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여기가 지옥이구나. (4)
"갔다고?"
"……예."
"벌써?"
"그렇습니다."
당군악이 멍한 얼굴로 당잔을 바라보았다.
"화산의 제자들이 운남에서 사해상회로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은 지가 불과 한 시진 전이다. 그런데 벌써 섬서로 돌아갔단 말이냐?"
"……저도 당황스럽습니다만 그렇다고 합니다."
"허."
당군악이 어이없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얼굴에 섭섭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뭐가 그리 급하여 와서 차도 한잔하지 않고."
아무리 바쁘다 해도 당가에 한 번은 들를 줄 알았건만, 이리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섬서로 돌아가 버릴 줄이야.
'매정한 녀석들 같으니.'
당군악이 살짝 한숨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면 그들이 굳이 사천당가에 들러야 할 이유는 없다. 그들은 동등한 친구 관계지, 보고를 해야 하는 상하 관계가 아니니까.
'그럼에도 섭섭하다는 건, 내가 그만큼이나 그들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당군악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뭐랄까.
어릴 적 같이 놀기로 한 친구가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이건 아직 확실하게 확인된 정보는 아닙니다만……."
"음?"
"화산의 제자들이 아무래도 운남 차에 대한 전매권을 손에 넣은 모양입니다."
"……전매권을?"
"예. 다만 조금 더 확인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확인할 것도 없겠지."
보고를 하던 당잔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 반응을 보며 당군악이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그놈이면 전매권이 아니라 야수궁의 신물을 털어먹고도 남는다. 우리 당가도 속곳에 숨겨 놓은 것까지 모조리 털렸는데, 야수궁이라고 별수 있겠느냐?"
"하긴."
청명의 얼굴을 떠올린 당잔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아쉬운 일이구나. 벌써 돌아갔다니."
당군악이 살짝 아쉬움을 토로하던 그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살짝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
"무슨 일이냐?"
"사해상회의 상회주가 가주님을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음?"
당군악이 미간을 좁힌다.
'사해상회라.'
"안으로 모셔라."
"예!"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사해상회주 조평이 들어섰다.
"당가주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외다. 그런데 무슨 일로?"
"서신을 전하러 찾아왔습니다."
"서신?"
당군악이 고개를 갸웃한다.
상회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나를 만한 서신이라면…….
"화산신룡의 것이오?"
"그렇습니다."
당군악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웃음을 본 조평이 다소 경직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인다.
"제가 무례를 저질렀나 봅니다."
"그런 게 아니외다. 생각해 보니 웃겨서 그렇소."
"어떤 점이 우스우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생각해 보시오. 사해상회주나 나나 사천에서는 나름 목에 힘을 주는 사람들이잖소. 한데 그 어린 녀석의 서찰을 전달하는 사해상회주나, 그걸 좋다고 받고 있는 나나 지금 꼴이 말이 아니잖소이까."
조평이 빙그레 웃었다.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지요."
"새삼 깨닫는 바요. 그보다 서찰은?"
"여기에 있습니다."
당군악은 조평에게성 서찰을 받자마자 봉투를 뜯어 펼쳐 들었다. 그리고 흥미롭다는 얼굴로 서찰을 읽기 시작했다.
찬찬히 서찰을 다 읽어 내린 그는 어느새 무표정해진 얼굴로 서찰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조평을 빤히 바라보았다.
"상회주께서는 이 서찰의 내용을 알고 계시오?"
"저는 그저 그 서찰을 전달해 달란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면 당가주께서 할 일을 알려 주실 거라더군요."
"맹랑하긴."
당군악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감돌았다.
"서찰의 내용대로라면 앞으로 운남과의 차 무역은 사해상회가 독점하게 되겠구려."
"정확하게는 화산이 독점을 하고 저희는 그들의 일을 대신 해 주고 조금의 수수료를 취할 뿐입니다."
"그 조금으로도 막대한 이득이 발생하겠지."
당군악이 턱수염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화산신룡은 우리 당가도 그 차 무역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있소. 사천과 운남 사이에 횡횡하는 마적들을 소탕하고, 운남을 오고 가는 행상을 보호해 준다면 적당한 대가로 보상하겠다는군."
생각지도 못한 서신의 내용에 조평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눈은 연신 당군악의 표정을 살폈다.
'정말 뒤가 없는 사람이군.'
이건 당군악이 아닌 청명을 평하는 말이다.
