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252화 (252/1,567)

252화.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2)

"오늘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예. 그렇습니다, 소단주님."

황종의의 눈이 가늘어졌다.

"식사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

"차려 놓은 밥상을 문 앞에 두고 가라 하십니다. 다 먹은 상은 직접 내어 놓으시는 터라……."

"흐음."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청명이 차고앉은 방을 바라보았다.

"대체 뭘 하시는 건지……."

"방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거참."

문은 열릴 기미도 없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고 청명은 사흘째 저 안에서 단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청명 도장이면 이미 강호가 인정하는 고수이니 생리 현상쯤이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치더라도……. 그래도 사람일진대 답답하지도 않단 말인가?'

뭔가 중요한 일을 하는 것 같아 슬그머니 가 보기도 뭐하다.

"그럼……."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그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미치겠네 진짜!"

"……."

황종의가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방 안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고함에도, 황종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대답을 하고 있는 상인도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것도 사흘째구나."

"예, 소단주님. 삼 일 내내 저러고 계십니다."

"허어……. 거참."

황종의는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천재는 괴팍하다고 하니, 청명쯤 되는 이가 괴팍한 것이야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옆에서 그 괴이한 짓거리들을 지켜보고 있자면 황망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여하튼 식사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여라."

"예! 소단주님."

"……술도 잘 들여 드리고."

"예."

결국 그는 어떠한 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범인인 나로서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로구나.'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저 청명 도장이 움직일 때마다 화산은 어마어마한 이득을 얻어 왔다. 아마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움직일 때마다 풍운을 몰고 다니니, 가히 용이라 할 만하구나.'

"아아아아아아아악! 이게 왜 생각이 안 나냐고!"

청명이 제멋대로 나부끼는 종이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자신의 머리를 퍽퍽 후려쳤다.

그 한심한 꼴을 황종의가 보았다면 용 운운한 자신의 입을 후려치고는 바닥에 침을 뱉었을 것이다.

정작 청명은 지금 자신의 꼴이 얼마나 추할지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머리에 구멍이 뚫렸나!"

왜 구결이 생각이 안 나는가?

"끄으으응. 장문사형이 공부 좀 하라고 구박할 때 들을걸."

세상 사람들 절반쯤은 반드시 해 보는 후회를 다시 태어나서 하는 청명이었다.

하지만 이건 청명의 탓이라고 할 수 없다.

무공의 구결을 외우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상급무학쯤 되면 그 구결만 해도 두꺼운 서책 한 권 분량을 넘어간다. 그 모든 구결을 완벽하게 기억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의 능력으로 구결을 완벽히 기억할 수 있다면, 비급이라는 게 왜 필요하겠는가?

그러니 미칠 노릇이었다.

원래는 부족한 기억력을 비급으로 보완해야 하는데, 지금은 부족한 비급을 기억력으로 보안을 하는 상황이니 완전히 주객이 전도되어 있었다.

"아니! 이게 요렇게! 응? 요기서 요렇게!"

희한하지.

무학은 펼칠 수 있는데 구결을 모르겠다니.

완벽한 집을 지어 놓았지만 설계도를 잃어버린 상황이다. 그러니 집을 요리조리 뜯어 가며 설계도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아니, 왜 생각이 안 나냐고! 이 새끼는 왜 이렇게 머리가 나빠! 전생의 나는 안 이랬는데!"

청명이 분을 못 이겨 자신의 머리를 퍽퍽 후려쳤다. 그러다 돌연 우뚝 멈추고 눈을 빛냈다.

"어? 생각났다!"

거참 희한하지.

때리면 머리가 나빠져야 하는데 왜 오히려 구결이 생각난다는 말인가?

이러다가는 비급을 다 만들기도 전에 대가리가 깨질 상황이다.

"아오!"

그는 일단 부리나케 책상으로 달려가 지필묵을 들었다. 그리고 떠올린 구결을 미친 듯이 휘갈겨 써 내려갔다.

"그래! 이거지!"

한번 막힌 곳이 뚫리면 지금까지 고민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술술 나온다. 그러다가 다시 막히면, 스스로 구르고 때리고 발악한다.

이 짓거리만 벌써 사흘째였다.

덕분에 방 한구석에는 이미 완성된 비급들이 몇십 권이나 쌓여 있었다.

죽엽수(竹葉手).

태허장(太虛長).

매화산수(梅花散手).

태을지(太乙指).

낙화보(落花步).

등등.

