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3)
"후우."
의약당 정리를 마친 운각이 소매로 이마를 훔쳤다.
내내 북적대던 곳이 한산해지니, 이제는 조금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굉장했지.'
그가 의약당에 들어온 이래 가장 큰 태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모든 의약당원은 물론이고, 장로들과 청명까지 한마음이 되어 자소단을 만들어 내지 않았는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커다란 업적을 그의 대에 이뤄 냈다는 생각에 절로 마음이 뿌듯해진다.
다만.
다행히 결과가 좋게 나와 더없이 기쁘기는 하지만…… 꽉 차올랐던 열기가 훅 빠 져버리니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꿈 같구나.'
저기 있는 한철 솥이 아니었다면, 이 모든 일이 꿈이라고 여겼을지도…….
"응?"
운각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허허허.
정말 꿈이었나. 한철 솥이 안 보이…….
"……."
운각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리고 이내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 한철 솥 어디 갔어?"
사색이 된 운각이 기겁하며 전각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둑이야아아아아아아!"
* * *
"내가!"
까아아앙!
"이 짓을!"
까아아아앙!
"대체 몇 번이나 해야 하는 거냐고!"
까아아아앙!
청명이 부들부들 떨며 한철 솥을 후려쳤다.
"끄으으응."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판 데 또 파고, 그거 메꾸고 다시 파고.
잘라 낸 거 구부리고, 그거 다시 펴서 붙이고.
똥개도 이렇게 훈련을 시키면 부아가 치밀어 주인을 문다. 사람인 청명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심지어 청명은 물 주인도 없다.
"끄으으으으응."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한철 솥을 후려쳤다. 일단 가져온 비급은 모조리 안에 넣어 뒀으니, 이제 이 솥만 펴서 붙이면 된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 일로 화산이 다시 한 발……. 아니, 두세 발 나아가게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일단 이놈의 솥!
"빌어먹게 단단하네! 진짜!"
까아아아앙!
검으로 자르고 벨 때는 그깟 만년한철이었지만, 주먹질로 펴려 드니 한 세월이다.
"끄응. 끝났다."
부득부득 기어코 솥을 다 펴 낸 청명이 한숨을 내쉬며 위쪽을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뚫린 구멍에, 이제는 둥근 철판이 되어버린 솥을 가져다 대니 얼추 맞아떨어진다.
물론 이제부터 시작이지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철판이 맞닿은 곳에 손을 가져다 댔다.
파아아아아앗!
이윽고 손에서 어마어마한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단단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는 만년한철의 끝부분이 조금씩 녹으며 흐물흐물해진다. 그는 열심히 그 부분을 문질러 이어 붙였다.
"아이고. 허리야."
만년한철을 녹일 만한 삼매진화를 뿜어낸다는 건 청명에게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삼매진화를 피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이 한철을 모두 붙일 동안 유지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한다, 이 망할 후손 놈들아!"
물론 한철을 이렇게 잘라 낸 건 다름 아닌 그였지만…… 그런 사소한 건 그냥 넘기기로 하는 청명이었다.
"끄으으으으읏차!"
눈에 불이 켜지는 만큼 손에서 피어난 불도 화르륵 커졌다.
"빌어먹을 화산! 내가 꼭 천하제일문파로 만든다!"
아니면 이 억울함을 풀 데가 없다.
"푸아아아앗!"
파 둔 곳을 다시 다 메꾸고 마침내 땅 위로 기어오른 청명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것들이 나는 이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태평하게 잠이나 처……."
응?
안 자네?
청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흙을 털었다.
화산 이곳저곳에서 다급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가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해도 모두가 자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주변부터 샅샅이 훑어라!"
"산 아래는 이미 장로님들이 뒤지고 있으니 우린 여길 살피면 된다. 혹시 도둑놈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 확실하게 살펴라! 확실하게!"
"……."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청명이 피식 웃었다.
'빨리 알아챘네.'
하긴, 솥이 없어졌으니 난리가 날 만도 하다.
그게 어디 보통 솥인가? 같은 양의 황금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만년한철로 만든 솥이다.
다음에도 자소단을 만들어야 하니 팔아먹지 못해서 그냥 뒀지만, 그걸 팔…….
"아니! 씨!"
뭔가를 깨달은 청명이 경기를 일으켰다.
그럼 다음에 자소단을 만들려면 이 짓을 다시 해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날 죽여라 이것들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빌어먹을!
한숨을 푹푹 내쉰 청명이 힘없이 몸을 둘렸다. 뭘 어쩌겠는가? 상황이 이미 이리되어 버린 것을. 미리 알았다고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못 해 먹겠네."
그리고 터덜터덜 화산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쨌건 할 건 다 했으니 내일 아침쯤 다시 올라와야지.