사실 제안 자체는 나쁘지 않다. 당가 역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지금 청명이 이 제안을 한 곳이 다름 아닌 당가라는 것이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당가에 호위무사 일을 맡기겠다니, 청명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발상이다.
"흐음."
당군악 역시 그 부분이 걸린다는 듯 가만히 턱을 긁었다.
"어찌 생각하느냐?"
당잔에게로 향한 질문이었다.
그러자 당잔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가주님, 받아들이시지요."
"이유는?"
당군악의 물음에 당잔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물론 결정하기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또 그렇다 하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저희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을 생각한다면 마다할 일은 더더욱 아니지요."
"그깟 돈 몇 푼을 얻자고?"
"금전적 이득이 아닙니다."
"음?"
당잔이 단호한 눈으로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확신으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금전적인 이득은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희가 상행의 보호자라는 명분하에 운남을 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하겠느냐?"
당군악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그러자 당잔이 슬쩍 조평을 돌아본다. 잠자코 서서 동태를 살피던 조평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화산은 야수궁과 친우의 연을 맺었고, 화산의 문하들은 운남 어디서도 운남인과 다르지 않은 대접을 받을 권한을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화산과 동맹을 맺은 당가라면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흐음."
운남인에 준하는 대접이다.
당군악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기 시작했다.
당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운남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은 야수궁과도 연을 맺을 수 있다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맹랑해."
당군악이 살짝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 기분 나쁜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자꾸만 입꼬리가 꿈틀댄다.
"사해상회주."
"예, 당가주님."
"지금 이 순간부터 운남과 이루어지는 상행들은 사천당가의 이름으로 보호받을 것이오. 상행을 방해하려 하는 자들은 사천당가와 척을 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소."
"감사합니다, 당가주님!"
조평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이걸로 모든 조각이 맞춰졌다. 사해상회가 전매권을 대리 행사 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는 상단이나, 그 이득을 노리는 도적들도 이제는 경거망동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 사천 내에서 사천당가는 왕이나 다름없으니까.
사천과 운남과의 교역이 사천당가와 야수궁의 비호를 받는다. 누가 감히 이 교역에 손을 댈 엄두를 내겠는가?
"그럼……. 차라도 한잔하시겠소?"
"아닙니다, 가주님. 제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첫 상행의 가닥이 잡히면 곧장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직접 오실 것 없소. 연통이나 넣어 주시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강녕하십시오."
조평이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나가자, 당군악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렇게 한동안 고심하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당잔을 보았다.
"어찌 생각하느냐?"
"생각 이상입니다."
"그렇지?"
당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신룡쯤 되는 이가 저희를 단순히 호위로 쓸 생각은 아니겠지요. 아마 이건 저희더러 화산의 동맹이라는 입장을 이용하여 야수궁과도 연계하라는 의미일 겁니다."
"그렇겠지."
"야수궁과 당가 그리고 화산이 서로 벗의 인연을 맺는다면 섬서와 사천, 운남을 잇는 선이 만들어집니다. 이렇게만 되면 중원의 서쪽에서 이 세 문파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겁니다."
"전 구파일방과 현 오대세가, 그리고 세외사궁에서 한 곳씩 모여서 만드는 새로운 동맹이라……."
당군악의 머리에 펼쳐진 중원의 지도 서쪽에 매화가 가득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고여 버린 강호의 세력도를 다시 그리겠다는 건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움직이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단 한 번의 운남행만으로 이만한 일을 해낸 자입니다."
"확실히……. 그래, 확실히 굉장하지."
이런저런 가정을 세워 보던 그의 입꼬리가 점차 말려 올라간다.
'실로 귀신 같은 심계로군.'
사천당가가 몇십 년에 걸쳐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일을 불과 두어 달 만에 해결해 버렸다.
'이게 끝은 아니겠지, 화산신룡?'
과연 그 녀석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궁금하기만 한 당군악이었다.
"이 거래로 당가는 막대한 이득을 손에 넣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화산 장문인에게 좀 더 큰 선물을 해 드릴 걸 그랬군."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선물을 준비해 보내시죠."
"굳이?"
"화산신룡이 화산에 당도한 이후 선물이 도착한다면, 그도 어깨에 좀 더 힘을 줄 수 있을 것이고, 저희 역시 좀 더 생색을 낼 수 있게 됩니다."
"쯧쯧. 그런 정치로 접근할 이들이 아니다. 너는 아직 멀었구나."
"……죄송합니다. 그럼 선물은 없던 일로……."
"내 이름으로 크게 준비해 보내거라."
"……."
"……."
"뭐?"
"……아닙니다."
