단다. 혹여 너를 노린 게 아닌가 싶어 네 종적을 수소문하려 했었는데, 이리 무사한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한결 놓이는구나."
"헤헤. 그깟 도둑놈, 저한테 걸리면 한 방이죠."
"그래, 그렇지."
현종이 더없이 믿음직스럽다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한데…… 으음, 면목이 없게 되었구나. 네가 힘들게 구해 온 한철 솥을 이렇게 도둑맞다니. 다 우리가 못난 탓이다."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하고 그러세요.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죠. 그깟 한철 솥이야 다시 구하면 돼요. 한낱 물건이 사람보다 중요하겠어요?"
"오."
"역시 청명이구나."
"도기로다. 과연 도기로다."
"헤헤헤. 별말씀을요. 화산의 제자라면 당연한 거죠."
"그렇지, 그렇지. 옳지, 우리 청명이."
현영이 흐뭇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광경에 속이 뒤틀리는 이들도 있었다.
부들부들.
백천이 몸을 덜덜 떨자 윤종이 얼른 그의 허벅지를 꽉 움켜잡았다.
'사형. 마음은 알겠지만 여기서는 안 됩니다.'
"끄응."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쉰다.
차라리 오지 말 것을! 뭘 보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이리 험한 꼴을 본단 말인가?
"하나, 장문인. 이건 그리 쉬이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음?"
현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우선 누군가가 화산에 한철 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온 건지도 모릅니다."
"으으음."
현영이 눈을 찌푸렸다.
"사형의 말은 화산의 정보가 밖으로 새고 있다는 뜻입니까?"
"꼭 그런 뜻은 아니다. 그저 화산을 염탐하러 왔다가 한철 솥을 발견한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누군가가 이 험한 화산을 올라 영내를 염탐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으음."
현영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인즉슨, 외부의 인사들도 슬슬 화산을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겠지요."
"과연, 그렇구나."
"사실 그동안 아이들이 너무 잘해 주었습니다. 화산은 저 사천당가와 동맹을 맺었고, 저 야수궁과도 교역을 시작했습니다. 정보가 빠른 이들이라면 이제는 슬슬 화산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겁니다."
"종남의 일 역시 아직도 회자되고 있으니……."
"그렇습니다."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이 발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결국 강호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높아지게 되면 자연히 견제가 따를 수밖에 없다.
"우선은 아이들이 조금 불편해하더라도 이제부턴 다시 번을 세우도록 해야겠구나."
"좋은 생각이십니다. 장문인."
장로들의 대화를 들으며 청명은 흐뭇하게 웃었다.
'뭐래.'
니들 아직 그 정도는 아냐, 이것들아.
뭘 벌써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그래?
아이고, 이 깜찍한 것들.
현실을 알려 줄까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하는 짓이 귀엽기도 하니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일단 경계심을 가진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곧 화산은 다른 문파들의 경계의 대상이 될 게 분명하니까.
"그렇기에 이번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현상이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아. 몸이 모두 회복되었다고 했느냐?"
"네."
"그럼 정말 한철을 자를 수 있겠느냐?"
"네, 물론이죠."
"으음."
현상의 얼굴에 채 다 숨기지 못한 뿌듯함이 배어났다.
'청명이가 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애초에 화산의 장로들은 청명이라는 놈의 재능을 이해하길 포기한 지 오래였다.
청명은 화산에 입문한 지 반년 만에 종남 최고의 후기지수였던 진금룡을 일방적으로 쓰러뜨렸다.
그리고 입문한 지 일 년이 되어서는 백매관주인 운검으로부터
'저는 저놈을 못 가르칩니다. 그냥 두면 알아서 강해질 놈이니 내버려 두든가, 무각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시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라는 말을 끌어낸 놈이다.
이 년이 넘은 시점에서는 저 무당의 장로와 호각으로 싸웠고, 이제는 당가의 가주와 비무를 치르고, 당가의 태상장로인 당외를 쓰러뜨렸다.
화산의 장로 중 그 당외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할 이가 있던가?
그 말인즉슨 지금 화산의 최고 고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청명이라는 뜻이다.
"네 무위가 정말 무시무시하구나."
"화산의 가르침 덕입니다."
"허허. 겸손하기도 하지."
청명이 피식 웃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실제로 청명이 강한 이유는 화산에서 배웠기 때문이니까. 물론 지금의 화산은 아니지만.
대답을 할 때마다 가려운 곳을 살살 긁어 주는 듯한 청명의 화법에 장로들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장문인. 이제 확인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지."
현종이 살짝 머뭇거렸다.
지금껏 열 수 없어 그의 속을 까맣게 태웠던 비고다.
화산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마다 저 비고 앞에서 눈물 짓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감히 비고를 자를 수 있을 만한 고수를 초빙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 고수가 비고 안에 들어 있는 물건에 욕심을 낸다면 화산은 막을 힘이 없으니까.
그림의 떡.
꿈에서만 볼 수 있는 보화가 바로 화산의 비고였다.
하지만 막상 비고를 열 수 있게 되자 기쁘기보다는 덜컥 겁이 난다. 혹여 그 안에 그들이 원하는 것이 없을까 봐서다.
하지만 현상은 그런 현종의 마음을 고려해 주지 않았다.
"그래. 그럼 바로 지금 할 수 있겠느냐?"
"물론이죠."
"그래, 그러자꾸나. 장문인!"
"음! 알겠다!"
기호지세다.
현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 한쪽으로 가 벽에 걸린 족자를 젖히더니 벽을 살짝 밀었다.
