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1)
"안 된다고?"
"……."
"방금 네 입으로 한철을 자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안 된다니?"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혀는 눈보다 빠르니까.
"그, 그렇죠."
"그게 무슨 말이더냐? 자를 수 있다는 게냐, 없다는 게냐?"
"자, 자를 수 있죠."
"으음?"
현상이 고개를 갸웃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좀 확실하게 말해 보거라. 왜……."
그 순간 현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럽니까!"
"……내, 내가 언제?"
"애 경기 일으키니까 입 다물고 계십시오!"
"……."
현영이 혀를 두어 번 차더니 고개를 청명에게로 돌렸다. 짜증만 한가득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화사하게 피어나는 과정을 보자니 어쩐지 소름이 돋는 청명이었다.
"그래, 청명아. 이유가 있겠지?"
"그, 그렇죠?"
"그럼 그 이유부터 들어 보자꾸나."
아아.
현영 장로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도인의…….
응?
후광은 불교라고?
……여하튼.
"크흠."
청명이 목을 가다듬었다.
"아, 물론 한철은 자를 수 있죠. 당연히 자를 수 있죠. 그러니 제가 솥을 만들었죠."
"그래, 그래."
"그런데 그 솥을 만들면서 워낙 고생을 했더니 원기가 크게 상했거든요."
"으으음?"
현영이 눈을 크게 떴다.
"내상이라도 입었다는 말이더냐?"
"어, 그게…… 자소단을 만들면서도 내력을 워낙 쏟아붓다 보니……."
"그렇지, 그렇지! 무리를 했구나!"
"네! 바로 그렇죠!"
청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순간 현영이 이상하다는 듯이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원기가 상했다면 왜 자소단을 먹지 않았느냐?"
……거 예리하시네.
"아. 저는 아직 안 먹었어요."
"그럼 얼른 자소단을 먹고 회복하거라. 뭐가 문제더냐."
"어……. 그게."
청명이 눈알을 뒤룩뒤룩 굴렀다.
일단 무슨 말이든 해서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 보자!
"이번에 자소단을 복용하면 또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좀 더 몸을 정양하고 조심히 복용하려고요."
"오오!"
"또 나아가다니! 세상에!"
감탄하지 마!
그런 거 없어!
청명의 이마에 삐질삐질 땀이 돋아난다.
아니, 상황이 왜 이런 식으로 풀리냐고!
세상에…….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이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현종이 상황을 말끔히 정리했다.
"그럼 몸을 정양하고 자소단을 복용해 내상을 회복해야 한철을 자를 수 있다는 말이구나."
"예. 정확합니다, 장문인."
"그럼 몸을 정양하는 데 며칠이나 걸리겠느냐?"
"어……. 그게 한 칠 주야 정도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나?"
청명이 단전께를 움켜잡았다.
"제가 말은 안 했는데…… 이게 정말 내상이 극심하여……."
청명이 아프다는 듯 인상을 쓰자 현영이 곧바로 눈알을 까뒤집으며 게거품을 물었다.
"이 녀석! 내상을 입었으면 바로 말을 했어야 할 것 아니더냐!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좋아만 하고 있었구나! 어디더냐? 많이 아프냐?"
어?
그렇게 심각하게 나오면 안 되는데?
그런데 심지어 현영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현종과 현상 역시 더없이 심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명아."
"예, 장문인."
"네 몸을 돌보지 않고는 그 어떤 일도 의미가 없단다."
"……."
"내가 말한 것은 잊고 어서 돌아가 정양에 들거라. 시간은 얼마든지 걸려도 좋다. 괜히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기를 끌어 올리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다. 다른 장로들도 앞으로 괜한 말을 하여 청명에게 부담을 주는 일 없도록 하거라!"
"예, 장문인!"
어…….
괜히 심각해진 분위기를 보며 청명이 어색하게 웃었다.
'진짜 엿 됐는데?'
이거 어떡하지?
"저기 오는 것 같은데?"
조걸이 백매관으로 달려오는 청명을 보며 피식 웃었다.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건지."
"물어보면 되겠지."