혹여나 화산에 없는 무학만 들어가 있으면 의심을 살까 싶어, 지금 화산에 있는 무학도 굳이 새로 써 냈다.

"됐다!"

청명이 완성한 비급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암향표(暗香飄)]

많기도 많다.

"쯧."

그는 손에 든 서책을 비급 더미 위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 무더기를 바라보았다.

그래.

화산의 무학은 이토록 다채롭고 다양했다.

'생각하니 소름 돋네.'

자신이 되살아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무학이 실전 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생각하니 열받네, 이 새끼들."

쳐들어왔던 마교도 열받고, 그걸 도와주지 않은 구파일방 놈들도 열받는다.

"내가 이 원한을 잊을 것 같냐!"

나 청명이야, 이 새끼들아.

내가 지금까지는 바빠서 그냥 내버려 뒀지만, 니들 내가 잊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하나하나 대가리 다 깨 줄 테니까.

부들부들 떨던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다른 건 대충 다 됐고.'

청명의 눈에 깔끔하게 쌓여 있는 스물네 권의 책자가 들어왔다.

"하……. 이게 문젠데."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해도 이십사수매화검법부터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이십사수매화검법은 가장 나중으로 미뤄졌다.

그리고 이젠 미루는 것도 한계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다.

"어떻게 하지."

청명이 끄응 하고는 팔짱을 끼고 앉았다.

막혔냐고?

그럴 리가.

다른 무학은 모두 잊을 수 있지만 이십사수매화검법만은 아니다. 이 검은 화산의 근본이자 청명의 근본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구결을 모조리 읊어 낼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스물네 권의 도해를 모조리 그려 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시작하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뭘 줘야 하지?"

물론 줘야 할 건 이십사수매화검법이다.

문제는 청명이 아는 이십사수매화검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

하나는 화산에 오랫동안 내려오던 이십사수매화검법의 기본형.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청명이 만들어 낸, 변형된 이십사수매화검법이다.

이건 딱히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상승에 오른 검수는 기존의 검법을 재해석하여 자신에게 가장 맞는 방향을 찾아낸다. 청명은 이미 불혹에 이르기 전부터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변형했고, 마교와의 전쟁에서 스스로의 검을 거의 완성했다.

조금 더 실전적이고 조금 더 과격한, 매화검존 청명이라는 사람에게 가장 잘 맞는 형태로 말이다.

"끄으응."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화산에는 내 이십사수매화검법이 잘 맞아."

우선 그가 가르치기가 편하다. 그리고 배우는 속도가 기본형보다는 훨씬 빠르다.

무엇보다, 실전적이기에 타 문파를 상대할 때 훨씬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빠르고 효율적이다. 청명의 성정대로 말이다. 당장 화산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잘 맞는 검법이 없다.

그럼에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변형된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전수하는 것은 화산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검법이라면 고민도 하지 않는다. 무조건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을 전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십사수매화검법만은 아니다.

뭐랄까.

이걸 바꿔 버리면 더 이상 화산이 화산이 아니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도문에서 검법이란 단순히 적을 격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물론 검으로 도를 닦느니 어쩌니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을 생각까지는 없지만…….

'정기는 담겨 있단 말이지.'

화산의 검이 추구하는 개화(開花). 그 정신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검술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이다.

어설프게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변형한다면 화산의 검이 가진 정기마저 흐려질지 모른다.

"끄으으으응."

피가 나기 직전까지 머리를 벅벅 긁어 대던 청명이 이내 손을 툭 떨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 하지."

근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새로이 나아갈 것인가.

그는 고민 끝에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사형. 장문사형. 뭐 어떻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수?"

허공에 대고 질문을 던지자, 청문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 뭘 쓸데없는 걸 고민하고 그러느냐. 너답지 않게.

"내가 사형이 있었으면 고민도 안 하우. 나 혼자 하니까 고민을 하는 거 아뇨! 나중에 잔소리 들을까 봐!"

나쁜 양반들.

이왕이면 같이 와서 도와줄 것이지. 사람 혼자 보내서 다 하게 만들고. 어휴.

- 뭐가 고민이더냐?

"선조들이 내려 준 검술을 변형하는 게 맞는가 싶수다."

- 둘 다 주면 되지 않느냐?

"뻔히 알면서 뭔 그런 소리를 하쇼. 둘을 주면 둘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겠지. 백 년쯤 흐르면 어느 걸 익혀야 하는가로 파벌이 나뉠 거요."

