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237화 (237/1,567)

237화. 여기가 지옥이구나. (2)

"그렇게 됐습니다."

"……세상에."

화평상단의 행수 곽경이 입을 쩌억 벌렸다.

"그 야수궁의 협력을 얻어 냈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백천의 담담한 대답에 곽경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야수궁이 운남과 중원의 무역을 금한 지도 어언 백 년이 다 되어 간다. 막대한 이권이 걸려 있는 일이기에 사천의 상단들은 벌써 수십 년간 야수궁의 마음을 바꾸려 노력해 왔다.

하지만 그 오랜 기간 동안 총력을 기울였음에도 야수궁의 완강한 의지를 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걸 이 어린 도인들이 해냈단 말인가?

"그, 그럼 그…… 전매권이라는 건?"

"앞으로 운남의 모든 무역은 저희 화산의 이름으로 행해질 것입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도장, 그럼 저희는……!"

백천이 슬쩍 조걸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조걸이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했다.

"여기까지 저희를 데려다준 화평상단은 은혜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화산의 이름을 쓰는 상단은 운남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으니 지금까지와 달라질 게 없을 것입니다."

"아……."

곽경의 얼굴에 안도가 어렸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화산의 이름을 쓰는 이들이 운남에서 자유로이 상행을 할 수 있다는 말인즉슨, 화산이 앞으로 운남과 사천의 무역을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다시 말해, 앞으로는 화산이 운남의 무역권을 가지고 사천의 상가를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운남 차 무역은 막대한 이득을 발생시키는 일이고,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가들은 자금력의 한계에 부딪혀 순식간에 경쟁에서 밀려나고 말 테니까.

'지금 상행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상단주께 알려야 한다. 그래야 대책을 세울 수 있다.

무엇보다…….

곽경의 시선이 조걸에게로 향했다.

'사해상회'의 둘째 아들.

화산이 사천에서 직접 움직이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반드시 대리인을 두려고 할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고, 그 대리인은 사해상회가 될 확률이 높았다.

거기까진 계산을 마친 곽경이 만면에 화색을 띠고 포권 했다.

"축하드립니다. 큰 것을 얻으셨군요."

"별말씀을."

"그럼 이제 사천으로 돌아가시겠군요. 저희가 모시려고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상단의 일정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걸로 압니다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희도 마침 사천으로 돌아가려던 차라."

곽경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지금은 상행이고 뭐고 이들과 친분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더 좋은 것은 이대로 이들을 극진히 모셔 화평상단의 본단으로 바로 가 버리는 것이다.

상단주가 버선발로 박차고 나오는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백천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곽경의 기대를 단박에 무너뜨렸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저희는 따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시가 급한지라."

"여기서부터 사천까지 가는 길이 무척 험난합니다. 저희가 모셔다 드리는 게 가장 빠른 방편일 텐데요. 여기서는 말을 구하기도 힘듭니다."

"아, 그게……."

백천이 뒷머리를 긁었다.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찰나, 저쪽 길 끝자락에서 먼지구름이 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저기 오는 모양인데요?"

"네?"

백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곽경이 두 눈을 부릅떴다.

"으아아아아아아!"

"달려! 달려!"

"이히히히히히힝!"

커다란 짐수레에 달라붙은 마적들이 혀를 빼고 헐떡이며 이쪽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끄윽!"

"도, 도착!"

그들의 앞에 멈춰 선 마적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엎어져 숨을 할딱댔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을 보고 있으니 측은지심이 절로 일었다.

"이, 이게 무슨 일……."

곽경은 황당한 기색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얼굴로 쓰러진 마적들을 바라보았다.

'왜 하나같이 입에 건초를 물고 있는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뿐이었다.

그때, 짧게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마적들이 끌고 온 짐수레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리 허약해서 사천까지 갈 수 있겠어?"

그 말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마적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가, 갈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하나도 지…… 지치지 않았습니다! 진짭니다!"

"살려 주십쇼!"

