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그쪽이 왜 그러세요? (4)
중앙 전각 앞에 펼쳐진 드넓은 연무장.
그 좌우로 야수궁도들이 늘어섰다. 구릿빛 근육으로 우락부락한 무인들이 얼굴을 굳히고 도열한 모습은 위압적이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늘어선 이들의 사이에 화산의 제자들이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건 또 뭐 하는 거냐?"
"청명아?"
영문도 모르고 끌려 나온 화산의 제자들은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어깨를 으쓱하고 백우선으로 얼굴이나 부쳐 댔다.
"아, 별거 아냐. 금방 끝나니까 그냥 구경만 하면 돼."
"……."
네가 별거 아니라고 한 것치고 정말 별것 아닌 게 없었단다, 청명아.
그러니 나중에 놀라게 하지 말고 지금 이 사숙에게 설명해 주지 않으련?
하지만 안타깝게도 백천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청명에게 채 다시 묻기도 전에 앞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야수궁주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음?"
야수궁주를 본 백천은 살짝 당황했다.
평소의 그 호방하던 야수궁주의 모습이 아니다. 물론 패기 넘치는 발걸음은 여전하지만, 지금 그에게서 느껴지는 건…… 첫 만남 때 보았던 무겁고 위압적인 기세였다.
저벅! 저벅! 저벅!
위압감 넘치는 걸음으로 대전에 들어선 야수궁주는 높은 계단 위에 마련된 커다란 태사의에 앉아 아래를 굽어보았다.
야수궁도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야수궁 만세!"
"야수불멸! 만세천하!"
그러자 야수궁주 맹소가 절도 있는 손동작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는다.
'오금 저리네.'
'이건 봐도 봐도 익숙해지질 않아.'
화산의 제자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이토록 많은 무인들이 동시에 목청을 돋우는 광경은 중원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일이다. 황궁에나 가야 볼 법한 광경 한가운데에 있으니 절로 주눅이 들었다.
그때 살짝 오만한 자세로 그들을 내려다보던 야수궁주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의 낮은 목소리가 대전을 울린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더냐? 화산의 제자여."
그러자 청명이 앞으로 한 발 나섰다.
그러더니 대뜸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렸다.
"위대하신 야수궁주님께, 소도(小道)가 간청드릴 일이 있습니다. 부디 그 하해(河海)와 같은 자비로 소도의 청을 물리지 말아 주십시오!"
뒤에 서 있던 화산 제자들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뭐래?'
'뭐라는 거야? 저 미친놈이?'
'쟤가 뭘 잘못 먹었나? 왜 저러지?'
당가주 앞에서도 목을 뻣뻣이 세우고 할 말, 안 할 말……. 아니, 안 할 말과 못 할 말을 모조리 해 대던 청명이 아니던가?
그런 청명이 저렇게 저자세를 보인다고?
'이건 분명히 뭔가 있다!'
백천은 의심과 불안이 가득 담긴 눈으로 엎드린 청명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청이라."
야수궁주가 진중한 눈으로 청명을 내려다본다. 여태껏 보이던 가벼움이 조금도 없는 시선이다.
말 그대로 야수궁의 궁주. 남만의 지배자로서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매화검존의 후예라면 내게 청을 할 자격은 있지. 어디 한번 말해 보라. 매화검존의 후예, 화산의 제자여. 그대의 청이 무엇인지를 듣고 가부를 결정하겠다."
"영민하신 결정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쿵!
청명이 바닥에 머리를 한 번 찧었다.
"……쟤 왜 저러냐고."
"저라고 알겠습니까. 그냥 냅두시죠."
백천과 조걸이 속닥거렸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명은 이 자리의 모두에게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위대하신 남만야수궁의 궁주님께 감히 간청드리오니, 먼 곳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저희를 가여이 여기시어, 운남과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십시오!"
"뭐라!"
야수궁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타오르는 눈으로 청명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본다.
"야수궁과 중원 간의 무역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더냐! 너희가 아무리 야수궁의 손님이라고는 하나, 선대부터 내려온 법칙을 건드리려 하고도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노기를 실은 야수궁주의 목소리가 야수궁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 가공할 기세에 야수궁도들은 물론이고 화산의 제자들마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청명은 바닥에 다시 한번 머리를 쿵 찧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궁주님! 이미 중원의 상단들이 운남을 오가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그것을 들먹여 야수궁을 모욕하겠다는 것이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많은 중원인들이 운남의 땅을 밟게 하느니 오로지 한 곳만이 운남을 드나들게 하는 것이 선대의 유지를 더 잘 지킬 수 있는 방법 아니겠습니까?"
"흐으음!"
야수궁주가 크게 콧소리를 내었다.
