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240화 (240/1,567)

240화. 여기가 지옥이구나. (5)

까악! 까아악! 까악!

현종이 눈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까마귀가…….'

물론 그는 딱히 까마귀를 싫어하지 않는다.

겉이 검다고 그 속까지 검게 생각해서야 어찌 도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까마귀 역시 다른 것들과 다름없는, 그저 한 종류의 새일 뿐이다.

다만 오늘따라 저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더없이 불길하게 들린다는 점이 문제였다.

'허허. 그저 내 마음이 소란한 것인가?'

새의 소리는 평소와 다를 리가 없을진대, 그 소리가 유독 불길하게 들린다면 듣는 이의 마음이 편치 않다는 뜻이겠지.

현종은 가만히 눈을 감으며 마음을 차분히 다스렸…….

쩌적.

"……."

현종이 시선이 아래로 슬쩍 내려갔다. 손에 쥐고 있던 낡은 찻잔에 금이 가 있었다.

"음……."

이 역시 우연이겠지?

그래. 까마귀가 우는 날도 있고, 찻잔에 금이 가는 날도 있는 법이다. 그 두 가지가 우연히 겹치는 날도 한 번쯤…….

툭!

현종의 얼굴이 살짝 떨렸다.

벽에 걸려 있던, 상선약수(上善若水)라 적힌 족자가 바닥으로 떨어져 처박혀 있었다.

"……."

이쯤 되면 태상노군도 오늘은 날이 아니라며 몸을 돌릴 판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아침부터 이런 불길한 징조들이 연달아 일어난단 말인가?

현종은 쥐고 있던 잔을 가만히 내려놓고 깊이 심호흡했다.

'마음에 달린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린 것…….'

까악! 까아아악! 까아아아악!

"에이이잇!"

마음을 다스리는 데 실패한 현종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녀석들이 아침부터!"

문을 박차고 나와 까마귀를 보며 삿대질을 하던 현종은 불현듯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

"……."

마당에 선 현영이 고개를 모로 꺾는다.

"뭐 하십니까?"

"……그러는 너는?"

"저야 오늘따라 잠이 잘 오지 않기에 청소나 할까 하고 일찍 나왔습니다."

"……그랬더냐."

현종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슬그머니 뒷짐을 졌다.

"나는 그저, 음……."

"거 싱숭생숭하신 모양입니다?"

현종이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이가 들고 도를 닦을수록 사람이 언행이 부드러워져야 하건만, 어째 현영은 날이 갈수록 괴팍해져만 가는 느낌이다.

현종이 막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를 하려는 찰나였다.

"장문인! 장문인!"

또 뭔가?

현종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현상이 이쪽으로 부리나케 튀어 오고 있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웬 소란이냐!"

"저, 전서! 전서!"

"응?"

그의 앞에 도착한 현상이 훅 하고 숨을 몰아쉬더니 소리치듯 말했다.

"화, 화음현에서 전서구가 왔습니다! 아이들이 화음에 도착해서 지금 산을 오르고 있답니다!"

"뭐라!"

현종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지금이라면……?"

"전서구가 조금 빠르기야 하겠지만, 이제 곧 도착할 것입니다!"

"그렇지! 그래, 그렇겠지!"

일단 맞장구를 친 현종이 우왕좌왕하다가 몸을 획 돌렸다.

"내 이럴 때가 아니지!"

그러더니 화산의 산문을 향해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현영 역시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그런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가, 같이 가십시다, 장문인!"

현상도 허겁지겁 현종의 뒤를 따른다.

산문까지 단숨에 내달린 현종이 양손을 뻗어 육중한 나무 문을 밀어젖혔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나가 화산으로 오르는 마지막 언덕을 바라보며 섰다.

숨이 살짝 가쁘다.

이토록 다급하게 달려 본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만큼이나 그의 마음은 한껏 들떠 있었다.

화산에 입문하여 처음으로 검을 받았을 때만큼이나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오겠지요."

"오겠지."

현영과 현상의 나직한 대화가 현종의 귀로 파고든다.

'이제 오겠지.'

현종이 살짝 아련한 눈으로 언덕을 바라보았다.

'고얀 놈들.'

미리 연락이라도 한번 줄 것이지. 그럼 이렇게 초조하게 기다리진 않았을 텐데.

"고생이 많았겠지."

"암요. 운남이 어딥니까. 그 먼 곳까지 다녀오는데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그 와중에 그 사천당가와 동맹까지 맺어 오지 않았습니까? 이 맹랑한 놈들이!"

살짝 격하게 토해져 나오는 말투에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안쓰러움까지 모두 담겨 있었다.