당잔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아들에게서 마침내 시선을 뗀 당군악은 미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중원이 그 녀석의 손아래에 놀아나겠군.'
하지만 이상하게도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이 밀려든다.
"화산, 화산. 어디까지 비상할지 지켜봐야지. 아니……. 나 역시 기꺼이 그 한쪽 날개가 되어 주마."
당군악의 눈이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 * *
"허억! 허억! 허어어억! 청명아! 이러다 죽겠다!"
"안 죽어, 안 죽어! 내가 달리다가 죽었다는 사람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
"야, 이 미친놈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천에서 섬서까지 뛰어가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적어도 말이라도 타자!"
"말보다 우리가 빨라."
"……그, 그건 그렇지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항의에 청명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구시렁거릴 시간에 한 발이라도 더 떼! 우리 다리가 빠지기 전에 장문인 목이 빠진다니까! 가서 쉬어, 가서! 화산만 가면 언제든 쉴 수 있어!"
"끄으으으으응."
간만에 집에 들렀건만 밥 한 술 못 얻어먹고 도망치듯 뛰쳐나온 조걸이 앓는 소리를 냈다.
달리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이 속도로 벌써 나흘째 달리고 있다. 이제는 입에서 단내가 나 따로 당과가 필요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켜잡은 조걸이 반쯤 넋이 나간 윤종을 잡아당긴다.
"사형! 정신 차리십쇼!"
"……적들."
"예?"
"……마적들한테 잘해 줄걸. 이렇게 힘든 건 줄 몰랐어."
"……."
아니, 이 사람은 이제 진짜 세상 모든 사람한테 잘해 주려고 하네. 정신 좀 차리쇼!
그때 밭은 숨을 내뱉던 백천이 살짝 의문 어린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청명아."
"응? 왜, 사숙?"
"당가는 왜 끌어들인 거냐?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돈을 나눌 사람이 아닌데."
"아, 그거?"
청명이 배시시 웃었다.
"돈 안 들어."
"……응?"
"그 돈은 사해상단에서 대기로 했어."
"……."
"물론 돈은 많이 들겠지만, 당가 무사들을 돈으로 쓸 수 있다는 게 어디야?"
"그, 그렇지."
아니, 잠깐.
진짜로 그런가?
"안 그래도 마적들이 득실대는데, 곡식과 차가 오간다는 말이 나오면 진짜 눈에 불을 켜고 개떼처럼 달려들걸? 그런데 거기에 독침 몇 방 놔 주면 모든 게 편안해지는 거지."
"……그것 참 명쾌한 이유로구나."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조걸이 눈을 부라리며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야! 그게 뭔 소리야! 그럼 지금 우리 집을 등쳐먹는다는 거냐?"
힘든 것도 잊고 달려드는 조걸을 보며 청명이 혀를 찼다. 그리고 냅다 궁둥이를 뻥 걷어차 버렸다.
"아니, 상인 집안에서 어떻게 이런 양반이 태어났지? 사해상단은 안전해서 좋고, 당가는 돈 벌어서 좋고, 우리는 안심해서 좋은 일인데 이게 왜 사기야!"
아무도 사기라고 하지 않았다, 청명아.
너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청명은 다시 달리기 시작하며 신나게 떠들었다.
"이제 한동안 사천이나 운남으로는 갈 일이 없을 테니, 우리가 안 가도 문제가 없도록 해야 돼. 그럼 돈이! 낄낄낄낄! 돈이 미친 듯이 굴러 들어올 거야!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는데 저들끼리 오고 가며 돈을 만들어 주는 거라고! 이보다 완벽한 일이 어디에 있어! 으헤헤헷!"
백천이 그런 그를 곁눈질로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일순간 청명의 눈이 엽전 모양으로 변한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 운남과 사천에 미안해지는군.'
죄송합니다.
그런데 당하는 건 그쪽뿐만이 아니니까 이해 바랍니다. 화산도 충분히 힘들어요…….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기."
"응?"
말없이 옆에서 달리고 있던 유이설이 살짝 멍한 눈으로 저 먼 곳을 가리켰다.
"화산."
"아……."
드디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구름에 휩싸인 깎아지른 절벽이.
더없이 웅장하게 솟아오른 거대한 산봉우리가.
"……다 왔구나."
"화산이다!"
길고 긴 여정이 끝나고 마침내 화산에 도착했다.
"가자!"
"예, 사숙!"
"네!"
화산의 제자들이 지체 없이 화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더없이 경쾌한 발걸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