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아직은 그리 말하지 마라. (5)
파아아앗!
"더 빠르게!"
파아아아아앗!
"그렇지!"
운검이 더없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자소단의 효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이래서 영단, 영단 하는구나.'
제자들의 검에 실리는 기운이 이전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였다.
그 날카로운 예기에 수련 사범인 운검조차 흠칫할 때가 있으니 그 효과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물론 운검도 자소단을 복용하고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었지만, 어린 제자들은 더 큰 효과를 보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 활력이 넘치겠는가?
위이이이잉.
'검기?'
몇몇 제자들의 검 끝에 검기가 어리는 것을 본 운검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세상에…….'
물론 검기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백천이라면 지금쯤 검기뿐만 아니라 검강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청명이 놈은 굳이 말해 봐야 입만 아프고!
하지만 이곳에 있는 평범한 제자들이 수련 중에 무의식적으로 검기를 뽑아낸다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그만큼 제자들의 수준이 수직상승 했다는 뜻이 아닌가?
'허허허허. 화산의 홍복이로고.'
운검은 달아오른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오늘 밤에는 오랫동안 끊었던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게 다 청명이 그놈 덕분이지.'
처음 청명이 나타나서 그에게 슬그머니 거래를 청했을 때는 얼마나 황당했던가?
나이도 가장 어리고, 입문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녀석이 사형들을 다 때려잡고 강제로 훈련을 시키는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의 기분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잊지 못할 것이다.
'옳은 선택이었어.'
도박하는 심정으로 청명에게 삼대제자들을 맡겨 본 것이 정답이었다. 그 작은 선택 하나가 결국에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날이 강해지는 제자들과 발전하는 화산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지경이다.
다만…….
운검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한 가지 문제가 마음에 걸린다.
고민에 잠긴 채로 제자들을 보던 운검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다들 수련을 계속하고 있거라."
"예, 관주님!"
우렁찬 대답에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당연하게도 장문인의 처소였다.
* * *
운검이 살짝 어색한 얼굴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군.'
이십 년은 젊어진 듯한 현종을 보고 있으니 자꾸 어색한 웃음이 난다.
물론 예전의 모습이 기억에 있으니 그리 낯선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그때와는 또 다르단 말이야.'
단순히 젊어졌다기보다는 사람 자체가 조금 맑아졌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변화였다.
"그래. 무슨 일이더냐?"
현종이 살짝 의외라는 눈으로 운검을 바라보았다.
그와 많은 일을 상의하는 운암과는 다르게 운검은 어지간한 일로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스스로의 검을 갈고닦는 것만으로도 벅차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운검이 장문인뿐 아니라 다른 장로들까지 함께 뵙고 싶다는 청을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현종은 운검의 말을 기다리며 살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장문인."
"그래, 운검아."
"아이들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검술이 없습니다."
"……."
현종이 미간을 좁힌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이들은 나날이 발전하는데, 도무지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이대제자들과 삼대제자들은 태을미리검이나 복호청양검은 물론이고, 최근에 다시 되찾은 칠매검까지 모두 전수를 받았습니다."
"……그렇지."
"본래라면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나……."
현종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구나. 다음이 없구나."
기본적으로 명문의 제자들은 서른이 되기 전에 문파의 최상위 검술까지 전수받는다.
하나, 화산에는 그다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화산에 전수되는 검술 중에선 칠매검이 가장 뛰어났다. 과거에는 그저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익히기 전에 거쳐 가는 단계였던 칠매검이 말이다.
운검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자소단을 복용하기 전까지는 어찌어찌 버틸 수 있었습니다. 전수가 끝났다고는 해도 아이들이 칠매검을 완벽히 익혀 낸 것은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훨씬 강한 육체를 가진 아이들이 과거와 같은 검술에 만족할 리가 없다. 이제는 슬슬 더 강한 검술에 목마를 때가 되었다.