그러자 청명이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휴. 내가 도사만 아니었어도."

마적들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이게 도사가 할 짓이냐!'

'언제부터 도사가 악마를 부르는 말이 되었나. 세상에 언제 이리 각박해졌단 말인가?'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명은 짐수레에서 훌쩍 뛰어내려 백천을 향해 터덜터덜 다가갔다.

"말 몰아 왔어."

"……저 입에 건초는 뭐냐?"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배고플 것 같아서. 먼 길 떠날 말들인데 잘 먹여야지."

"……."

백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청명아."

"응?"

"저들이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나, 죄인이라고 해도 사람대접은 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응?"

동정심이 묻어나는 조언에, 청명이 고개를 슬쩍 돌려 마적들을 바라보았다.

"들었지? 니들 사람대접 좀 받아 볼래?"

마적들이 사색이 되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말입니다! 아니, 저희가 무슨 말씩이나 되겠습니까! 소나 개쯤으로 취급해 주십시오!"

"저는 절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될 바에는 그냥 죽겠습니다!"

"음모어어어어! 음머어어어어어어!"

"……."

아비규환을 보며 백천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렇다는데?"

청명이 씨익 웃는 꼴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대체 뭔 짓을 하면 사람이 저렇게 되는 거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백천이 고개를 내젓는데 청명이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 사천까지 빨리 가면 풀어 주기로 했어."

"오? 그래?"

"응. 여기까지 온 것보다 두 배만 빨리 돌아가면 돼. 그럼 살려서 보내 줄 거야."

"……못 하면?"

"으음. 그게……."

청명이 조금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의 반응에 백천이 다시 물었다.

"왜?"

"아니. 이걸 내 입으로 말하는 게 과연 사숙, 사형들의 교육과 저것들의 사기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정말로 듣고 싶어?"

"……아니. 그냥 안 들으련다."

세상에는 모르는 게 나은 일도 있는 법이다.

백천이 뭔가 첨언할까 하다가 끝내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어쨌건 저들이 참수를 당해도 변명하지 못할 죄인인 것은 틀림없으니까.

백천이 몸을 돌려 곽경을 바라보았다.

"여하튼 그리되었으니,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세한 것은 화산의 이름으로 따로 입장을 표할 것이니 기다려 주십시오."

"아……. 이리 가시면……."

곽경이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이들을 잡아 둘 명분이 없었다.

화산의 제자들이 모두 짐수레에 올라타자 청명이 목소리를 높인다.

"자, 가……!"

"저기……."

"응?"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청명의 말이 뚝 끊어졌다. 고개를 획 돌리니 웬 작은 아이가 자기보다 더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엥?"

"아. 너는……."

짐수레에 타 있던 윤종이 아이를 보고는 수레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주저 없이 아이에게 다가갔다.

윤종이 가까이에 오니 우물쭈물하던 아이가 허리를 푹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

"덕분에 동생이 배를 채웠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윤종이 말없이 아이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절대 이, 잊지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보던 청명이 슬쩍 주위를 돌아보았다.

골목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고개를 내밀더니 주춤주춤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몇몇 아이들은 수레까지 다가와 감사를 전하고, 다른 몇몇 아이들은 멀찍이서 고개를 숙인 뒤 종종 걸음으로 돌아간다.

어떤 아이는 윤종의 손에 매달렸고, 또 어떤 아이는 윤종의 옷자락을 잡고 울상을 지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티 없는 진심이 느껴졌다.

청명은 슬쩍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참."

장문사형.

뭐…….

나는 끝끝내 장문사형이 원하는 사람은 되지 못하겠지만…… 그런 사람이 될 제자는 있는 것 같수.

좋으십니까?

어쩐지 하늘 위에서 장문사형이 빙그레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사형! 그만 가자."

"으음, 알았다."

"빨리 가야 사천에서 쌀 사서 보낼 거 아냐? 여기에는 이제 돈을 풀어도 살 곡식이 없다며."

"그랬지."