그르르륵.
뭔가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현종이 손을 댄 부분이 안으로 쑥 밀려 들어간다.
"그, 그런 걸 다 보여 주셔도 되겠습니까?"
"비고 안에 무엇이 있든 간에 모두 가져올 것이다. 그럼 비고라는 곳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더 이상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다."
"장문인……."
현종은 지체 없이 기관 안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거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옆으로 밀려나며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크기의 입구가 드러났다.
"자, 가자꾸나."
"예."
방 안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백천 무리만은 차마 따라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머뭇대었다.
"이리 오너라."
"장문인. 저희는……."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이제 화산의 누구에게도 더 이상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다. 가자꾸나."
장문인의 마음을 짐작한 백천이 고민 끝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장문인."
입구를 통해 밑으로 내려가자 입구와는 달리 꽤 널찍한 복도가 나타났다.
'저번에 봤던 거기네.'
청명이 힐끔 위쪽을 바라본다.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린 곳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무척 어둡습니다."
"……원래는 이 복도에 야명주가 여럿 박혀 있었다."
"그건 어디 갔습니까?"
"때때로 돈이 생기지 않더냐?"
"……."
현영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 그게 여기에 있던 야명주를 팔아먹은 돈이었구나. 그런 줄 알았으면 좀 더 아껴 쓸 것을.
"저기다."
잠시간 걷다 보니 저쪽에 철로 만들어진 커다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이?"
"그래. 전대부터 내려오던 화산 장문인의 비고다."
"오……."
현영이 뭔가 찡하다는 듯이 문을 바라보았다. 어지러운 선이 마구 그어진 문이 기이한 느낌을 준다.
"이 문, 원래는 어떻게 여는 겁니까?"
"글쎄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 화산 장문인에게만 전해지는 특수한 무공을 익혀야 열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실전되었겠군요."
"모르지. 저 안에 있을지도."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모인다.
어차피 그들은 저 문을 열 수 없다. 이제 모든 게 청명의 손에 달린 것이다.
"그렇게 보시면 쑥스러운데."
어울리지도 않은 말로 너스레를 떤 청명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후우."
낮게 심호흡을 한 청명이 검을 들어 문을 겨눈다.
'살짝 힘든 척을 할까?'
얇아 빠진 만년한철 따위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잘라 버릴 수 있지만, 그랬다가는 또 과도하게 기대하겠지? 적당히 힘든 척하면서 여러 번에 걸쳐 잘라야지.
히힛!
"물러서세요."
"오냐!"
"부탁한다!"
장로들이 우르르 물러나자 청명이 가라앉은 눈으로 문을 겨눴다.
'일단 저 선들은 나중에 쓸데가 있을지도 모르니, 내버려 두고. 주변을 잘라야지.'
청명이 씩 웃으며 검강을 뽑아내었다.
"오오!"
"검강이구나!"
"잘한다! 잘해!"
청명이 지체 없이 문을 향해 검강 씌운 검을 날렸다.
일단은 세로로 길게 자르고!
까가강!
"응?"
까가강?
서걱이 아니라 까가강?
청명이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이 한철 문에 턱하니 걸려 있었다.
"어?"
이거 왜 안 잘려?
끙끙대며 검을 뽑아낸 그는 가까이 다가가 갈라진 곳을 들여다보았다. 이내 그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아니! 이 양반! 문은 왜 이렇게 두껍게 만들었어!"
"뭐라고?"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 아닙니다."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벽이랑 아래쪽은 그렇게 얇게 만들어 놓고 문은 이렇게 두껍게 만들어 놨다고? 이 얄팍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사실 비고의 앞쪽은 기관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두꺼울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의 청명은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옆을 파면 순식간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올걸!
등 뒤에 보는 눈이 많다.
"어려우냐?"
현종이 시들다 못해 죽어 가는 얼굴로 물었다. 청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앓는 소리만 내었다.
"끄응…….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그래. 청명아! 힘을 내거라!"
결국 한숨을 푹푹 내쉬고는 다시 검을 움켜잡았다. 그의 눈에 불꽃이 튄다.
"에라! 진짜!"
뭐 하나 편하게 가는 게 없네! 뭐 하나!
"으라차아아아아!"
카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아아아!"
카아아아아아앙!
"아오 진짜 내가 속이 터져서!"
캉! 캉! 캉! 캉! 카아앙! 카아아아앙!
청명이 검을 닥치는 대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 번에 자를 수 없다면 수십 번, 수백 번 베어 버리면 된다. 물론 검강을 뿜어내며 수백 번 검을 휘두르는 게 쉬울 리는 없지만 말이다.
"뭐 하나 도움되는 게 없냐! 망할 양반들!"
이거 만든 양반 두고 보자. 내가 꼭 잡는다! 내가 꼭! 뭐? 나는 선계에 못 들어간다고? 지옥에서 탈출해 주마!
눈과 입에서 불을 뿜어 대며 검을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그러기를 일각 남짓.
"끄흐으……."
풀썩.
끼이이이이이잉!
청명이 옆으로 쓰러짐과 동시에 문이 네모반듯하게 잘리며 반대쪽으로 쓰러졌다.
쾅!
"오오오오오오오!"
"열렸다!"
"청명아! 수고했다! 정말 고생했구나!"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은 청명은 그저 어두운 동굴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헐떡거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거……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하시네."
장문사형, 이 지독한 양반 같으니라고.
- 낄낄낄낄.
아, 웃지 말라고!
확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