'그래도 내가 이 개고생을 하는데 너희도 같이 고생은 해야지.'
저 꼴을 보니 마음이 좀 풀리는 것 같다.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던 청명이 막 화산의 담을 넘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웬 놈이냐!"
"오?"
청명이 고개를 획 돌린다.
'내 기척을 찾았어?'
누군지는 몰라도 칭찬을 해 줘야…….
응?
달빛 아래 드러난 이의 얼굴을 본 청명이 놀라움에 눈을 치켜떴다.
'백상 사숙?'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백상이었다면 청명이 눈앞에서 걸어가도 그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소단을 복용한 덕인지, 신경도 쓰지 않았던 백상이 무려 청명의 기척을 감지한 것이다.
"호오. 나를 찾아낸 건 칭찬……."
"여기다! 여기! 여기에 도둑놈이 있다!"
"……."
아니, 거 새끼 성격 더럽게 급하네.
야, 인마! 어?
이런 데서 이리 만나면 서로, 어? 분위기도 좀 잡고, 어?
하. 이래서 요즘 것들은 안 돼. 나 때는 낭만이 있었는데! 낭만이!
하지만 낭만이고 나발이고, 백상이 소리를 친 순간 화산 곳곳에서 검을 뽑아 든 제자들이 개떼처럼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삽시간에 청명을 빙 둘러쌌다.
"오? 반응도 빠르고?"
기세도 흉흉하고?
뭔가 알 수 없는 뿌듯함이 느껴진다.
'크으. 내가 이것들을 여기까지 키웠구나.'
이제는 청명 없이 이들만으로도 웬만한 문파는 찜 쪄 먹을 기세다.
당장 저 종남 새끼들이랑 다시 붙여 놓으면 바닥에 쓰러뜨려 놓고 올라타 후려 깔 수 있지 않을까?
청명은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다가 살짝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 이쯤에서 자신감을 충전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흠. 화산의 제자들의 기세가 내가 예상한……."
"뭐래, 저 도둑놈 새끼가?"
"아가리 털죠? 도둑 새끼가 아가리 털죠?"
"지금 이 상황이 장난인 줄 아나? 대가리가 처맞고 퉁퉁 부어서 머리에 매화 하나 꽂아 봐야 정신 차리지?"
"……."
어…….
너희 그……. 어…….
하하하하.
'장문사형.'
사형이 저한테 왜 주둥아리 좀 다물고 다니라고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건 뭐 흑도 파락호 놈들도 아니고.
내가 하면 신나는데 남이 하면 빡친다.
청명이 살짝 솟아오르는 노기를 꾹 내리눌렀다.
"아니, 나는……."
"팔 자를까?"
"그럼 도망가잖아. 다리. 다리 하나 자르자."
"칼 갈아 놨는데 잘됐네. 이 새끼가 화산이 어딘 줄 알고. 지금 여기에 청명이가 있었으면 지금 살아도 산 게 아니야, 이 새끼야. 운 좋은 줄 알아."
"……."
저건 나를 칭찬하는 건가? 아니면 욕하는 건가?
청명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오늘은 본인이 상황이 좋지 않으니 그만 물러나겠다. 화산의 제자들은……."
"아니. 저 새끼가 지금 장난치나?"
"냅 둬. 개처럼 처맞으면 정신 차리겠지."
"야야. 이리 와 봐. 이리 와 봐. 울지 말고 이리 와 봐."
아니, 근데 이 새끼들이?
청명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이 새끼들이 내가 누군지 알……. 아, 알면 안 되지. 여하튼 어디 내 앞에서?
"……좋게 말할 때 놔줘라. 뒈지기 싫으면."
"참나. 우리가 뒈진단다, 얘들아."
"쯧쯧쯧. 저쯤 되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불쌍한 사람 괴롭히지 말고 빨리 때려잡아라."
우득.
청명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아아, 나의 탓이로다.'
내가 이 새끼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지 못했구나.
가히 바쁜 상황이지만, 후인들에 대한 가르침을 게을리해서야 어찌 선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바쁘더라도…….
우득. 우득.
청명이 목을 살벌하게 꺾었다.
'대가리 한 방씩은 날려 주고 갈 수 있지.'
그럼 좀 더 겸손해지겠지?
"그래. 그러니까 붙어 보자 이거지?"
"뭘 붙어, 인마. 넌 뒈졌어."
"하……. 하하. 그래."
누구 하난 뒈지겠지.
청명이 눈을 까뒤집었다.
그게 나는 아니겠지만!
청명이 막 저들에게 벼락처럼 달려들려던 순간이었다.
"비켜 봐라."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가 일순 행동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사숙이다!"
"백천 사형!"
"사형께서 오셨다!"