윤종의 얼굴이 단호해졌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머물러 있는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준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참고 버티거라. 그러면 이제 더는 굶주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네."

기대감 따위는 조금도 없는 얼굴들이었다. 아마 수도 없이 들은 말일 테니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다. 그의 도는 행하는 것이지 위로하는 것이 아니니까.

마지막 아이의 머리를 헝클어뜨린 윤종이 아이들을 지나 수레에 오른다. 그리고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가자! 한시가 급하다!"

"……."

"뭐 하느냐?"

"아. 알았어!"

청명이 피식 웃고는 마적들을 불렀다.

"가자, 이놈들아!"

"예!"

청명이 소리를 치자마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마적들이 어디서 힘이 샘솟았는지, 벌떡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후다닥 짐수레에 들러붙었다. 앞에서 넷이 끌고, 뒤에서 넷이 밀고 좌우로 하나씩 붙는다.

"다리가 부러지도록 밀어! 알았어?"

"예, 도장님!"

짐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명은 슬쩍 아이들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거두었다.

"가자!"

"으랴아아아아아아아아!"

"이히히히히히히히힝!"

마적들이 저마다의 기합을 내지르며 짐수레를 밀고 끌기 시작했다. 이내 '수레'라는 이름과는 전혀 걸맞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짐수레가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먼지구름을 풀풀 피워 올리며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아이들이 입을 헤에 벌렸다.

그리고 그 광경을 빠짐없이 지켜보던 곽경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폭풍 같군, 정말."

"행수님, 어쩌시겠습니까?"

"뭘?"

"지금 당장 이 사실을 상단에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지."

"상행을 돌리겠습니다."

곽행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럴 것 없다. 말 한 필 내어 주고 한 사람만 보내거라."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

곽행수의 마음은 외려 조금 전보다 편해진 느낌이었다.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어느 상단이 주도권을 잡아도 이권이 요동치는 건 피할 수 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저 화산이 전권을 잡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잘 가."

"고마워요."

열심히 손을 흔드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더욱 그런 확신이 들었다.

'도가라.'

곽행수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우습지도 않은 일이지.'

도가니 불가니 하는 것들의 위선을 얼마나 겪어 왔던가?

겉으로는 양민들을 위한답시고 입바른 소리를 하면서 뒤로는 한 푼이라도 더 챙기기 위해 온갖 수작을 해 대는 그들에게 이미 숱하게 치를 떨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 이런 생각이 들다니…….

곽행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을 지켜본 것만으로 저들을 판단할 수는 없다. 어쩌면 저들 역시 곧 본색을 드러내고 운남인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려 할지도 모른다.

다만…….

곽행수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우르르 몰려나와 멀어지는 짐수레를 배웅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곽행수의 가슴속에도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왔다.

'조금은 다를지도 모르지.'

자신의 검을 팔아서까지 아이들을 먹이려 했던 윤종의 행동. 그리고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눈빛.

그것만으로도 미묘한 기대감이라는 게 생겨났다. 상인으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짐수레의 뒤꽁무니를 보며 곽행수는 자신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살펴 가시길."

화산의 도인들이여.

"달려! 달리라고 이 새끼들아! 어디 다리에 힘을 빼! 눈알에 먹물을 뽑아 버릴라!"

"……."

"제시간에 사천에 도착 못 하면 니들도 죽고 나도 죽는 거야!"

"……끄으으으으."

마적들이 죽을 각오로 혀를 빼물며 짐수레를 끌고 달렸다.

그리고 그 뒤에 앉은 한 사람이 입에 거품을 물고 마적들을 협박하며 속력을 높였다.

화산의 제자들이 아연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봤다.

"왜 저래?"

"……애들한테 곡식 사 먹여야 한다는 말이 결정타였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그러게."

마적들을 구박하는 건 청명이 아니라 윤종이었다.

차라리 청명이 착해 보일 정도로 극심한 구박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뭐?

도기(道器)?

허허.

허허허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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