그 모든 사정을 이해한 현종이 한숨을 내쉰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과거의 화산이라면 고민할 것도 없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을 가르쳤을 것이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이야말로 화산의 정화이자 근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당연히 화산 검학의 끝은 아니지만, 화산의 제자라면 누구라도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나 지금의 화산은 그것과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는 검학까지도 모조리 잃어버렸다.
"끄응. 이런 문제가……."
"없는 걸 뭐 어떻게 하란 말이더냐?"
현영이 살짝 짜증이 난 목소리로 툴툴댔다.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하지만 이제는 도무지 외면할 수 없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현종이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흐으음."
검법이라.
운검은 단순히 아이들이 더 좋은 검을 얻지 못하면 불만이 쌓일 거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이건 문파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결국 화산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 한다면 상승의 검학은 반드시 필요하다. 검술이 없는 검문이 무슨 수로 명문의 반열에 든단 말인가?
"이제 더는 외면할 수가 없구나. 그동안은 이런저런 일 때문에 미뤄 왔던 일이지만, 이제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현종의 말에 모두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견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말해 다오. 아무리 황당한 것이어도 괜찮다."
"예, 장문인."
다들 진지하게 고심하기 시작했다.
하나 워낙 답이 없는 일이다 보니, 쉽사리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음."
가장 먼저 의견을 낸 사람은 현상이었다.
"장문인."
"그래. 말해 보거라."
"제 생각입니다만, 없는 것을 찾을 게 아니라, 차라리 무학을 새로 창안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창안?"
현종이 눈을 찌푸렸다.
"그게 되겠느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실전된 무학을 찾아내는 것보다는 훨씬 쉬울 겁니다."
"헤헹! 거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십쇼, 사형!"
현영이 코웃음을 쳤다.
"안 될 게 뭐가 있느냐? 우리는 자소단도 복원했잖은가?"
"사형이 만들었습니까?"
"……."
현영이 도끼눈을 떴다.
"청명이 놈이 한 일을 우리가 한 걸로 착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화산이 발전한 게 아니라, 그냥 청명이 놈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발로 꽹과리까지 치고 있는 것뿐입니다! 사형이 뭘 했다고 뿌듯해하십니까!"
"크흐흠."
현상도 할 말이 없는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무공은 뭐 나와라 하면 뚝딱하고 나온답니까? 그거 누가 만들 겁니까? 사형이?"
"……."
"아니면 운검이가?"
운검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무학이 장난입니까? 우리가 전부 달려들어서 머리를 싸매면 칠매검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육합검도 안 나옵니다! 애초에 그렇게 쉬운 거면, 뭐 그럼 소림은 매화검법 정도는 지금도 척척 만들겠네!"
현상이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헛기침을 했다.
"내가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복원하자는 게 아니잖으냐. 그저 칠매검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하지만 이내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반응이 영 좋질 않았다.
그래, 좀 너무 나가기는 했지.
그때 현영이 고개를 획 돌려 현종을 바라보았다.
"이럴 게 아니라, 청명이 부릅시다."
"……응? 청명이는 왜?"
"거 뜀박질하다가 넘어져서 칠매검을 찾아내는 놈인데, 곡괭이 하나 쥐여 주고 여기저기 파 보라고 하면, 이십사수매화검법만 나오겠습니까? 더 대단한 게 나올지도 모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저 말이 진심이라는 점이다.
현영의 눈에 일말의 장난기도 없다는 걸 확인한 현종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러다 청명교라도 만들고 눌러앉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청명이가 뭔 도깨비도 아니고 뭘 그렇게 뚝딱 만들어 내느냐?"
"도깨비가 청명이 보면 형님 해야지요! 그리고 진짜 도깨비일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도 보십시오! 한철 솥이 필요하다니까 뚝딱 만들어 오지 않았습니까? 도깨비도 그런 일은 못 합니다."
"아니, 그건……."
