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238화 (238/1,567)

238화. 여기가 지옥이구나. (3)

"흐으으읍."

"히이이이익!"

"헉! 허억! 허어어어억!"

수레는 기이할 정도의 속도로 나아갔다.

애초부터 장호채의 마적들은 그 실력이 마적치고는 꽤 출중한 편이었다. 그런 이들이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경공을 펼치는데 이동하는 속도가 느릴 리가 없었다.

"끄으으으으으……. 부, 부채주……. 저는 더 이상……."

"버텨! 야, 이놈아! 버텨야 한다!"

"모, 못 하겠습니다……."

"그럼 저기 올라갈래?"

방요의 말을 들은 마적이 슬쩍 고개를 돌린다.

그의 눈에 수레 위의 모습이 들어왔다.

쓰러질 듯 휘청이던 마적이 살짝 경기를 일으키더니, 이내 광기 어린 눈으로 수레를 움켜잡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그래! 버텨라!"

방요가 눈물을 머금고 수레를 밀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에선 단내가 나지만, 절대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저들이 괴롭히느냐고?

아니!

오히려 너무 잘 대해 줘서 문제다!

방요가 고개를 슬쩍 들어 짐수레 위를 바라본다.

그곳에선 다섯 명의 마적들이 청명의 옆에서 아주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누우라니까. 왜 자꾸 앉아서 그래?"

"괜찮습니다!"

"말은 누워서 쉬지 않습니다!"

부동자세로 목이 터져라 대답하는 마적들을 보며 청명이 고개를 까딱거린다.

"허어. 거참 말귀를 못 알아먹네. 편히 쉬라니까."

"저희는 정말 괜찮습니다!"

"편안합니다! 정말 편안합니다."

"너무 편해서 푹 잤습니다!"

방요가 눈가를 훔쳤다.

'사람이 어떻게 저리 악독할 수가 있지?'

곤명을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명은 그들 중 다섯을 수레 위로 올렸다.

워낙에 큰 수레를 구한지라 화산의 제자들 말고도 다섯 정도는 충분히 쉴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 뭐 하러 열 명이 동시에 끌어. 다섯 명씩 교대로 끌면 되지. 남는 시간에는 쉬고.

듣기에는 그들을 배려해 주는 말 같지만, 실상은 하루 열두 시진, 쉬지 말고 수레를 끌라는 소리였다.

뭐 거기까진 괜찮다.

달리는 수레 위라 조금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쉬는 시간이 생기는 게 어딘가?

하지만 희희낙락하며 수레 위로 올라간 이들은 그 쉴 자리라는 것이 청명의 옆인 것을 깨닫고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저긴 죽어도 안 가.'

'달리다 죽는 게 낫지!'

'차라리 지옥이 편하겠다. 염라대왕이 형님으로 모실 놈 같으니라고!'

수레를 미는 이들이 안쓰러운 얼굴로 위에서 쉬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죄다 무릎을 꿇고 사색이 되어선 덜덜 떨고 있었다.

그리고 청명은 그 옆에 비스듬하게 누워서 건초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배고프니?"

"아닙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이상하다. 하루는 굶은 것 같은데. 슬슬 배고플 때 되지 않았나?"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

"예! 저희는 원래 식탐이 별로 없습니다."

"쯧. 안 먹는다는데 억지로 먹일 수도 없고. 배고프면 언제든 말해. 밥 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청명이 하품을 하며 몸을 뒤집자 마적들이 피눈물을 흘려 댔다.

'건초가 밥이냐? 건초가 밥이야?'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죄는 이승에서 지었지, 이 새끼야.'

왜 그랬을까?

죄는 짓지 말고 살았어야 하는데.

그것도 이제 와선 너무 늦은 후회였지만 말이다.

"하여튼 푹 쉬어. 내가 이야기했잖아. 전에 온 것보다 딱 두 배만 빨리 가면 다 풀어 준다니까."

"예!"

"믿고 있습니다."

"대신……."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었다.

우둑. 우두둑.

"두 배 빠르게 도착 못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아서 상상해라."

"……."

"열심히 달려야겠지."

"바, 반드시 제시간 안에 도착하겠습니다!"

"그래. 배고프면 건초 먹고."

청명은 피식 웃으며 완전히 드러누웠다.

'아, 나 너무 착해졌다니까.'

예전이었으면 저런 것들은 마주친 그 순간 목을 뎅겅 잘라 버렸을 텐데.

청명의 미소가 마적들의 피눈물과 함께 더욱 짙어졌다.

* * *

"아직 소식이 없느냐?"

"예, 상회주님."

"흐음."

조평의 미간이 좁아졌다.

'으으음.'

아무리 애를 써도 걱정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들놈이 그 위험한 운남으로 가 여태껏 소식이 없지 않은가?

이제는 장성한 자식이라 믿고 기다리려 하지만, 부모의 마음이라는 게 또 그렇지 않았다.