원래는 자신들이 했어야 하는 일을 대신 맡긴 데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그 일을 너무나도 잘해 내 준 것에 대한 대견함. 그리고…… 무엇보다 뿌듯함.

현종이 살짝 물기 젖은 눈으로 솟아오른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선조들을 뵙고 할 말이 하나는 생겼구나.'

제가 화산을 이끌지는 못했지만.

화산은 이끌 아이들을 찾아냈습니다.

그거면 된 것 아니겠습니까?

"장문인. 저기 아이들이 옵니다."

"으음……. 음, 그래."

현종이 눈가를 살짝 훔쳤다. 나이가 많아지면 감상적이 된다더니 딱 그 꼴이다.

오랫동안 집을 떠났다 돌아오는 아이들이니 웃으며 맞이해 주어야겠지.

저벅. 저벅. 저벅.

곧이어 작은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결코 빠르지 않게 이어지던 발소리가 점점 커진다 싶더니, 이내 귀에 닿을 듯 생생해졌다.

현종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제 보이겠지.

늠름하기 짝이 없는 이 화산의 아이들이.

화산을 이끌어 반석에 올릴 동량…….

동…….

"……."

현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언덕을 올라온 아이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당당한 걸음걸이!

산발이 된 머리!

때가 타다 못해 거의 황토색으로 변해 버린 무복!

귀신같이 일그러진 얼…….

'뭐지?'

쟤들 운남에 다녀온 것 아니었나?

오는 길에 지옥에라도 들렀다 왔나?

걸리는 건 다 패 죽이겠다는 얼굴로 터덜터덜 산을 올라오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뭔가 등골이 서늘하다.

"화산……."

"화산이다……."

"화산……. 화산이다. 화산."

"……."

단체로 눈을 희번덕대는 제자들을 본 장로들이 움찔하여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빌어먹을.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나는 이제 화산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갈 거다."

"적어도 저놈이랑은 안 나간다!"

"목욕. 목욕! 목요오오오옥!"

유이설이 실성한 듯 목욕을 외쳐 댄다.

그 공포스러운 광경을 보며 장로들의 얼굴이 살짝 질려 갔다.

아니. 저놈들 대체 이번 여정에서 무슨 일들을 겪은 거지? 나갈 때는 풋풋하니 고왔던 것들이…….

가장 선두에서 올라오던 백천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화산을 바라보더니 시선을 조금 내려 장문인들을 발견한다.

"장문인!"

"……."

야, 무섭게 왜 그러냐…….

움찔하는 장문인의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온 백천이 양손을 모으더니 격하게 포권을 했다.

"임무를 맡고 떠났던 이대제자 백천 외 사 인. 지금 임무를 마치고 화산으로 복귀했습니다!"

"어……. 어, 음. 그래."

어…….

이게 아닌데.

원래는 격렬하게 눈물을 뿌리며 환영하고 그랬어야 하는데.

분위기가 갑자기 왜 이렇게 됐지.

당황한 그를 보며 백천이 뭔가 생각난 듯 아! 소리를 질렀다.

"장문인!"

"으, 으응?"

"자목초! 자목초를 구해 왔습니다. 자목초! 청명……."

휙 뻗어진 백천의 손을 청명이 힘껏 찰싹 때리더니 눈을 부라렸다.

"손대지 마! 손모가지 날아가니까!"

"……저 미친놈이."

"의약당! 의약당으로 가야 한다!"

청명은 장문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 목욕. 씻을 거야. 무조건 씻을 거야."

"밥……. 식당에 밥 좀 남았습니까? 사흘을 굶었더니 죽을 것 같습니다."

"……."

야옹거리던 아기 호랑이들이 집 떠나 잠깐 살더니 칼자국 몇 개 달고 짐승이 되어 돌아온 느낌이다.

"그, 어……."

그때 현영이 의연한 표정으로 한 발 나섰다.

"그래! 일단은 씻고 밥부터 좀 먹자꾸나! 운남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느냐! 긴 여행에 지쳤을 텐데."

"그래도 보고는 드려야……."

유일하게 정신 줄을 잡고 있던 백천이 나름의 예의를 차렸다. 그러나 현영은 되레 코웃음을 쳤다.

"보고는 얼어 죽을 보고! 성공했으면 어떻고, 말아먹었으면 어떠냐! 거기까지 가서 고생을 하고 왔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아니……. 성공을 했……."

"됐다! 됐어! 어서 들어가자!"

현영이 백천의 등을 떠밀었다.

"아, 아니. 그게……."

"됐다, 이놈아! 밥 먹고 다시 이야기하자! 괜찮지요, 장문인?"

"어? 어……. 그래. 그렇지. 밥이 중요하지."

