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여기가 지옥이구나. (1)
"낄낄낄낄."
"……."
"크흡."
"……."
"끼이일낄낄끼일낄!"
"……."
윤종이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라질.
오늘따라 하늘은 왜 저리도 맑은가?
청명이 '크으'하며 박수를 치더니 돌연 어깨를 쭉 펴고 굉장히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조금 전의 윤종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허어어어?"
그러자 재빨리 청명의 앞쪽에 선 조걸이 그 흉내를 받아 놀라는 시늉을 했다.
"저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할 뿐입니다! 그게 저의 도입니다!"
"허어어어어?! 네게 도가 있구나!"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낄낄낄낄낄낄낄!"
청명과 조걸이 자지러졌다. 윤종은 눈시울을 붉히며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몰래 눈가를 훔쳤다.
'저 사갈 같은 것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대충 넘길 것을. 대체 왜 할 말, 못 할 말 구분하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떠들어서 이 고초를 겪는단 말인가?
"크으! 화산에 도인이 났구나!"
"청명아. 화산이니까 원래 도인이 난다."
"아, 그렇지. 그럼 화산에 참도인이 났구나!"
"도기지. 도기!"
"크으으으으으! 사형! 이 사제는 정말 감탄했습니다!"
청명아.
차라리 그냥 패라.
말로 패지 말고 주먹으로 좀 패 주면 이 사형이 참 고마울 것 같은데.
눈가에 다시 핑 돈 눈물을 닦아 낸 윤종이 간절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염원을 이해한 백천이 살짝 헛기침을 하고는 청명과 조걸을 돌아본다.
"너희도 이제 그만하거라!"
"에이."
"예. 알겠습니다, 사숙."
신나게 놀리던 둘이 수그러들자 백천이 짐짓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화산에서 큰 도인이 나셨는데 그리 놀려서야 되겠느냐. 너희는 윤종을 놀릴 게 아니라 그의 도를 본받아야 할……. 푸웁!"
"……."
백천이 입가를 틀어막았다.
"사숙……."
"아, 미안하다. 자꾸 생각이……. 푸후후훕!"
백천마저 무너지자 청명은 그 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게 제가 화산의 제자로서 가진 소명입니다!"
"아! 하지 말라고!"
"흐지 믈르그! 낄낄낄낄낄."
청명이 자지러졌다. 눈물까지 빼 가며 웃는 그를 보고 있느니 도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인가 한없이 상념에 빠지고 마는 윤종이었다.
턱!
윤종의 어깨에 손을 올린 백천이 몇 차례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연다.
"창피해할 것 없다."
"……."
"너는 훌륭했다. 네가 잘못된 게 아니라. 우리가 못나서 그렇다."
"크으! 그렇지요. 제가 이리 대단한 사형을 두었다니! 이 청명 아주 가슴이 훈훈합니다! 사형! 이제 사형만 믿고……."
"에라이!"
백천이 손을 비비며 다가오는 청명을 걷어차 멀리 날려 버렸다.
"저 마구니 같은 놈."
"……사숙도 웃으셨잖습니까."
"미안하다."
백천이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막는다.
"끄읍. 끄읍……."
"낄낄낄낄."
"크크크크크크크."
여기가 지옥이구나.
여기가 지옥이야.
절망과 창피함에 몸서리치는 윤종을 보며 백천은 몰래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오늘 윤종은 정말 훌륭했다. 아무리 완벽한 논리를 가져다 댄다고 해도 감정이 상해 있는 그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윤종은 그들을 논리가 아닌 자신의 도로서 설득해 냈다.
'정말 큰일을 해냈지.'
덕분에 화산은 운남과의 우호를 제대로 다질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운남산 차의 전매권을 손에 넣었다는 건 사소하게 여겨질 정도다.
세외사궁 중 하나인 남만야수궁과 우호를 다졌다는 건 정말 굉장한 일이었다.
'이번 운남행에서 생각지도 않은 것들을 많이 얻게 되는군.'
야수궁도 야수궁이지만, 당가와도 동맹을 맺었다. 중원의 서쪽에 있는 가장 강대한 세력들과 연계할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목초는 잘 챙기고 있겠지?"
"저 보십쇼."