"소식 하나 보내는 게 그리 어렵다는 말이더냐. 무심한 놈 같으니라고."

"운남에서 여기까지 소식을 전하기가 어렵다는 건 상회주님도 아시잖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조평이 한숨을 푹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평소엔 지금처럼 정원을 걷다 보면 갑갑했던 마음이 풀리곤 했으나, 오늘은 아무리 오래 거닐어도 속이 시끄러웠다.

"상회주님."

"알고 있다."

조평이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이리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수많은 상회원의 삶을 책임지는 사해상회주니까.

그가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전각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 순간이었다.

두두두두두두!

"응?"

조평이 고개를 획 돌렸다.

정문 앞으로 나 있는 큰길 쪽에서 커다란 발 구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이지?'

두두두두두두두두!

조평의 미간이 살짝 더 좁아졌다.

마치 대군이 진격하는 소리 같다. 게다가 그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마치 대군이 이쪽을 향해 진격해 오는 것처럼.

"무슨 일이냐?"

"제, 제가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총관이 부리나케 달려가 문을 움켜잡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정문이 돌연 거대한 폭음을 내며 터져 나갔다. 그 반동에 총관이 하늘 높이 튕겨져 나간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총관의 비명이 점점 멀어졌지만 조평은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터진 문을 통해 본 광경이 너무도 기괴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을 박살낼 기세로 커다란 짐수레를 끌고 들어온 이들이 점차 속도를 줄이고, 멍하게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 자리에서 픽픽 쓰러졌다.

그러더니 이윽고 눈물을 흘려 대기 시작했다.

"허어어억! 허억! 허어어어어억!"

"사, 살았다! 살았어!"

"으흐흐흐흐흐흐흐흑! 어머니! 제가 제시간에 도착했습니다!"

'대체 뭐지, 저놈들은?'

조평이 눈을 크게 뜨고 수레 옆에 드러누운 이들을 바라보았다.

옷은 너덜너덜해져 넝마나 다름없었고, 온몸이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었다. 꼴만 보면 지나가던 거지가 형님하며 고개를 숙일 판이다.

하지만 그 처참한 몰골과는 반대로 그들의 얼굴에는 벅찬 희열과 감동이 가득했다.

"끅……. 끄윽. 살았다! 살았어!"

"어흐흐흑! 부채주님, 저희가 해냈습니다!"

"그래, 그래. 다들 정말 고생이 많았다. 이 부채주는 감격스럽구나!"

뭐 하는 걸까?

별안간 벌어진 이 상황을 도통 이해할 길이 없었던 조평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때, 집수레 위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섰다.

"쓰읍!"

그러더니 훌쩍 뛰어내리며 혀를 찼다.

"이것들이 감히 문을 부수고 들어와? 여기 조걸 사형네 집인데?"

"히익!"

"헉!"

조평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자는?'

저자는 분명히 조걸의 사제인 청명, 그러니까 화산신룡이다.

그렇다는 건……?

"아이고. 허리야."

"끄응. 빨리 와서 좋기는 한데, 너무 흔들려서."

"멀미, 멀미."

"사, 사매! 얼른 내려! 여기에서 토하지 말고!"

짐수레에서 화산의 제자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사이에서 아들 조걸을 발견한 조평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걸아! 너 이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더냐?"

"아버지!"

조걸이 빠른 걸음으로 조평에게 뛰어왔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

덥썩!

하지만 조걸은 아버지의 말을 들을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손부터 움켜잡았다.

금방이라도 불을 내뿜을 것 같은 아들의 눈을 본 조평이 움찔하여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조걸은 그런 아버지를 놓아 주지 않겠다는 듯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아버지!"

"으, 으응?"

아들놈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는 건 처음 보았기에 조평은 적잖이 당황했다.

"곡식!"

"……."

"지금 당장 곡식을 사들여야 합니다! 성도에 있는 곡식을 모조리 확보해야 합니다!"

"……응?"

아니, 이놈이 돌아오자마자 인사도 안하고 다짜고짜…….

"그게 무슨 말이더냐?"

일단 상황부터 듣고 보려는 조평을 향해 조걸이 무섭도록 눈을 부라렸다.

"차!"

"……응?"

"차와 바꿀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조평은 상인. 그것도 사천의 십대 상가로 불리는 사해상회를 이끌어 온 유능한 상인이었다.

그는 조걸의 말속에 든 쓸 만한 정보를 순식간에 분리해 냈다.

"그러니까……."

살짝 정리를 마친 조평이 재빨리 입을 연다.

"네가 말하는 차는 당연히 운남의 차일 것이고."

"예!"

"그러니까 네가……. 아니, 이번에 함께 간 네 사문 분들이 운남의 차를 사 올 권리를 얻었다는 말이더냐?"

"예! 전매권을 얻어 왔습니다."

"……전매?"

그러니까 전매……. 운남의 차를 전매할 수 있는 권리…….