"어서 씻고 오너라! 내가 식당에 이야기해서 바로 밥 차릴 테니까!"

그 말에 조걸과 윤종의 눈이 획 돌아갔다.

"밥이다!"

"어흑! 운남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건량만 먹었더니……."

"건초보다는 낫잖느냐."

"아, 그건 그렇죠."

건초?

이건 또 무슨 이야기지?

터덜터덜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현종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거…….

"애들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은데?"

"조금이요?"

"……."

* * *

말끔해진 화산의 제자들을 현종이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뽀송뽀송하게 돌아온 모습을 보자니 익히 알고 있던 화산의 제자들로 보이기는 했지만…….

'뭔가 분위기가…….'

예전에 없던 독기가 서려 있다 해야 하나?

아니면 조금 더 여유로워졌다고 해야 하나?

정확하게 재단하기는 힘들지만,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성장했구나.'

여행은 사람을 단련시킨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아우으으으으. 허리가 영."

청명이 따스한 곳에 누운 배부른 강아지처럼 벽에 등을 기대고 늘어져 있었다.

'저건 성장했다기보다는 늙었다에 가깝지 않은가?'

조금 있으면 시도 한 수 읊을 기세다.

물론 평소에도 영감 같은 구석이 있는 청명이었지만, 지금은 장로들이 형님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그, 그래. 다들 잘 다녀왔느냐?"

"예, 장문인!"

과연 백천은 백천.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원래의 신색을 회복하고 정갈한 자세로 현종의 말을 받았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운남에서 자목초를 구해 올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몇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만……."

그런데 그가 돌연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아니 왜 이러느냐?"

"장문인의 허락을 구하지 못하고, 제게 주어진 권한을 남용한 죄를 청합니다."

"일어나거라."

"하나, 장문인."

"내가 너에게 그 권한을 일임한 이유가 무엇이더냐. 밖에서만은 네가 화산의 장문인이다. 너의 선택이 곧 나의 선택이니 너는 벌을 청할 필요가 없다."

"장문인."

"일어나 앉거라."

그 단호한 말에 백천이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들었다.

서릿발 같은 기세로 백천을 준엄하게 다그쳤던 현종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온화한 얼굴을 보였다.

"그래. 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 볼 수 있겠느냐?"

"예.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혹 당가주께서 다녀가셨는지요?"

"그렇다. 그때 대충 사정을 듣기는 했지만, 너희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들어 보고 싶구나."

"예, 그럼 사천에서 있었던 일부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백천이 지난 여정을 장문인과 장로들 앞에서 차분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그가 놓치는 부분은 조걸과 윤종, 그리고 유이설이 나서서 보충해 주었다.

물론 청명은 뒤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지만, 워낙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다 보니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현종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백천이 모든 이야기를 끝냈을 때는 다른 장로들과 운자 배들조차 입을 쩍 벌린 채로 복귀한 제자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천으로 가 당가와 동맹을 맺고."

"예."

"그, 그 와중에 당가의 장로를 때려눕히고?"

"청명이 놈이 한 것입니다."

현종이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졸고 있는 청명을 바라본다.

"그, 그리고 마적 떼를 때려잡고 운남으로 가 야수궁과 동맹을 맺고 왔다고?"

"그쪽에서 생각하는 동맹과 우리가 생각하는 동맹이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대충 뜻은 통할 것입니다. 이제 화산의 제자들은 운남에서 운남인들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다……."

어. 거기에……. 어…….

"우, 운남 차의 전매권까지 받아 왔다고?"

이 물음에는 더 대답하기에 알맞은 인물이 있다. 백천이 슬쩍 조걸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넙죽 엎드리며 답하였다.

"운남의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 장문인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제 가문의 상단을 우선 대리인으로 내세워, 화산의 이름으로 곡식을 실어 나르게 했습니다. 죄를 청합니다."

"죄?"

죄?

뭔 죄, 인마?

"이, 이 모든 걸……."

현종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불과 한 달여의 여정 만에 이, 이걸 다 해냈다고? 이걸?"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지?

이쯤 되면 즐겁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 그……."

뭔가 반응을 해야 하는데 차마 말이 나오질 않았다. 황당함과 경이로움 그리고 벅참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현종의 어깨를 현영이 가만히 잡았다.

"장문인."

"응?"

현영이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북해 쪽이나 서장 쪽에서는 일이 없겠습니까?"

"응? 그게 무슨……."

그러더니 졸고 있는 청명을 슬쩍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한 번 더 보냅시다, 장문인. 혹시 압니까? 이번에는 봉황이라도 물어 올지."

"……."

순간 혹하는 마음이 들고 만 현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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