백천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청명이 자목초 자루를 아주 제 몸에 똘똘 감고 있다. 청명을 죽이기 전에는 절대 자목초에 손을 댈 수 없을 듯 보였다.
"……저쯤 되면 황궁보고보다 더 안전해 보이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피식 웃은 백천이 살짝 목을 가다듬었다.
"다들 모여 보거라."
"예! 사숙."
조걸과 윤종, 청명과 유이설이 백천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우선…… 이런 말을 하기에는 조금 이를지 모르겠지만 다들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사숙."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우리의 목적은 자목초를 구하는 게 아니라 자목초를 무사히 화산까지 가져가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 더!"
청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가져가는 거지."
"그렇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지금까지 힘들었던 것 알고 있다. 하지만 휴식은 화산에 돌아간 다음 취하도록 하자꾸나."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사숙!"
"그래. 그럼 일단은…… 화평상단과 다시 조우를 해야 할 텐데."
"응? 걔들은 왜?"
청명의 말에 백천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래야 운남을 빠져나갈 것 아니더냐."
"뭐 하러. 마차야 사면 그만이고. 말은 있잖아."
"응? 말……."
백천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아……."
"너, 너무 배가 고픕니다. 부채주님."
"……."
"이러다 정말 죽겠습니다."
"구걸도 안 됩니다. 여기 인심이 너무 각박합니다……."
"뱃가죽이 등가죽에 달라붙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벗겨 먹을 나무껍질도 없습니다."
쏟아지는 하소연에 장호채의 부채주, '방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청명이 그들의 내공을 금제하고 떠난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내공 한 점 없이 머나먼 외지에 남겨진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시간을 때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겠느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을."
"차라리 도적질이라도 다시 좀 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내공도 없는데 뭔 놈의 도적질이냐?"
"내공이 없다고 저희가 양민한테 지기야 하겠습니까?"
"……뒷감당은 누가 하고?"
"……."
방요가 눈물 맺힌 눈으로 말했다.
"갑자기 곤명에 도적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면 당연히 우리가 의심 받을 수밖에 없는데……. 너희 그 악마 같은 새끼를 감당할 수 있겠냐?"
악마 같은 새끼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그들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개도 안 물어 갈 놈."
"마적보다 더한 새끼!"
떠올리는 것만으로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들은 마적이다.
마적은 곧 도적이고, 도적들은 대체로 도덕이 결여되어 평범한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이 있는 이들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마적이 되지는 않는다. 아니, 설사 너무 힘들어서 잠시 도적질을 할 수는 있을지라도 평생 마적질을 하며 살겠다고 결심하지는 않는 법이다.
쉽게 말해 마적질을 하겠답시고 모여든 놈치고 제정신 박힌 놈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도 그 청명이라는 놈은 도를 넘었다. 하늘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종자를 세상에 내보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꼼짝없이 이러고 기다려야지!"
"그러다 굶어 죽으면요?"
"그게 낫지. 맞아 죽는 것보단."
"끄으으으으응."
마적들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어쩌다 그런 마귀 놈을 만나서 이 꼴을 당하는가?
"아서라. 내가 보기에 그놈은 건수 하나 물면 웃으면서 우릴 때려죽이고도 남을 놈이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 놈이 대체 뭘 먹고 컸기에……."
마적 중 하나가 울상으로 방요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희 진짜 어떻게 합니까? 풀려날 수는 있습니까?"
"난들 어찌 알겠느냐!"
"부채주님. 이러다 그놈이 돌아오면 온갖 고초는 다 겪다가 결국 맞아 죽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차라리 지금이라도 도망을 치는 게……."
"내공도 없이 어떻게 살라고!"
"그래도 어떻게 사천까지만 돌아가면 무슨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천? 너 사천이라고 했냐?"
"예. 그래도 거기는 저희 터가 있으니까……."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방요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우리가 사천에 쌓은 원한이 몇이냐! 그런데 우리가 내공을 잃어 양민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우릴 죽이겠다고 도끼를 뽑아 들고 쫓아올 놈들이 백은 넘을 것이다!"
"그래도 산채에 보호를 요청하면……."