조평이 살짝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번개라도 맞은 듯 펄쩍 뛰었다.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저, 저, 저……. 전매! 전매권이라고 했느냐?"

"예!"

"곡식을 가져가면 차를 준다고?"

"그렇다니까요!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조평의 눈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운남차의 전매권. 곡식을 가져가면 차와 바꿔 준다.'

물어볼 것이 너무도 많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일단은 움직이고 나서 물어봐도 늦지 않는다!

"초, 총관! 총관은 어디 있느냐!"

"끄으으으으……. 사, 상회주님. 저 여기 있습니다요……."

연못에 빠져 서글픈 몰골이 된 총관이 거의 기다시피 다가왔다.

"지금 당장 성도의 곡식을 모조리 사들여라! 아니, 사천에 있는 곡식을 모조리 수매해야 한다! 가격은 두 배! 아니, 세 배까지도 감수한다! 움직여라! 당장!"

"예!"

"동시에 운남으로 갈 상행을 준비하거라! 한시가 급한 것 같으니 최대한 빠르게! 수매한 곡식을 싣고 갈 것이니 마차와 말을 충분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예!"

조평의 표정을 본 총관은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이 전력으로 전각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명령을 마친 뒤에야 조평이 조걸을 획 바라보았다.

"일단 네가 말하는 대로 했으니, 이제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에 대해서 설명 좀 해 보거라."

"예. 그러니까……."

조걸은 윤종과 함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명은 발길을 돌려 터덜터덜 걸었다. 어차피 설명이야 알아서 잘할 것이고, 이제 청명이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끄으으으……."

"다, 다리가 없어진 것 같아……."

"물 마실 힘도 없다."

바닥에 널브러진 마적들이 끙끙대며 다리를 주물러 댄다. 청명이 그 광경을 보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다들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다 도장님 덕분입니다!"

"그래, 그래."

청명의 얼굴에 만족감이 드리웠다.

마적들이 낮밤을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 준 덕분에 정말 갈 때보다 두 배는 더 빠르게 사천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그런데 도장님."

"응?"

"……이제 저희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장호채의 부채주인 방요가 슬그머니 물었다.

물론 그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제 저희를 풀어 주시는 겁니까?'

였지만 차마 청명에게 그 말을 대놓고 물어볼 용기는 없다.

"내가 너희를 데려다가 어디다 쓰겠냐?"

"……그, 그럼."

"걱정하지 마. 풀어 줄 테니까."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청명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타타타탓!

청명이 벼락처럼 손을 휘두르더니 마적들의 단전을 후려쳤다.

"끅?"

"끄으으윽!"

마적들이 아랫배를 움켜잡고 몸을 움츠렸다.

순식간에 자신들의 내공이 다시 금제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마적들이 의문 어린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도, 도장님?"

"이게 무슨……?"

하지만 청명은 태연히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에이, 거짓말 아냐. 진짜 풀어 준다니까."

"……예?"

다음 순간, 등 뒤에서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백천이 부서진 문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청명아. 모셔 왔다."

"어. 잘했어, 사숙."

모셔 와?

누굴?

방요를 비롯한 마적들이 불안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 걸까.

백천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건 바로 관인들이었다.

"……."

문을 박차고 들어온 관인들이 널브러져 있는 마적들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이놈들입니까? 그 장호채의 마적들이."

"……."

마적들이 망연한 눈으로 청명을 다시 바라보았다.

야.

설마…….

그리고 청명은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네, 얘들이에요. 얼른 잡아가세요."

"저……."

"저 개새……."

뭔가 항의를 하기도 전에 관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그들을 포승줄로 줄줄이 엮었다.

"이 죽일 마적 놈들! 그동안 잘도 날뛰었겠다!"

"너희는 참수형이다! 너희에게 죽어 간 사천 사람들이 한둘인 줄 아느냐!"

"끌고 가라!"

어버버 말을 잇지 못하고 맥없이 끌려가던 마적들이 일제히 청명을 돌아보았다.

"으아아아아아아! 이 사람 같지도 않은 새끼야!"

"저 말코 도사 놈이!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저 지옥 불에 떨어질 놈!"

악에 받친 원성이 난무했지만 청명의 얼굴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심지어 그는 귀를 후비적거리고는 손가락을 훅 불며 말했다.

"어디서 개가 짖나?"

결국 방요를 비롯한 마적들은 머릿속에 든 욕을 모조리 내뱉으면서 질질 끌려 나갔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백천이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뭐 문제라도?"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해 줬는데."

"그래 봐야 마적이지. 그리고 약속은 지켰잖아. 나는 풀어 줬어. 그런데 나라에서 잡아 간다는 걸 내가 뭘 어쩌겠어."

"……."

"그래도 좀 안타깝기는 하네. 건초라도 좀 챙겨 줄 걸 그랬나?"

아이고, 우리 청명이.

마음도 곱지.

마음도 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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