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246화 (246/1,567)

246화. 아직은 그리 말하지 마라. (1)

"다 됐다!"

"오오!"

현자 배들이 탈진하여 뒤로 주저앉았다.

그들 앞에 깔린 비단 천 위로 은은한 자색을 띤 영단들이 열 맞춰 놓여 있었다.

"아……."

현종은 감격에 젖어 말을 잇지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로 완성된 것이더냐?"

현영의 물음에 운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췌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 아래로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완성입니다. 본래 만들려던 혼원단과는 분명 뭔가 좀 다른 것 같지만……."

그렇겠지.

혼원단은 저리 자색을 띠지 않으니까.

"하나, 효능은 혼원단 이상인 게 분명합니다!"

"오!"

현상이 감격에 겨운 눈으로 혼원단……. 아니, 자소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감격보다 이치를 먼저 따지는 이도 있기 마련이다.

"그걸 어찌 아느냐?"

"예?"

운각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현영이 묘한 눈으로 운각을 꼬나보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효능을 알 수 있느냐? 네가 만든 것도 아니고, 완성은 청명이 했는데 네가 어떻게 효능을 확신하느냐?"

"아…… 그게……."

운각이 살짝 어물쩍거리자 현영의 눈빛에 의심이 서렸다.

"설마……?"

그러자 운각이 제 발 저린 듯 울컥하여 소리를 질러 댔다.

"에이! 진짜 개미 눈곱만큼만 먹어 봤습니다! 요리를 해도 간을 보는데 저도 효능을 알아야 판단을 내릴 것 아닙니까!"

"저, 저! 어디 이놈이 뚫린 입이라고!"

청명에게야 세상 온화한 현영이지만, 다른 이들에게 현영은 여전히 화산에서 가장 무서운 어른이었다.

그런 그가 도끼눈을 뜨자 운각이 찔끔 목을 움츠렸다.

그러자 현종이 빙그레 웃으며 그런 현영을 만류했다.

"틀린 말은 아니잖으냐?"

"제깟 놈이 먹어 보면 안답니까?"

"됐다. 의약당주가 고생을 많이 하지 않았느냐."

"쯧."

여전히 언짢은 기색이 확연했지만 현종의 말을 듣지 않을 순 없기에 현영은 마지못해 눈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현종이 운각을 보며 물었다.

"그래. 효능은 어떻더냐?"

그러자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운각이 공손히 답했다.

"워낙 미량을 섭취한 터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절대 혼원단보다 그 효능이 떨어지지는 않으리란 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제대로 된 한 알을 먹어 보면 확신할 수 있을 듯한데, 마침 한 알을 더 만들기도 했으니 제가 먹어 보면……."

"허허허. 이미 완성된 것인데 미리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

"아니 그래도 한 알만……."

"허허허허."

"……."

현종이 대답 없이 너털웃음만 터뜨렸다.

절대 한 알 더 줄 일은 없다는 뜻이다.

운각이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그래……. 그런데 단환이 혼원단보다는 좀 작아 보이는구나."

"제자들의 수대로 정확하게 배분하려다 보니, 조금 작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으음. 그렇더냐?"

"한 번에 구할 수 있는 자목초의 양이 워낙 적습니다. 게다가 다른 재료들도 자목초에 비해서는 구하기 쉽다뿐이지, 대량으로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음. 그렇지.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실망하실 건 없습니다, 장문인. 이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소림에서 대환단을 반씩 쪼개서 제자들에게 전부 나눠 먹인다는 소리를 들어 보셨습니까?"

"그야 당연히 들어 보지 못했지. 대환단이 어떤 영단인데."

운각이 씨익 웃었다.

"적어도 그 정도 효능은 나올 것입니다."

"……."

현종이 살짝 눈을 부릅떴다.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문파인 소림에서도 대환단은 무가지보나 다름없는 영단이다.

그렇기에 소림도 대환단은 아무렇게나 사용하지 못한다. 소림의 이름을 천하에 떨쳐 줄 것이 확실한 후기지수에게 상으로 내리거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이를 구하는 데나 사용된다.

그러다 보니 평생을 소림의 이름 아래 살아가는 무승들도 대부분은 대환단을 구경조차 해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음, 그리 생각하니 어마어마하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가장 걱정했던 빙정을 은하상단에서 구해 주었으니까요. 다만 아쉬운 건, 중원에 풀려 있던 빙정을 모조리 쓸어 오다 보니 한동안은 다시 연단에 쓸 만큼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빙정 외에도 인형삼(人形蔘)이나 공청석유도 거의 씨가 말랐다 하니……."