야수궁도들도 재빨리 서로의 눈치를 본다. 말 자체는 그리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저희는 중원의 누구보다 야수궁을 존중하고, 야수궁의 율법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걸 어찌 장담하느냐?"
"저희는 매화검존의 후예입니다. 그리고 중원의 외면을 받아 성세를 잃은 화산의 문도들입니다. 저희가 운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중원인이 감히 운남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야수궁주가 커다란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중원인은 믿을 수 없다!"
"매화검존도 중원인입니다!"
"그분과 너희를 동일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동일시할 수는 없어도, 그 유지를 따를 수는 있습니다. 그분이 운남을 지키고자 했다면 그분의 후예인 저희 역시 당연히 운남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매화검존을 선조이자 상징으로 받드는 화산의 일 아니겠습니까?"
청산유수였다.
뒤에서 지켜보던 백천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저놈이 저리 달변이었나?'
물론 청명의 입심이야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입심이 좋은 것과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는 것엔 큰 차이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저놈은 마치 외우기라도 한 양 말을 좔좔 늘어놓고 있지 않은가?
모르는 이가 본다면 정말 문사로 착각하고도 남을 것 같다. 마침 학창의에 백우선까지 들고 있고.
'내가 저놈을 아직 다 몰랐다는 말인가?'
백천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바로 그때였다.
"그러니 저희 화산……. 화산……. 어? 다음이……. 어라?"
"……."
야수궁주의 얼굴이 살짝 질린다.
'야, 이놈아! 그렇게 외워 놓고!'
'아, 잠시만요! 생각이 안 날 수도 있지!'
청명이 뭔가 다급한 듯 소매 쪽을 슬쩍슬쩍 들치더니 이내 평온한 얼굴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백천은 매의 눈으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방금 저 소매 안에 분명 뭐가 있었던 것 같은데.'
새하얀 종이에 뭔가가 빼곡하게…….
이 새끼! 베끼는 중이구만!
그럼 그렇지! 네가 그걸 생각해서 말할 리가 있나!
"그러니 저희 화산의 진심을 알아주십시오, 궁주님! 인연이란 결국 사람의 손으로 잇지 않으면 그저 우연이 될 뿐입니다. 야수궁의 선대께서 저희에게 이 땅을 허락하실 생각이 아니었다면 저희가 어찌 이곳에 와 궁주님과 대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선대께서 그대들에게 운남의 길을 열어 주었다. 이 말이렷다?"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음!"
야수궁주가 심각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장고에 들어간 듯한 그의 얼굴을 보며 청명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물론 청명과 야수궁주는 이미 말을 다 맞추었다.
필요에 의해서 무역을 재개하는 것이긴 하나, 모든 일에는 절차와 명분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그 명분을 쌓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야수궁주의 입장에서는 그가 직접 청명에게 부탁을 하는 모양새보다는 화산 쪽에서 낮은 자세로 부탁을 하고, 자신이 그걸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하는 쪽이 보기에 좋다.
이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쌓여 야수궁주의 권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중원에서 온 매화검존의 후예들이 더없이 공손하게 군다는 건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야수궁주의 입지를 재확인시키는 효과가 있으니까.
"어찌 생각하느냐?"
야수궁주가 마침내 눈을 뜨고 호법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가장 앞에 있던 노인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궁주님. 저자의 말이 그리 틀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선대의 유지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저들은 선대께서 그리 감사해하던 매화검존의 후예들이다. 그럼에도 안 된다는 말이더냐?"
"매화검존 본인이라면 말이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그저 후예일 뿐입니다. 피도 이어지지 않은 이들에게 매화검존과 같은 대접을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으음."
호법들이 생각보다 강경하게 나오자 야수궁주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선대의 유훈은 더없이 중요합니다. 궁주님, 이건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궁주님. 저희가 중원에 당한 치욕을 잊지 마십시오. 야수궁은 긍지를 잃지 않습니다."
"때로는 목숨보다 긍지가 더 중요합니다. 긍지를 지키소서!"
"긍지를 지키소서!"
호법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 광경을 본 야수궁주가 눈을 딱 감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된단 말인가?'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이 연극을 짠 것이다. 저 강경한 이들의 마음을 꺾기 위해서.
하지만 그럼에도 바뀌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아래에 도열해 있는 궁도들 역시 은근히 호법들에게 찬동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리도 깊다는 말인가?'
중원과 운남의 골이 너무도 깊다. 아무리 뛰어넘으려고 해도 넘을 수가 없다.
야수궁주가 더없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훈?"
엎드려 있던 청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호법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천천히 모로 꺾었다.
'히익!'
'난리 났다.'
'막아! 막아! 일단은 주둥아리라도 틀어막아!'
백천과 윤종이 반사적으로 기겁을 해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화악!
청명은 기세를 내뿜어 달려드는 백천과 윤종을 밀어 냈다.
