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그쪽이 왜 그러세요? (5)
윤종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려 있다. 야수궁도들, 그리고 야수궁의 호법들과 야수궁주까지.
다리가 살짝 후들거리는 느낌이다.
그 순간 우렁우렁한 야수궁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자 하니 그대는 곤명에서 사재를 털어 빈민들을 구휼했다고 하더군."
윤종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입을 열어 대답을 하려 들면 목소리가 떨려 나올 것 같아서다.
"어째서인가?"
"……예?"
야수궁주가 다그치듯 말한다.
"그대는 중원인이다. 그대는 이곳에 임무를 지니고 왔다.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했는가? 눈에 띄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었을 텐데?"
윤종이 입을 꼭 다문다.
이미 조걸과 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살짝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윤종이 고개를 들어 야수궁주를 바라본다.
"질문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어찌하여 그런 일을 했느냐 물었다."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으음?"
윤종의 떨림이 멈춘다. 이윽고 낮게 심호흡을 한 그가 고개를 들어 똑바로 야수궁주를 응시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
예상치 못한 대답에 야수궁주가 당황한 듯 살짝 움찔했다.
"운남인이든 중원인이든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눈앞에 도와야 할 이가 있으면 돕는다. 저는 사문에서 그리 배웠습니다."
당당히 말하는 윤종을 보며 청명과 조걸이 작게 속삭인다.
"물론 좀 과하긴 했지."
"으음. 많이 과했지."
저것들이…….
"크흐흠."
크게 헛기침을 한 윤종은 이내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얼굴로 궁주를 직시했다.
"그럼 너는 다음에 그런 경우를 만나면 똑같이 하겠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윤종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도라는 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도를 도라고 부르면 그건 더 이상 도가 아니듯이 상황과 마음이 다를진대 어찌 같은 상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제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할 뿐입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라."
야수궁주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렇다는 건 그때는 그저 돕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뿐이란 거군."
"예."
"사문의 검마저 팔아 가며 말이지."
"……."
거 자꾸 검 가지고 그러시네.
"반성하고 있습니다."
"후회한다는 뜻이냐?"
"반성합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윤종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궁주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이상한 말이로군. 그게 무슨 의미더냐?"
그러자 윤종은 잠깐 말을 고르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조금의 시간이 걸리고서야 입을 열었다.
"제가 함부로 일을 벌여 사형제들을 위험에 처하게 한 것은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자책해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도운 것을 부끄러워할 수는 없습니다."
윤종이 살짝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떠 야수궁주를 바라본다.
"화산은 제 모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제 행동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화산이라면 그깟 검 따위보다는 굶주리고 있는 이들의 안위를 더 중요하게 여겼을 겁니다. 저는 적어도 그리 배우고 그리 행해 왔습니다."
"사문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말이더냐?"
"화산이 죽어 가는 이들보다 검이 더 중요하다고 제게 가르칠 리가 있겠습니까!"
자꾸 시험에 들게 하는 듯한 말투에 점점 윤종의 목소리에 노기가 차올랐다.
"산에 올라 도를 논하는 도인이란 결국 속세의 풍파를 외면하고 스스로의 안위만을 쫓는 이기적인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도인은 세상을 알고 살펴야 한다, 도는 마음에 담는 게 아니라 그 손과 발로 행하는 것이다!"
윤종의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똑똑히 울렸다.
"제가 아는 장문인이라면 검이 아니라 수염이라도 팔아서 그들을 구휼하려 했을 겁니다. 물론 화산의 영광은 중요합니다. 하나, 세인들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면 도대체 그 영광은 무얼 위해 존재하는 겁니까? 알량한 도인들의 즐거움을 위해서입니까?"
점차 그의 어깨가 당당하게 펴졌다.
모든 미혹이 그의 안에서 깨어지고 다시 정립된다.
"저는 지금까지 찾아 왔습니다. 어째서 화산이어야 하는가? 어째서 화산이 과거의 영광을 찾아야 하는가? 그 대답이 뭔지 아십니까?"
"무엇이더냐?"
"그런 이유 따위는 없습니다!"
"……."
이상한 대답이다.
하지만 정작 윤종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차 있다.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이유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겁니다. 화산의 영광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좀 더 편히 만든다면, 화산의 모든 제자들은 당당히 그 영광을 자랑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그저 화산만의 영광에 머무른다면, 화산은 그저 언제든 다른 문파로 대체되어도 상관없는 무파가 될 뿐입니다!"