"으음. 알겠다."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자소단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종은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과한 욕심은 반드시 화를 부른다.'

지금 이 정도 영단만으로도 타 문파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칼을 뽑으며 달려오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이만한 영단을 마음대로, 원하는 만큼 만들어 낼 수 있기를 바란다는 건 말 그대로 도둑놈 심보밖에 되지 않는다.

당장 이것만 해도 눈이 돌아갈 지경이 아니던가.

"자, 그럼……."

현종이 슬쩍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제 아이들을 불러 이것을 나눠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아니에요."

"음?"

청명의 시선이 현종과 현상, 그리고 현영에게로 가 닿는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인데, 세 분이 먼저 드셔야죠."

"……."

현자 배들이 놀란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우리가?"

"네."

청명이 저벅저벅 걸어가 영단 세 개를 집어 들고는 현종과 현상, 그리고 현영에게 내밀었다.

"얼른요."

"……."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우리 생각까지 해 주다니, 참으로 고맙구나. 하지만 청명아. 우리는 살 만큼 살았다. 그러니 우리가 영단을 먹는 것보다는 제자들이 하나라도 더 먹는 게……."

"뭘 살 만큼 살아요. 앞으로 백 년은 더 사셔야죠."

"……응?"

"제자들한테 죄다 떠넘기고 은퇴하실 생각하지 마시고. 이거 드시고 삼십 년은 더 뼈 빠지게 일하세요."

"……."

과연 저건 효도인가 패륜인가?

현종조차도 도무지 정확한 구분이 어려웠다.

"우리는……."

그때 청명이 고개를 내젓는다.

"장문인."

"음?"

"이깟 건 별거 아니에요."

"……."

청명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화산은 더 많은 것들을 얻고, 더 많은 것을 이룰 거예요. 나중에는 자소단 따위는 대단치도 않은 물건이 될 테니까 그냥 드세요. 양보는 그때 하시고요."

"……."

대단치 않은 물건이라.

"허허허. 그래. 그렇지. 그리돼야지. 허허허허."

현종이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현영이 피식 웃으며 현종 대신 말을 이어 간다.

"네가 이해하거라. 우리가 없이 살다 보니 이런 걸 받아 들면 염통이 쫄깃하여 그렇다. 평생 인삼 뿌리 하나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는데 떡하니 영단을 받으려니 영 손이 나가질 않는구나."

그 말에 현상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애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제가 뭐 틀린 말 했습니까?"

웃자고 한 말이었지만, 정작 청명은 웃지 못했다.

되레 가슴 한구석이 살짝 아파 오는 느낌이다.

'쯧.'

청명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그가 생각하는 화산의 핵심은 청자 배와 백자 배다.

그의 지휘 아래 새로이 만들어질 화산은 그들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하나 그건 그저 화산의 미래를 위한 것일 뿐, 그가 가장 안쓰럽게 생각하는 이들은 바로 그의 눈앞에 있는 현자 배들이었다.

'속 쓰리게.'

화산에 입문한 이래로 평생을 생고생만 하고, 셈이 빠른 동기들이 다들 화산을 떠날 때도 미련스럽게 이곳에 남아 화산의 귀신이 되려던 이들이다.

청명에게 있어서 이들은 언제나 아픈 손가락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드세요."

"네 마음은 안다만……."

"아, 됐어요. 더 들을 말 없으니까. 어서 드세요. 안 드시면 이거 다 뭉개 버릴 거예요!"

청명의 얼굴이 단호하다.

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그런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현종은 결국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영단을 받아 들었다.

"그래, 받으마."

"장문인."

"됐다."

현상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끊으며,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이 영단은 청명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만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 영단을 어떻게 쓰느냐도 이 아이에게 달린 것이지. 주인이 먹으라는데 무슨 수로 거부하겠느냐?"

"……예."

"허허. 내가 제자들에게 효도를 받아 보는 날도 오는구나."

현종의 입에서 기분 좋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살짝 물기가 어려 있지만, 동시에 너무도 맑은 웃음소리였다.

"그냥 먹으면 되는 것이냐?"

