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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43화 (243/1,567)

243화. 이렇게 아낌없이 주시다니! (3)

야심한 밤.

청명이 아무도 모르게 슬그머니 장문인의 처소 뒤쪽으로 숨어들었다.

'낄낄낄낄.'

야행복을 뒤집어쓴 그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아니. 사실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다.

지금까지는 화산에 딱히 만년한철이 필요한 일이 없었고, 설사 필요하다 해도 만년한철을 잘라 낼 능력이 없었다.

저 작은 동산 아래 어마어마한 양의 만년한철이 묻혀 있다고 해도 말이다.

'크으!'

청명이 감회가 새롭다는 눈으로 장문인의 처소 뒤에 있는 작은 산을 바라보았다.

'저기가 없었다면 두 배는 더 고생했겠지.'

아니. 두 배가 뭔가?

당장 전각이고 뭐고 다 빼앗기고 쫓겨날 뻔했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코끝이 시큰해지는……. 아니, 뒷골이 당겨 오기 시작하는 청명이었다.

'아오. 진짜.'

생각해 보니 잘도 여기까지 왔다.

먹고 죽을 돈도 없어서 길바닥에 나앉을 꼴이던 문파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여기까지 끌고 오지 않았는가.

"어휴. 그래도 갈 길이 멀다. 갈 길이 멀어."

어쨌든 이번 일만 어떻게 잘 해결하고 나면 확실히 나아지겠지!

청명이 눈에 힘을 주고 산을 노려보았다.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챙겨 온 검을 뽑아 든 그는 심호흡을 하고는 안색을 굳혔다.

"간다!"

촤촤촤촤촤촤촥!

흙더미가 쏟아지는 개울물처럼 뿜어져 나왔다. 청명은 검을 곡괭이처럼 휘두르며 흙을 두부처럼 썰어 냈다.

순식간에 산을 파고 들어간 청명이 방향을 틀어 파죽지세로 전진한다.

촤촤촤촤촤촤촤악!

흙이 뿌려지는 소리가 마치 빗소리처럼 들렸다.

'그때는 그 개고생을 했는데.'

지금은 일도 아니다. 지난 이 년 몇 개월 사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단숨에 실감할 수 있었다.

턱.

"어쭈?"

앞을 막고 있는 바위를 일 검에 잘라 버린 청명이 방향을 가늠했다.

'그게 이쯤에서…….'

아래로. 그렇지.

전에는 앞쪽의 기관을 열고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방법을 바꿀 셈이었다. 자꾸 기관 쪽을 건드리다보면 현종이 눈치를 챌 가능성도 높아지고, 이제는 굳이 기관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청명이 검을 들어 머리 위를 쿡쿡 찔렀다.

푹. 푹. 푹.

"아닌가?"

까아앙!

"오!"

청명의 눈에 화색이 어린다.

'잘 파고 왔네.'

검 끝에 단단한 것이 걸렸다. 바위 따위가 검기가 실린 그의 검을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지금 걸린 것은 분명 전에 들어갔던 장문사형의 비자금 창……. 아니, 화산 장문의 비고일 것이다.

"보자."

청명이 검을 가볍게 떨친다.

그러자 머리 위의 흙더미들이 우르르 쏟아지더니 거무튀튀하고 네모반듯한 천장이 드러났다.

청명은 드러난 천장, 그러니까 비고의 바닥을 보며 감탄하듯 말했다.

"크으! 장문사형! 이렇게 아낌없이 주시다니!"

창고에 있는 보물도 다 빼 주시고, 이제는 비고까지 잘라 주시겠다니!

이 사제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야, 이 날강도 같은…….

"아아.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나중에. 지금 바쁘니까."

귀에 들려오는 환청을 훅 밀어 낸 청명이 검을 들어 비고의 바닥부분을 쿡쿡 찌른다.

카앙. 카앙.

'확실히 단단하네.'

만년한철은 만년한철이다. 최근 내력을 확 끌어 올리지 않았다면 베어 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청명이 살짝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단전의 내력이 그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들불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전신을 내달린 내력은 빠르게 검으로 밀려들어 갔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청명의 검에서 맑은 검명(劍鳴)이 울려 퍼졌다.

청명이 살짝 멍한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검이 느릿하게 부드러운 호선을 그려 냈다.

스으으읏!

가볍게 한 번 검을 휘두른 청명이 검을 회수해 검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좋아!"

눈을 다시 크게 뜬 청명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고개를 든다.

"자! 잘라 냈……."

그 순간 원형으로 크게 잘린 만년한철이 청명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어?"

쿵!

"……."

철푸덕.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 청명의 발끝이 움찔움찔했다.

"끄으으으."

몸을 덮고 있는 만년한철을 낑낑대며 밀어 낸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니!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천장을 자르면 당연히 떨어지지! 썩을!

주륵 흘러내린 코피를 쓱 문질러 닦고는 바닥에 떨어진 만년한철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거의 사람이 드러누워도 될 정도의 크기다. 이만한 크기면 얼마든지 커다란 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생각보다 얇은데?"