마치 싸우던 와중에 아빠를 발견한 아이들 같았다. 그러더니 돌연 청명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아. 이게 이런 기분이구나.'
보통 저 안쓰러운 눈빛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갔는데.
백천 사숙.
고생이 많았네. 오늘은 내가 살살 해 줄게.
백천은 조걸과 윤종, 그리고 유이설을 이끌고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눈을 반개한 채로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감히 이 야밤에 청정도량을 어지럽히다니. 화산은 외인이 함부…… 함부로……."
백천이 고개를 갸웃한다.
'뭐지?'
뭔가 위화감이 드는데.
아니. 분명 도둑 맞는데. 저 검은 야행복에 검은 복…….
"저, 저……. 저거?"
저거 어디서 너무 많이 본 놈인데, 저거?
아니! 저 미친 새끼가!
이제 하다못해 화산을 터네?
아니, 진짜 돌았나?
한눈에 청명의 정체를 알아본 백천이 기겁을 하며 뒤로 두 발 훌쩍 물러났다.
"사숙? 아니 왜……. 뭐, 뭐야, 저 새끼!"
조걸이 기겁을 하며 뭔가 말하려 하자 윤종이 눈치 빠르게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 아님. 저거 진짜 사람 아님."
유이설의 낮은 목소리가 그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아니. 저 새끼가 왜 저기에 있어?'
'진짜 미친 거 아냐? 며칠 안 보여서 평온하다 싶었더니. 뭔 생각으로 저러고 나타나?'
'저 새끼가 도둑인가?'
……그럼 훔쳐 가라 그래야지.
그게 싸게 먹힌다. 저 새끼랑 붙어 싸우느니 그냥 다 내주고 제발 좋은데 써 주기를 비는 게 낫다.
백천이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그들이야 저 모습에 익숙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제자들은 아직 청명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왜 안 가고 있어, 이 새끼야!'
청명의 능력이라면 여기서 빠져나가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런데 왜 저러고 버틴단 말인가.
빌어먹을 원시천존이시여!
적당히 좀 하십시다! 적당히 좀! 이런 상황에서 저보고 뭘 어쩌라는 말입니까?
고뇌에 빠져 있떤 백천이 재빨리 안색을 다듬었다.
"그…… 어. 그…… 도둑놈……. 아니, 도둑 분. 아, 씨바 못 해 먹겠네."
"예? 사형……?"
"아, 아니……."
당황하는 다른 제자들의 시선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백천은 필사적으로 청명에게 눈짓을 보냈다.
'가!'
'응?'
'가라고 이 새끼야! 빨리 가!'
'뭐라고?'
눈빛이 통하지 않는다.
'망했어.'
백천이 지옥 불에 떨어진 듯한 절망에 신음할 때, 윤종이 재빠르게 곁에 다가와 붙었다.
'어떻게 합니까?'
'난들 뭐 수가 있냐고! 저 새끼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저 새끼가 미친 짓 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입니까. 일단은 상황을 만들어 봅시다.'
윤종이 재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지금 제일 좋은 해결책은 적당히 청명이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내가 상대하마!"
윤종이 검을 세차게 뽑았다.
'싸우는 척하다 달아날 수 있게 적당히 크게 칼 한번 휘둘러 주면 된다.'
눈치 없는 놈이 아니니 알아서 달아나겠지.
결심을 굳힌 윤종이 지체 없이 달려들었다.
"타아아아앗! 각오해라 처……. 아니! 이 흉수 놈!"
그렇게 달려들면서도 그는 열심히 청명에게 눈짓했다.
'자, 청명아. 내가 칼을 휘두르면 그걸 맞받으면서 멀리 몸을 날리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눈빛은 청명에게 닿지 못했다.
갑자기 얼굴로 무언가가 가까워져 온다. 그러더니 세상을 시커멓게 물들이며 점차 커졌다.
그게 코앞까지 날아온 청명의 주먹이라는 걸 깨달은 윤종은 그 찰나의 순간, 흐뭇하게 웃었다.
'개새끼.'
퍼어어어어억!
"아아아아아아아악!"
윤종이 달려들었던 속도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튕겨져 나간다. 저 멀리 날아간 그는 이내 바닥에 처박혀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복면, 그러니까 청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칼질이야. 뒈지려고!"
"……."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백천이 슬쩍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
하늘 한번 우라지게 맑네.
눈물 나게.
"하하하하. 그럼 나는 이만. 더욱 정진하라 화산의 제자들이여. 하하하하하하하!"
"……."
복면인이 광소를 터뜨리며 멀리 몸을 날렸다.
"쪼, 쫓아라!"
"잡아!"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화산의 제자들이 부리나케 그 뒤를 쫓는다.
백천은 모두 비워 낸 듯 가만히 미소 지었다.
'좀 죽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차라리 내가 죽든가.
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