"엇?"
"어엇?"
윤종과 백천이 뒤로 나자빠지며 당황한 얼굴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청명이 그들의 만류를 뿌리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팔다리를 잡고 늘어져도 사람을 날려 가며, 하고 싶은 말은 곧 죽어도 하던 청명이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처럼 청명이 무공까지 써서 밀어 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청명아."
백천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청명을 불렀다. 그러나 청명은 시선도 주지 않고 호법들을 뚫어져라 보았다.
"지금 유훈이라고 했어요?"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 유훈이 뭔데요?"
"저, 저 무도한 자가!"
"유훈이 뭐냐고요."
그러자 호법 중 가장 앞에 있던 노인이 한 걸음 나서며 꼬장꼬장한 얼굴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선대께서는 중원인과는 결코 소통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말을 어기는 이들은 오로지 죽음으로만 다스릴 것이다."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뒈지셔야겠네."
"뭐라!"
"저희는 뭐죠?"
"……."
"곤명에 들어와 있는 화평상단은 뭔가요? 중원인이 대놓고 운남을 오가고 있는데 막지 않은 당신들은 뭐 하는 건가요? 다 목을 내어 놔야겠네요. 아닌가요?"
호법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청명의 입에서는 조금 다른 말이 나왔다.
"물론 이해해요. 먹고사는 문제니까요. 그런데 그 먹고사는 문제가 필요할 때만 면피로 쓰이네요."
"지금 야수궁을 모욕하는 것이냐!"
"아뇨. 야수궁이 아니라 당신들을 모욕하는 건데요. 야수궁을 방패막이로 쓰지 마시죠."
"이익……. 누가 당장 저놈의……!"
"유훈을 지킨다? 선대가 남긴 유훈이 정말 그것뿐이에요?"
갑작스레 찔러 들어오는 말에, 호법의 얼굴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게 무슨 말인가?"
"선대가 운남인들을 잘 보살피라는 유훈은 남기지 않았냐고요."
"……."
호법이 입을 다물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청명이 고개를 돌려 야수궁주를 바라보았다.
"없었어요?"
야수궁주가 탄식하듯 말했다.
"아니. 분명 그런 유훈도 있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
"그럼 어느 유훈이 더 중요한데요?"
"……."
청명이 모두를 훑어보며 소리쳤다.
"선대께서 지금 운남 꼴을 보면 아주 좋아하시겠네요. 운남인들 다 굶겨 죽이면서까지 유훈을 잘 지켰다고 박수를 치시겠어요. 입장 바꿔, 당신들 후손이 그런 짓을 하면 좋아하겠어요? 나 같으면 모조리 목을 쳐 버렸을 거예요!"
야수궁도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선대의……."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는 이들만이 선대 운운하는 법이죠. 선대가 정말 자신들의 후예가 오로지 자신의 말만을 지키길 원했을까요? 어떤 부모도 제 자식이 의지 없는 꼭두각시가 되길 원하지 않아요!"
청명이 뒤로 손을 뻗었다.
"응? 어어어엇!"
멍하게 청명의 말을 듣고 있던 윤종이 청명의 손에 붙들려 갔다. 엉겁결에 청명의 옆에 선 그가 멍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본다.
"여기 있는 윤종 사형은 곤명에 도착하자마자 사재를 모두 털고, 검까지 팔아서 운남인들을 도왔어요."
"……고마해, 인마."
그 이야기는 또 왜 꺼내냐.
"그럼 내가 묻겠는데!"
청명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당신들이 말하는 자애롭고, 운남만을 생각했던 그 선대들의 눈에 누가 더 운남인을 위하는 것으로 보일까요? 자기 가진 것을 모두 털어서 운남인들의 배를 채우려 했던 제 사형이에요? 아니면 선대의 말 한마디를 지키겠다고 죽어 가는 이들을 외면하는 당신들이에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청명이 살짝 이를 갈았다.
'유훈은 얼어 죽을.'
죽어 보지도 않은 것들이 뭔 놈의 유훈 타령이라는 말인가? 한번 문파가 망하는 꼴을 본 선대의 입장에서 청명은 도무지 이 답답한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훈이란 말 그대로 유훈일 뿐이다. 남겨서 교훈으로 삼는 것이지, 결코 절대적인 법칙이 될 수 없다.
세상이 이토록 빨리 변하는데 그 고리타분한 말을 언제까지 지키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야수궁도들을 노려보던 청명이 이를 갈며 말했다. 이것들과는 더 이상 말을 나눌 필요가 없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만 했네. 가자!"
청명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잠시 멈추거라."
청명이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야수궁주가 헛기침을 하고는 윤종을 바라본다.
"윤종이라고 했나."
"예."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네."
윤종이 살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