하기야.

이만한 크기의 비동인데, 두께까지 두꺼웠으면 화산이 아니라 소림이 만들었어도 기둥뿌리 두어 개쯤은 날려야 한다. 화산이 그런 짓을 했다가는 대번에 파산이다.

거의 한계까지 얇게 뽑아낸 철판을 보며 청명이 눈을 찌푸렸다.

"이러면 어……."

원래는 두꺼운 철판을 검으로 파내 솥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얇아서야 파낼 곳이 없지 않은가.

그 말은…….

"……이거 구부려야 하나?"

만년한철을?

내가?

청명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이리된 이상 남은 방법이라고는 이 철판을 두드려서 굽힌 다음에 솥 모양으로 주조하는 것뿐이다.

슬픈 사실은 이 화산은 물론이고 섬서 전체를 뒤져도 그만한 일을 할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아, 가능한 곳이 있기는 하겠네. 종남파 장문인이나 장로들 정도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아주 기쁜 마음으로 해 주겠네.

'허허. 화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이 개새끼들아!'

하면서.

썩을.

결국 자신이 직접 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청명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앓느니 죽는단 마음으로 해야지."

그리고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아 만년한철 철판을 끌어당겨 무릎 위에 걸쳤다.

그의 왼손이 철판의 아랫부분을 움켜잡는다.

"쯧."

화아아아아아악!

손이 거의 백색으로 물들며 어마어마한 열기를 뿜어냈다. 그와 동시에 철판이 서서히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오른손으로 철판의 달아오른 부분을 그대로 내려친다.

카아앙!

"뭐 하나라도!"

카아앙!

"나 없이 돌아가는 게 없냐!"

카아아앙!

울분 섞인 손길이 만년한철을 신나게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단단하기 짝이 없는 만년한철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휘어지기 시작했다.

개미 눈곱만큼.

"아니, 이 새끼가?"

청명의 눈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가 누구인가?

상황이고 나발이고, 일단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일을 만나면 눈부터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던가?

"오냐!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린 청명이 주먹을 움켜쥐고 죽어라 철판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캉! 캉! 캉! 캉! 캉! 캉! 카아아앙!

"으아아아아아아아!"

* * *

"으으음."

의약당주 운각이 무거운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간밤에 그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생각할수록 요원한 일이지.'

혼원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철이나 묵철 같은 특수한 철로 만든 솥이 필요하다.

문제는 한철이나 묵철은 그 가격이 천금에 달하고, 설사 돈이 있다고 해도 원하는 만큼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물건이라는 점이다.

'청명이 녀석이 정말 한철을 구해 올 수 있을까?'

그 한철로 솥을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가 남지만, 일단은 한철부터 구하고 볼 일이다.

하나, 아무리 청명이 도깨비 같은 놈이라고 해도, 한철이 뭐 길가에 널린 돌멩이도 아니고, 하룻밤 만에 뚝딱 구해 올 수 있겠는가?

'일단은 괜찮다고 해야지.'

호언장담을 했으니 노력이야 했겠지만, 실패야 당연한 것이니 적당히 위로를 해야 할 것 같다.

운각이 낮게 한숨을 쉬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래, 그동안 녀석이 해 준 것만 해도……. 와 씨! 놀래라! 이게 뭐야?"

태연하게 밖으로 걸어 나가던 운각이 화들짝 놀라 뒤로 훌쩍 물러섰다.

동그랗게 커진 그의 눈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처, 청명아?"

"푸우우우우우. 푸우우우우우."

"……."

코까지 신나게 골며 곯아떨어진 청명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 아니……."

하룻밤 사이에 대체 뭔 짓을 했기에 상거지꼴이 되어 있지?

전신이 흙투성이다. 그리고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흙먼지가 땟국이 되어 들러붙어 있다. 대체 어제…….

"응?"

운각의 시선이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

'이거?'

청명의 옆에 커다란 솥이 보인다.

아주 커다란.

검은 솥에 빛이 비칠 때마다 푸른빛이 감돌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철이었다.

"서, 설마?"

운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 아니겠지?

에이 설마?

스르르르릉.

운각이 허리에 찬 검을 천천히 뽑았다. 그리고 검에 내력을 밀어 넣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그는 단호한 기세로 곧장 솥을 내리쳤다.

쩡!

팽그르르르르르!

"……."

이윽고 그는 깔끔하게 부러져 두 동강이 난 제 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부러져?

검기를 밀어 넣은 검이 부러졌다고?

그, 그럼?

"하, 하……. 한……."

한철?

"마, 만년한철?"

이 미친놈이 진짜 만년한철로 솥을 만들어 왔다고?

그는 아예 솥으로 와락 달려들어 힘껏 여러 차례 후려쳤다. 하지만 손만 부러질 듯 아파 올 뿐, 솥에는 실금조차 가지 않았다.

"자, 장문인! 장문이이이이이이이이인! 으아아아아아아아! 장문이이이이이이이이인!"