사람이란 게 다 그런 거니까.

청명은 물론 지금 화산의 제자들을 믿는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뒤에 입문할 제자들은 청명이 통제할 수 없다.

그들마저 모두 이끌어 내려면 검을 둘로 나누는 건 좋지 않은 방법이다.

- 그럼 뭐가 고민이라고?

"아, 진짜! 선조들이……."

- 네가 선조 아니냐?

"……네?"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 소리지?

- 선조가 따로 있느냐? 먼저 들어 먼저 배우면 선조지. 저들에게는 네가 선조 아니더냐?

"……."

어라?

잠깐만. 그게 그렇게 되나?

- 고민할 것 없다. 너의 뜻이 선조의 뜻이고, 너의 의지가 선조의 의지다. 아니, 너의 뜻이 화산의 뜻이고, 너의 의지가 화산의 의지다. 그저 네가 원하는 대로 행하거라.

"아니, 그래도……."

- 그게 도 아니더냐?

청명이 눈을 찌푸렸다.

"진짜 괜찮은 거죠?"

- 세상은 흐르고 흐른다. 바뀌고 변화하고 또 흘러가는 것이 세상이다. 그리고…….

청문이 부드럽게 웃는 것 같다.

- 지금의 화산에는 네가 흐르고 있지 않느냐. 네 안에 화산이 흐르듯이 화산에는 네가 흐른다. 원대로 행하거라.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화산이니라.

이윽고 목소리가 멀어져 간다.

"쯧."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붓을 잡았다.

어차피 저 목소리가 진짜 청문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건 청명도 알고 있다. 그의 본심이 청문의 이름으로 하는 말이다.

"그래, 말은 맞는 말이지. 내가 선조지! 선조가 따로 있나!"

물론 나중에 선계에 올라가면 개파조사님한테 질질 끌려가서 회초리를 맞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선계 안 가면 그만이지!"

마침내 청명은 눈에 불을 켜고 빈 책을 펼쳐 들었다.

이곳에 그의 심득을 남긴다.

화산의 검이자 청명의 검.

이는 동시에 그의 무학을 다시 한번 정립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청명이 자신의 앞에 쌓여 있는 책자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글쎄. 잘 모르겠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집필하면서부터는 시간을 거의 잊었으니까.

그는 쌓인 비급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완벽하게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됐다. 부족한 부분은 후대들이 완성해 갈 것이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무학을 다시 진전시키고, 없었던 허점을 찾아내 보완하고, 그러면서 발전해 나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어 낸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그러니 미련은 가지지 말자.

그보다…….

"이거 어떻게 가져가지?"

이만한 거 싸 들고 가면 분명히 이상하게 보일 텐데?

"으음."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청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음."

황종의가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달도 그믐이라 어둡기 짝이 없었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 이렇게 화음 지부를 한 바퀴 도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화음 지부도 정말 많이 커졌구나.'

본래는 조금 무리한 일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제는 화음 지부를 만든 아버지의 선견지명에 찬탄하게 된다.

게다가 이번에 화산에서 벌이는 차 무역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면 화음 지부가 오히려 은하상단 본단보다 더 커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화산과의 관계……. 응?'

생각에 잠겨 있던 황종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칠 주야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청명의 방문이 마침내 천천히 열리는 걸 본 것이다.

"아 드디……. 어?"

반가움에 살짝 펴졌던 그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굳어졌다.

열린 문으로 누군가 터덜터덜 걸어 나온다.

검은 야행복.

얼굴을 가린 검은 두건.

그리고 등 뒤에 맨 커다란 봇짐…….

'도둑?'

아니, 저기서 도둑이 왜 나오나? 도둑이 아니라 도둑 할애비가 와도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인데.

어안이 벙벙하여 소리를 질러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그를 발견한 도둑이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서, 설마…… 처, 청명 도장?"

"네."

"그, 그 복장은 뭡니까?"

"아?"

청명이 슬쩍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더니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저 잠깐 다녀올게요."

어딜?

야, 이 미친놈아! 그렇게 입고 대체 어딜 가는데?

"어, 어딜 간단 말이오? 이 야심한 밤에?"

"화산에 잠깐 들렀다 올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아. 아침밥은 넣어 주세요. 그 전에 올 거니까. 그럼!"

청명이 해맑게 손을 흔들고는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이 화산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진 뒤, 황종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잊자.'

그냥 꿈이라고 생각하자.

그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

……저 미친놈.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