뭐라 말을 하려던 현종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잠깐……."
짧은 시간 동안 현종의 얼굴이 여러 번 변했다.
"한철 솥. 그래……. 그래! 한철 솥!"
"엥?"
현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가서 청명이를 불러 오거라! 지금 당장!"
"예!"
운검이 깜짝 놀라 방을 박차고 나갔다.
"새로운 무학이요?"
"그렇다."
"……."
청명이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얘들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네.'
안 그래도 청명 역시 슬슬 다음 검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걸로 보아 이들 역시 착실하게 다음 과정에 대해 고민을 했다는 뜻 아니겠는가?
안 그래도 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전해 줘야 하는지 골치가 아팠는데.
"그런데 왜 그걸 저한테 말하세요?"
물론 그런 티를 내서는 안 되겠지.
"청명아. 너 곡괭이 하나 들고 여기저기 파 봐라. 혹시 아느냐 뭐 하나 또……."
현상이 말없이 현영의 입을 틀어막고 잡아끌었다.
"읍읍!"
그러더니 몸부림치는 그를 금세 제압해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청명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에이. 쉽게 풀릴 수 있었는데.'
거 도움이 안 되네, 저 양반.
"그래서 말인데, 청명아."
"예."
현종이 청명을 가만히 보며 물었다.
"너 말이다. 그 한철 솥……."
청명이 움찔했다.
그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지? 설마……?
"그 한철 솥을 어떻게 만들었느냐?"
"예?"
청명은 일단 질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척 되물었다. 그리고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이걸 어떻게…….
"잘라 구부린 것 아니더냐?"
"아……. 네, 그렇죠!"
청명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철을 어디서 구했냐는 말이 나왔으면 한 편의 대서사시를 쓸 뻔했는데 그나마 방향이 이쪽이라 다행이었다.
"그럼 네가 한철을 자를 수 있다는 말 아니더냐?"
"하하하하. 뭐 이제 와 새삼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 청명입니다! 청명!"
이제는 굳이 무위를 숨길 생각도 없는 청명이었다.
어차피 그가 당가주와 비무를 하고, 당외를 때려잡고, 묵린혈망까지 혼쭐을 내 주었다는 보고가 다 들어갔는데, 이제 와서 겸양을 떨어 뭐 하겠는가?
차라리 즐기…….
"그렇지! 그래, 한철! 만년한철을 자를 수 있다 이 말이렷다!"
화색을 띤 현종을 보며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 말을 하려고 그러지?'
현종이 희희낙락하며 말을 꺼냈다.
"내가 그동안은 너희에게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화산에는 전대의 장문인들이 대대로 써 온 비고가 있다."
"예?"
"그런 곳이 있었습니까?"
"하나 아쉽게도 그 문을 여는 방법이 실전된 상태다. 게다가 문은 물론이고 창고 전체가 만년한철로 만들어져 지금까지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모두의 얼굴에 기대감이 어렸다.
지금 현종이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대대로 장문인이 쓰던 창고라면, 문파의 중요한 물품을 모아 두었을 것.
그렇다면 이십사수매화검법은 물론이고 화산 고유의 상승 무학의 사본이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럼 거길 열면 되겠군요!"
"그래! 청명이가 한철을 자를 수 있다고 했으니까!"
모두의 시선이 청명에게 모였다.
"……."
하지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색이 되어 버린 청명의 얼굴이었다.
"자, 장문인의 그…… 장문인의 창고요?"
"그래!"
"거, 거길 열고 들어간다고요?"
"자르고 들어가는 거지. 네가 한철을 자를 수 있으니까!"
"하하…… 하. 진짜 좋은 방법이네요. 거참, 그거……."
얼굴이 허옇게 뜬 청명이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그거 바닥 잘라서 솥으로 썼는데…….
그리고 이내 흐뭇하게 웃었다.
'망했다.'
장문사형!
살려 줍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