기겁을 한 운각이 솥을 냅다 들고는 장문인의 처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푸후우우우우우우우! 푸후우우우우우우!"

적막에 빠진 의약당의 마당에는 청명의 코고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 * *

"세상에, 한철이라니. 이만한 양의 한철은 생전 처음 본다."

"이거면 되겠지?"

장로들이 솥 주변에 몰려들어 신기한 듯 두드려 보았다.

"아니, 청명아. 대체 이것을 어디서 구해 온 것이더냐?"

구해 오긴 개뿔이!

내가 두드려 만들었다, 이것들아!

아이고! 내 팔자야. 늙어 빠진 놈은 밤새도록 주먹으로 솥 두드리고, 어린것(?)들은 처자빠져 잠이나 자고!

한숨을 푹 내쉰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게 뭐 중요한 건 아니죠."

"그, 그렇지. 그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현종이 고개를 획 돌렸다.

"운각! 아니, 의약당주!"

"예! 장문인!"

"이제 되었는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실험을 해 보고 싶습니다."

"으음. 알았다!"

현종이 솥으로 다가가더니 아랫부분에 손을 댔다. 그리고 내력을 있는 대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오!

솥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오! 버틴다!"

"과연 만년한철이로구나! 이리 얇은데도 버텨 내다니!"

현종과 현상이 반색을 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됩니다! 됐습니다! 장문인! 이제 혼원단! 아니, 자소단을 만들 수 있습니다!"

"드디어!"

현종의 눈이 촉촉하게 물들었다.

이 개고생……. 아니, 뭐 대부분의 고생은 청명이 혼자 한 것이지만, 어쨌든 이 개고생을 한 끝에 드디어 혼원단 제조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걸로 화산은 다시 한 단계 도약할 것이다!'

"선조들께서 보살피셨구나."

"썩을."

"……응?"

현종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뭘 잘못 들었나?

밤새도록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쓰며 한철을 구부리느라 녹초가 되어 버린 청명이 손을 휘휘 젓는다.

"빨리 시작하죠. 빨리……."

"그래! 그래야지! 의약당주!"

"예! 장문인!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부산하게 재료를 솥에 쏟아 넣는 의약당주와 잔소리를 쉬지 않는 현종을 보며 청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조는 뒈질 놈의 선조! 내가……. 어? 내가 선조인가?'

어…… 그럼 맞지.

맞네. 그 말.

"자, 여기에 공청석유와 화신수……. 그리고 새벽이슬을 모아 둔 것을 넣으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세심한 손길로 재료를 배합한 의약당주가 뒤로 훌쩍 물러나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기다란 쇠 주걱을 움켜잡았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두어 번 심호흡을 한 그가 단호하게 외쳤다.

"시작해 주십시오!"

"현상!"

"예, 장문인!"

현종과 현상이 양쪽에서 솥을 부여잡고 내력을 끌어 올린다. 이내 내력을 열기로 전환해 낸 두 사람이 더없이 진중한 얼굴로 솥을 꽉 움켜잡았다.

고오오오오오오.

어마어마한 화력이 솥의 중심으로 모이며 재료들이 끓기 시작한다.

"좋습니다! 이대로!"

의약당주가 희열에 찬 얼굴로 솥 안의 재료들을 저었다.

"딱 이 정도입니다! 이걸 유지해 주십시오!"

"얼마나?"

"딱 열흘만 하면 됩니다!"

"오! 그래 열……."

응?

뭐라고?

현종과 현상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의약당주를 바라보았다.

"……얼마 동안?"

"열흘!"

"……영단 만드는 데 열흘 걸린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 과정만 열흘이 걸린다고?"

"예! 과정이라고 해 봐야 이게 전부입니다!"

"……."

그럼 진즉에 말했어야지, 인마!

현종과 현상이 당황하여 떨리는 눈으로 의약당주를 바라봤다.

"자, 잠시 멈췄다가 다시 시작하면……."

"안 됩니다! 한번 시작한 이상 멈출 수 없습니다! 열흘! 앞으로 무조건 열흘입니다!"

의약당주의 눈에 광기가 어려 있었다.

그의 인생에 다시없을 업적이 만들어질 순간이다. 열흘 동안 솥을 젓는 것 따위가 대수겠는가?

"어……. 그? 어?"

현종이 뭔가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흘……."

현종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 악마 같은 얼굴을 한 청명이 서 있었다.

표정만으로

'그 개고생을 해서 구해 온 재료 잘못해서 날리기라도 하면 화산도 날아가는 거야.'

를 구현해 낸 청명이 이를 뿌득 갈며 말한다.

"하실 수 있습니다! 장문인!"

"……."

"꼭! 반드시! 어떻게든!"

"……."

"사람이 열흘 안 잔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죽어도 솥을 잡고 죽겠다는 마음으로 노력해 주십시오! 이 제자, 장문인께서 화산만을 위해 사셨던 것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나 아직 안 죽었어, 이놈아!

현종의 눈가에 습기가 맺혔다.

에라이. 이 벼락 맞아 죽을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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