운각이 즉시 대답했다.

"예. 장문인 별다른 준비는 필요 없습니다."

"으음, 그래. 너희도 어서 준비하거라."

"예."

현영과 현상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청명이 내민 자소단을 받아 들었다.

"제가 호법을 설게요. 여기서 바로 드시면 돼요."

청명의 말에 현자 배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운각이 살짝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바닥에 널려 있는 자소단들을 조심스레 수거하여 뒤로 물러났다. 혹여나 운공 중에 문제가 생겨 자소단이 상할까 봐서다.

"드세요."

"으음. 그래."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자소단을 바라보던 현종이 눈을 살짝 감고는 입 안으로 영단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현상도 그를 따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두 사람이 눈을 감고 운기에 들어간다.

하지만 현영만은 아직 영단을 입에 넣지 않고, 그저 가만히 청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드세요?"

청명의 말에도 현영은 미동을 하지 않는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서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청명아."

"네?"

"고맙다."

"……."

그의 진심 어린 눈빛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이 말만은 꼭 해야겠구나. 고맙다, 청명아."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어서 드시기나 하세요."

"아니다."

현영이 고개를 저었다.

"때로는 말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있지. 그저 마음으로 간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도 있다."

"……."

"고맙다, 청명아. 네가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주는구나."

"에이. 어색하게……. 얼른 드세요."

"그래. 먹어야지. 누가 주는 건데."

말은 그렇게 해 놓고도 현영은 한참을 더 말없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현영의 눈.

그 눈에서 과거 장문사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을 느낀 청명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한동안 청명을 바라보던 현영도 마침내 가만히 눈을 감고 영단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사르르 녹아내린 영단이 위장으로 꿀꺽 넘어가자 현영이 운기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가 환상처럼 들려왔다.

- 고마운 건 너희가 아니라 나다.

착각인가?

하지만 더 깊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바로 운기에 들어간 현영은 이내 자신을 잊고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청명은 운기에 들어간 세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왠지 보고 있을 수가 없다. 계속 보다간 추한 꼴을 보일 것 같아서다.

'미안하다.'

그는 화산을 지키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화산을 수호하지 못했다. 그가 구한 것은 강호였지, 화산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지키지 못한 화산을 이들이 지켜 냈다.

과거의 그가 죽을 때보다 젊은 이 세 사람이 세파에 시달려 주름 가득한 노인의 모습이 된 것을 보노라면, 때때로 저며 오는 가슴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청명이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그리 죽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들은 청명과 청문이 버티고 선 화산의 제자로서 천하를 웅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명은 이들을 지키지 못한 채 죽어 버렸다.

그가 없는 화산을 지키느라 소년들의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고, 검을 잡은 손에는 주름이 졌다.

패기로 가득 찼던 가슴은 현실의 벽 앞에 말라 버렸고, 청운의 꿈은 짓누르는 중압감에 묻혀 버렸다.

'미안하다.'

내가 너희를 지키지 못했다.

내가 너희를 힘겹게 만들었다.

내가.

'내가 너희의 인생을 앗아 갔구나.'

내가…….

미련한 것들.

화산이 뭐라고 이곳에 남아 그 삶을 바쳤느냐. 다른 이들처럼 그냥 떠나 버렸다면 그 한 몸은 편했을 것을.

멍청한 놈들.

미련하기 짝이 없는 놈들.

그러니.

'내가 되찾아 주겠다.'

너희가 아직 다 꾸지 못한 꿈을.

세상을 질주하고자 했던 너희의 바람을.

내가 이뤄 주마.

어린 너희를 무릎에 앉혀 보듬어 주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내가 너희의 그늘이 되어 주겠다.

그러니 나의 후예들아.

'아직은 그리 말하지 마라.'

스스로 늙었다 하지 마라. 이제 나는 괜찮다는 말도 하지 마라.

나이가 든다고 해서 꿈이 사라지던가?

바라는 것이 없어지던가?

아니. 그렇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저 참아 낼 뿐. 그저 외면할 뿐.

더는 이룰 수 없는 것을 꿈꾸지 않게 될 뿐이다.

'내가 다시 너희를 꿈꾸게 해 주마.'

청명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던 그는 한참 후에야 천천히 걸어 창가에 섰다. 그리고 슬픔에 잠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형.

장문사형.

저는…….

아직도 화산에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습니다.

사형…….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