입구를 반쯤 막아선 조걸이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청명을 향해 손을 살짝 들었다.
"청명아. 장문인께서……."
"비켜!"
휘익!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청명이 입구를 막고 있는 조걸을 저 멀리 던져 버리고는 백매관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윤종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뭔 일이지?'
저놈이 저리 다급해하는 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멀리 날려진 조걸에는 전혀 안중에도 없고, 저렇게나 급박하게 구는 청명에게서만 불안함을 느끼는 윤종이다.
이윽고.
쿵! 쿵! 쿵!
거친 발소리와 함께 청명이 백매관 입구에 다시 그 얼굴을 내밀었다.
윤종이 떨떠름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아."
"응?"
"무슨 죄를 지었느냐. 이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 보거라. 내가 함께 빌어 주마."
그도 그럴 게, 커다란 봇짐을 짊어지고 나온 꼴이 딱 야반도주를 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지금이 야밤은 아니지만 말이다.
"사형."
"그래. 어서 말해 보렴."
"나 며칠 내려갔다 올게."
"……어딜?"
"화음에서 한동안 몸 관리 좀 할 테니까 찾지 마! 찾아오지도 말고!"
청명아, 잘 생각해 보려무나.
정신이 나간 놈이 아니고서야 굳이 너를 찾으려 들지 않는단다.
"장문인께 말씀은 드렸니?"
"응!"
"그래. 그럼 잘 다녀오렴."
이왕이면 안 와도 좋고.
꼭 생각해 봐라 청명아. 화산 밖이 더 행복할 수도 있잖니.
"그럼 간다!"
"……어, 그래."
청명이 두말없이 산문으로 달려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윤종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참 좋은 일이건만.'
청명이 며칠 떠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산에는 봄이 오겠지.
하나.
화산에 봄이 온다는 말인즉, 어딘가에는 겨울이 온다는 소리렷다.
윤종이 살짝 눈을 감고 겨울을 맞을 이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 * *
은하상단 화음지부.
쾅!
"웬……."
'웬 놈이냐?'
하고 당당하게 외치고 싶었건만, 안타깝게도 황종의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도장이 여기서 왜 나오시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문을 부숴 버릴 듯 걷어차고 들어온 이가 잘 아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그가 소도장이라 부르던 인물.
하지만 이제 더는 그렇게 부를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청명이었다.
"화산신룡 소협이 아니시오?"
"이상한 별호 부르지 말고 그냥 청명이라고 해 주세요."
"……어디 그럴 수 있겠소?"
황종의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가 청명을 만난 지는 불과 이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이 년 사이 청명의 위상은 가히 어마어마할 정도로 높아졌다.
천하제일 후기지수.
화산의 신룡.
화산이 낳은 검의 귀재(鬼才).
사람들은 그 외에도 수많은 수식어들로 청명을 일컫고 있었다. 어쩌면 청명의 달라진 위상을 가장 실감하지 못하는 이들이 당사자와 화산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화산의 영향력이 큰, 이곳 화음에서도 이제는 청명의 이름이 화산 장문인인 현종보다 더 유명하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문제가 있다면, 명성에 비해 사람 자체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단 점이었다.
초지일관한 것은 보통 좋은 뜻으로 쓰이기 마련이지만, 그 초지일관과 청명이라는 두 글자가 만나면 서글픈 상승작용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로……?"
"방 하나 주세요."
"……방?"
"네."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이 있는데 화산에서 하기는 좀 그래서요. 방 하나 주시고 아무도 접근시키지 말아 주세요."
"……어렵지 않은 일이지요."
일단 청명이 하자는 건 웬만하면 토를 달지 말고 그대로 진행하라는 황문약의 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명이 없었다 해도 황종의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천하의 화산신룡이 방을 내어 달라는데 거절할 곳이 천하에 몇 곳이나 되겠는가?
저 소림이라도 일단 방부터 내어 주고 대책을 생각할 것이다.
다만 굳이 문제를 하나 찾는다면…….