윤종의 목소리에 단호한 결의가 맺혔다.
오랫동안 찾아온 의문에 대한 해답.
그 해답이 지금 그의 입을 통해 세상에 전해지고 있었다.
"저는 화산을 대체할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갈 겁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화산의 영광을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갈 겁니다! 그게 화산의 제자로서 제가 가진 소명입니다!"
야수궁주가 몸을 떨었다.
'어찌 저런…….'
확고하다.
그 방향이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저 아이는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무인으로서의 역할, 그리고 무와 도를 동시에 추구하는 이로서 추구해야 할 것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
저 나이의 야수궁도 중 단 하나라도 저 아이만큼 깊은 통찰을 보이는 이가 있겠는가?
'화산이라.'
매화검존을 배출한 문파.
그 검술의 위대함에 대해서만 전해 들었건만…….
'그래. 화산은 도가였지.'
도를 추구하는 도인들이 만든 문파가 화산이다. 그리고 그 도는 분명 저 아이에게로 이어졌다.
듣고 있는 야수궁주가 절로 고개가 숙여질 만큼 말이다.
야수궁주가 눈을 감았다.
현실이라는 명목하에 위험을 피해 온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다.
'부끄럽지 않게.'
야수궁주가 눈을 번쩍 떴다.
"궁도들은 들어라!"
"예!"
"지금 이 시간부터 중원의 모든 상단들의 운남 출입을 불허한다!"
"예!"
"앞으로 운남과 중원의 무역은 오로지 화산을 대리하는 상단과만 행해질 것이다!"
"구, 궁주님!"
"다시 생각을……."
"닥쳐라!"
야수궁주가 노기에 가득 찬 고함을 내질렀다.
"대체 얼마나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들 셈이냐! 운남과는 하등 관계도 없는 이가 제 검을 팔아 운남의 빈민들을 먹이려 하는데, 야수궁의 궁주인 내가 그깟 유훈을 지키겠다고 그들을 외면하라는 소리더냐? 너희가 정녕 원하는 긍지라는 게 그것이냐!"
야수궁주의 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지금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저들의 말에 틀린 것이 있더냐! 선대께서 운남인들이 굶주리길 바라시겠느냐? 그런 선대라면 우리 역시 존중할 필요가 없다. 저승에 가 선대를 만난다면 내가 먼저 어깨를 펴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런 유훈보다 운남인들이 더욱 소중했다고 말이다!"
호법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들이라 해서 왜 운남인들을 아끼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때 선두에 선 호법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더니 야수궁주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뜻대로 하십시오. 궁주님."
"……."
"저승에서 선대를 만나는 건 제가 먼저일 테니, 제가 먼저 목을 빼고 용서를 빌겠습니다. 저 하나 욕을 먹고 운남의 백성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뭐가 문제겠습니까."
"……일 호법."
"길었지요. 너무도 긴 세월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충분히 할 만큼 한 것 같습니다. 저희가 늙고 무지하여 그것을 몰랐습니다. 저 화산의 도장 덕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헛된 것을 쫓고 있었음을.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지요."
야수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라!"
"예, 궁주님!"
"더는 이견을 허락지 않겠다! 너희가 나를 야수궁의 궁주로 인정하고 내 권위를 존중한다면, 이 일에는 더는 토를 달지 말라! 나는 화산에 전매권을 주어 중원과의 무역을 재개할 것이다!"
"복명!"
야수궁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야수궁주 맹소가 모두를 한번 둘러보고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저벅저벅 걸어 청명과 윤종의 앞에 선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감사하다는 말 외에는 할 것이 없군."
"별말씀을요. 잘 풀려서 다행이에요."
청명의 말에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매화검존의 후예들을 야수궁의 손님으로 받아들였네. 하지만 그건 다른 사심이 끼어든 조치였지."
"……."
"하나 지금 이 순간부터는 아니네. 나는 매화검존의 후예가 아니라 화산의 제자인 자네들을 야수궁의 손님이자 벗으로 인정하겠네. 앞으로 화산의 제자들은 운남 어디에서도 야수궁의 문도와 다르지 않은 대접을 받을 것이며, 결코 중원인이라는 이름으로 차별을 받지 않을 걸세!"