"산채가 우릴 보호해 줄 것 같으냐? 채주는 팔 하나 잘려서 창을 제대로 못 든다고 멀쩡한 놈을 호랑이 밥으로 던져 주는 사람이다. 그런 인간이 내공을 잃은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
방요가 그런 수하들을 보며 혀를 찼다.
"아서라, 아서. 지금은 그냥 배 움켜잡고 여기서 버티는 게 최상이다. 그놈이 우릴 괜히 풀어놨을 것 같으냐? 제발 사고 치라고 빌고 있을 것이다. 사고만 치면 바로 때려죽이려고."
"잘 아네."
"그래. 뻔하다니까. 그 악독한 놈이 생각하는 거야 뻔하지."
"그렇게 악독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소리냐! 내 살면서 그토록 악독한 놈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차라리 마적이 착하지, 마적이! 내가 내 직업에 단 한 번도 자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는데 그놈 때문에 없던 자부심이 생겼다니까."
"호오오오. 그럼 참 좋은 일이네."
"그렇지. 그게 참 좋은……. 응?"
방요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돌아가는 그의 시선에 사색이 되어 있는 그의 부하들의 얼굴이 먼저 들어온다.
직감적으로 뭔가를 느낀 방요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한다.
"……."
마침내 고개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완전히 돌아갔을 때, 방요는 방긋방긋 웃고 있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세상이 멈춘 것 같다.
전신으로 식은땀을 삐질삐질 뿜어낸 방요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덜덜 떨며 입을 연다.
"어, 언제 오셨……."
"방금."
"그럼 혹시 방금 저와 말을 나눈 게……."
"응, 나야."
"……."
방요의 얼굴이 질리다 못해 검게 죽기 시작했다.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 청명을 보고 있으니 경기가 일어날 지경이다.
"바, 방금 그 말은 제 본심이 아, 아니라……."
"괜찮아. 괜찮아."
청명이 손을 뻗어 방요의 어깨를 두드렸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없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하는 법인데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죄, 죄송합니다."
"괜찮다니까."
청명이 흐뭇하게 웃었다.
"내가 그리 박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래 봬도 내가 도인이거든. 다 이해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도인?
이 새끼 도인이었다고?
'뭔 씨알도 안 먹힐 개소리를 하고 있어! 세상에 너 같은 도사가 어디 있다고!'
방요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라렸다.
그 불량스러운 눈빛을 보며 청명은 더욱 흐뭇하게 웃었다.
"도인이 왜 도인인 줄 아느냐?"
"그, 글쎄요."
"상대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들어도 오히려 베풀 줄 알아야 도인인 법이다. 내가 사형에게 그걸 배웠지. 그러니 나도 너희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해 왔다."
"예?"
청명이 뒤쪽으로 성큼성큼 가더니 뭔가를 한 아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방요의 앞에 툭 하고 던진다.
"……이건?"
방요가 고개를 갸웃한다.
청명이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건초였다.
하지만 추운 곳이라면 모를까 이 더운 운남에서 건초가 무슨 소용이 있다고…….
의아해하는 방요를 보며 청명이 흐뭇하게 웃는다.
"보다시피 건초다."
"그건 알겠습니다만 이걸 왜……."
"뭐니 뭐니 해도 선물은 먹는 게 제일 좋은 법이지."
"……예?"
"먹어."
"……."
방요가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먹으라고?
건초를?
"이, 이걸 어떻게 사람이 먹습……."
"사람?"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던 청명이 서서히 눈을 크게 떴다.
"……."
검은 눈동자에 살기가 어려 번들거렸다.
"여기에 사람이 있다고? 말이 아니라?"
"……."
"잘 생각해라."
"예?"
"말은 그럴 수 있어. 말이 뒷담을 깐다고 화를 내는 건 이상하니까. 그런데 사람이면……."
우드드드득.
청명이 움켜쥔 기둥이 그대로 으스러진다.
"주둥아리를 나불댄 대가를 받아야겠지!"
"……."
"먹고 말 할래? 아니면 안 먹고 사람 할래?"
대답은 즉시 나왔다.
"먹겠습니다!"
"저희 건초 좋아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생각을 해 주시다니!"
청명이 다시 흐뭇하게 웃는다.
"그렇지? 많이 먹어라."
"예!"
건초를 움켜잡는 마적들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만나지 말아야 할 이를 만난 대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