"식사는 삼시 세끼 때맞춰서 기름지고 영양가 높은 걸로 부탁드릴게요. 술은 최고급으로! 아, 밤에는 술 한 병 더 넣어 주셔도 괜찮아요. 아니, 두 병으로!"
"……."
저 새끼가 도인이라는 점이겠지.
"그것만 있으면 되는 거요?"
"다른 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밥이나 챙겨 주세요."
"으음. 일단 알겠소.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리다."
"아…… 그리고!"
"음?"
청명이 배시시 웃었다.
"급하게 내려오느라 돈을 안 가져왔는데 돈 좀 주세요."
"……."
저 새끼가 도사다.
저 새끼가 도사야.
황종의의 안내를 받아 방을 차지하고 앉은 청명은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고 거듭 신신당부한 뒤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짐을 풀어 미리 준비해 온 빈 책자와 지필묵을 꺼내 들었다.
"끄으으응. 앓느니 죽어야지!"
끔찍한 상황이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좋은 기회다. 장문인의 비고 안에서 이십사수매화검법이 발견되는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비고를 뚫고 들어와 비급을 놓고 돌아가는 정신 나간 미친놈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여기 있다는 게 문제지.'
청명이 앓는 소리를 내고는 쫘악 펼쳐진 책들을 바라보았다.
'그냥 대충 비급을 던져 놓는 것 정도로는 안 돼.'
아무리 은연중에 청명이 화산의 최고수로 인정받는다고 해도 신분 자체는 막내나 다름없다.
그런 청명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을 가르치면 아무래도 모양새가 이상해진다.
그러니 비급만으로도 운검이나 현상이 웬만큼은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좋다. 그럼 그들의 가르침을 통해 자연히 모두가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전수받을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하, 미치겠네. 걔들이 진짜 비급만 보고 이걸 이해할 수 있을까?'
왜 이십사수매화검법이 화산의 정화이자 화산의 대표 무공으로 불리겠는가?
비슷한 검문인 무당만 보더라도 태청검법(太淸劍法)은 물론이고, 양의검법(大兩意劍法)이나 조양검(朝陽劍)등 수많은 상급 검법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화산은 오직 이십사수매화검법 하나로만 버텼다.
좋게 말하면 근성 있고, 나쁘게 말하면 무공도 한 우물만 파는,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문파다.
어째서?
그만큼이나 이십사수매화검법이 난해하기 때문이다.
약관에 들어 배우기 시작해도 불혹에 이르러서야 겨우 완성이 뭔지나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이십사수매화검법이다. 그 윗 단계가 없는 게 아니라 평생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익히고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청명은 바로 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저들에게 올바로 전수할 의무가 있었다.
"비급으로는 안 돼."
비급만 던져 주고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익히라 하는 것은 장님에게 은자 하나를 쥐여 주고 해남도를 찍고 돌아오는 길에 당과 세 개도 챙겨 오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니 그가 지금 만들어야 할 것은 비급이 아니라 이십사수매화검법의 도해(圖解)였다.
한 초식당 한 권.
모두 스물네 권!
이걸 최대한 빨리 만들어 내야 한다.
"끄으으응."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전생에는 붓을 잡는 일이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는데, 이번 생에서는 벌써 몇 권을 써 대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해야 돼!"
이왕 하는 것 완벽하게!
당소소가 봐도
'아! 이게 이런 뜻이구나!'
하고 바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세세하게!
스윽. 스윽. 스으윽!
청명은 신중한 자세로 먹을 갈기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기회에 무고 다시 채운다!"
그의 눈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십사수매화검법만이 아니다.
당장 기본을 익히는 게 중요했기에 화산에 전해 주지 못했던 무학들도 이 기회에 모조리 비고 안으로 쑤셔 박아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자연스레 무학을 넘겨줄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후욱!"
짧게 호흡을 끊어 낸 그는 빈 서책을 펴 들고는 가공할 속도로 여백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반듯한 자세로 끊임없이 글을 써 내리는 그의 눈이 몽롱하게 풀려 나간다.
슷. 스읏. 슷.
이내 방 안에는 오직 그의 숨소리와 붓과 종이가 스치는 소리만이 작게 또 작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