백천이 앞으로 나섰다.
청명과 윤종이 좌우로 물러나고 가운데로 나선 백천이 야수궁주를 향해 포권 했다.
"궁주님의 배려에 화산을 대표하여 감사드립니다."
"잘 와 주었네. 정말……."
야수궁주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운남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야수궁주는 고개를 내리더니 백천의 손을 꽉 잡았다.
"정말 잘 와 주었어."
"저희 역시 운남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백천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수궁주가 이번에는 윤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윤종 도장."
"예, 궁주님."
"내 윤종 도장 덕에 많은 것을 배웠소. 비록 나는 무지렁이라 도가 무엇인지, 바른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화산에 도가 있음은 알았소이다."
"부끄럽습니다."
"때때로 운남에 들러 그대의 도를 가르쳐 주시오."
"저는 그저 배움의 길에 있는 어린 도사에 불과합니다. 장문인과 장로님들이 가지신 큰 도에 비한다면 제가 가진 도는 그저 삿된 이의 망발에 불과합니다."
"하하하핫. 그렇다면 우리가 장문인을 찾아뵈어야겠군. 그분께 이 먼 길을 오라 할 수는 없으니 말이야."
호쾌하게 웃어젖힌 야수궁주가 뿌듯한 얼굴로, 이번엔 청명의 어깨를 팡팡 내려친다.
"화산에 도가 있고, 무(武)가 있으니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일도 머지않았구나. 야수궁이 그 한 축을 담당할 수 있겠느냐?"
"에이. 사서 고생하신다는데 저희가 말릴 수 있나요?"
"뭐라? 크하하하하하하핫!"
야수궁주가 정말로 신나게 청명의 어깨를 마구 내리쳤다.
"……저 이러다 죽어요."
"아차. 그렇지!"
거의 무릎까지 땅속에 박혔던 청명이 끄응 하고 신음을 내며 발을 뽑았다.
그리고 투덜거렸다.
"여하튼 잘 풀린 건 잘 풀린 거고, 계약은 계약이니까요. 그 내용은 엄수해 주세요."
"당연한 말이다. 남아일언중천금이지!"
"네, 믿을게요. 친구니까요."
"하하하! 그래, 친구지!"
서로에게 미소를 보인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그래. 며칠 더 쉬다 가겠느냐? 새로 빚은 도원향이 익을 때가 되었는데."
"으음. 정말 귀에 착착 달라붙는 소리지만……. 이제는 돌아가야 할 것 같네요."
"벌써?"
"네. 저희가 돌아오기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청명이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오래도 떠나 있었네.'
벌써 그리워진다.
깎아지른 듯 가파르기만 한 산세가.
제단에서 풍겨 오는 향내가.
그리고 그들을 보며 활짝 웃는 장문인과 장로들의 웃음소리가 말이다.
"화산의 제자는 화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법이죠. 이제는 그만 가야 해요."
"아쉽군."
"걱정하실 것 없어요. 다시 보게 될 테니까요. 운남에 문제가 생기면 저희가 바로 달려올게요."
"하하하. 더없이 든든하구만!"
아쉬워하는 야수궁주와 인사를 나눈 화산의 제자들이 봇짐을 짊어지고는 야수궁의 정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손님께서 떠나신다."
쿵!
쿵! 쿵! 쿵! 쿵! 쿵!
도열해 있던 야수궁도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 많은 무인의 발 구름에,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이 흔들린다.
"야수궁은 친구를 잊지 않는다!"
"야수궁은 친구를 잊지 않는다!"
야수궁주의 선창에 야수궁도들이 목이 터져라 복창했다.
화산의 제자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쪽을 바라보며 발을 구르는 야수궁도들의 모습이 두 눈에 똑똑히 박혔다. 그 모습에 온갖 감회가 스치며 살짝 울컥한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들어올 때는 잡혀 들어왔지만, 떠날 때는 친구가 되어 떠난다.
"다시 뵙겠습니다!"
백천이 크게 소리를 치고는 그들을 향해 포권 했다.
그리고 살짝 남은 미련마저 털어 버리며 몸을 돌렸다.
헤어짐은 깔끔할수록 좋은 법.
다시 만날 테니 아쉬워할 이유도 없다.
그러니…….
이제는 돌아가자.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화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