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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33화 (233/1,567)

233화. 그쪽이 왜 그러세요? (3)

청명의 고개가 삐딱하게 돌아갔다.

그 반응을 본 맹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말하지만 쉽지 않은 일인 건 알고 있다."

아, 물론 쉽지 않죠.

너무 쉽지 않아서 자지러질 판인데. 낄낄낄.

"하지만 화산이어야 한다."

"어……."

청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몇 가지 물어도 될까요?"

"얼마든지 묻거라."

"일단 첫 번째로……. 운남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계신 거죠?"

맹소가 피식 웃었다.

"네 눈에는 내가 장님으로 보이는 모양이군. 나도 눈이 있으니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럼 왜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거죠?"

청명의 질문에, 그는 살짝 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기야 그렇겠군. 너희의 눈에는 내가 운남과 중원의 무역을 막고 있었던 것으로 보일 테니까."

"어……. 그런 게 아니라……."

"굳이 변명할 것 없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맹소가 조금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다. 중원과 운남의 무역을 막은 것은 내가 아니라 선대들의 결정이었다. 내가 아무리 야수궁의 궁주라고는 하나 선대의 유지를 내 마음대로 뒤집어 버릴 수는 없다."

"으음. 그렇겠네요."

권위는 힘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특히나 야수궁처럼 역사를 자랑하는 곳에서는 선대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제대로 된 권위가 서지 않는다.

아무리 야수궁주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선대를 부정하는 순간 그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권위가 약해진 수장은 문파를 제대로 이끌 수 없는 법이다.

처참할 정도로 한계에 몰린 운남의 상황을 감안하면, 야수궁이 흔들리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리고 운남의 민심 역시 중원을 환영하지 않아. 내가 강제로 무역을 재개한다면 이에 대해 성토하는 이들이 수없이 생겨난다. 손발이 묶인 상황인 게지."

"……먹고 사는 일이 걸려 있는데도요?"

"인간은 밥으로만 살지 않는다. 때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는 법이다."

"으음."

청명이 살짝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야수궁주가 이해한다는 듯 부연했다.

"우리는 배신당한 걸로도 모자라, 오랫동안 중원에게 오랑캐라 불리며 멸시받아 왔지. 아무리 배를 곯는다고 해도 우리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 없는 이유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아요."

"저쪽에서 먼저 사과를 했다면 무언가가 바뀌었겠으나……. 관은 운남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과를 해야 할 구파일방 놈들은 운남 쪽으로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뭘 어쩌겠느냐?"

말 속에서 답답함이 느껴진다.

"고생이 많으셨네요."

진심이 담긴 청명의 말에 야수궁주 맹소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비록 내가 왕은 아니지만, 내게는 운남의 백성들을 먹여 살려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백성들을 모두 먹일 만큼 식량이 생산되질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든 다른 곳에서 곡식을 사 와야 하지. 그동안은 서역과의 교류를 통해 어떻게든 해결해 왔지만 이제는 한계에 부딪혔다."

"흠."

"그러던 와중에 너희가 나타난 것이다."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아니, 잠깐만."

청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그게 다?'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매화검존의 후예 운운하며 떠받들던 것이나, 전각을 다 날려 먹었음에도 호쾌하게 웃어넘긴 것이나…….

그냥 사람 좋은 바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와……. 궁주님, 무서운 분이셨네요."

"그런 얼굴로 볼 것 없다."

맹소가 쓴웃음을 지었다.

"대단한 계략을 부린 것도 아니다. 보통 나의 외양을 보고 목소리를 들은 이들은 내가 우둔하기 짝이 없는 놈일 거라 생각하더군. 내가 조금만 평범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 네 생각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정말 그러네요. 깜짝 놀랐어요."

"허허허허."

맹소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 탱탱하게 돋아나 있는 근육들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걸 보고 누가 이 사람이 이렇게 똑똑하다고 생각하겠어?'

어쩌면 맹소는 자신의 겉모습마저 이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청명이 새 삶을 얻은 이후로 만난 사람 중 가장 특이한 사람이 바로 맹소였다.

"그럼 매화검존 운운하셨던 것도?"

"아. 그건 오해하지 말거라. 매화검존은 정말 운남의 영웅이다. 그분께서는 진정 사심 없이 운남을 도우셨지."

"……."

뭐. 그렇다고 칩시다.

당사자인 내가 그렇게 치겠다는데 누가 딴지를 걸겠어요?

"하지만 너희를 매화검존의 후예랍시고 추켜세운 것은 솔직히 의도가 조금 있긴 했다."

"대단하시네요."

"별수 없는 일이었지."

맹소의 입가에 조금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저항감이 없는 상대가 필요했다. 중원과의 교역을 다시 이어도 운남인들이 반발하지 않을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하니까. 상대가 매화검존의 후예인 화산이라면 조금 불만은 가질지언정 대놓고 반발하진 않을 것이다."

'여우네, 여우.'

곰인 줄 알았더니 여우다.

청명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았어요."

"그러니 부탁한다."

맹소가 청명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운남인들을 사랑한다. 거칠지만 순박한 이들이지. 더는 그들이 굶주리는 것을 볼 수가 없다. 내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다. 그러니 네가 나를 도와다오. 너희에게도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청명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팔짱을 꼈다.

하지만 그 방어적인 자세와는 달리 그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게 웬 떡이야.'

이쪽에서 사정을 하러 왔는데 알아서 길을 터 주지 않는가?

운남의 차 무역을 전매할 수 있다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화산이 황금으로 뒤덮이는 상상을 한 청명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큽……."

"응?"

"아, 아니요."

웃음을 참지 못한 청명이 자신의 입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 표정을 본 맹소는 되레 살짝 아쉬운 얼굴로 물어 왔다.

"어렵겠느냐?"

"네?"

맹소가 눈을 찌푸렸다.

"상황이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듣자 하니 화산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더구나. 그런 와중에 사천에 있는 그 고압적인 놈들의 눈치를 봐 가며 무역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를 내가 아니다."

야수궁주의 입장에서는 이리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화산이 급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아직 중원에도 그 사실이 다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먼 운남에서 화산의 사정을 알 리가 없다.

물론 청명이 묵린혈망을 잡으며 신위를 보여 주기는 했지만, 문도의 강함이 반드시 문파의 성세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야수궁주가 아는 화산은 쫄딱 망해서 이제 겨우 명맥만 이어 가는 곳에 불과하다.

더구나 사천의 복잡한 사정까지 감안한다면 화산의 주도로 차 무역을 재개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청명은 꺄르륵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허벅지를 잡고 비틀었다.

"어, 어려운 일이지요."

"으음."

크으! 그렇지!

비록 화산이 떼돈을 벌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 오는 길에 사천의 맹주인 사천당가와 동맹을 맺기는 했지만!

의도치 않게 판을 다 깔아 놔서 툭 밀면 빙판에 미끄러지듯이 차를 실은 우마차들이 운남의 관도를 개떼처럼 오고 갈 수 있지만! 그것 참 어려운 일이지요!

낄낄낄낄!

사형! 장문사형!

사람이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더니! 그 뱀 새끼 하나 살려 줬다고 이렇게 복이 떨어지네.

뭐? 내단?

그건 나중에 사형이나 드슈! 나는 금가루 뿌린 밥 먹을 테니까!

붉게 달아오른 청명의 얼굴을 본 맹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 어렵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에헤이! 에헤이!"

갑자기 맹소가 시무룩하게 포기하려 들자 화들짝 놀란 청명이 탁자 위로 쿠당탕 올라갔다. 그리고 야수궁주의 커다란 손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그 촉촉한 눈빛에, 야수궁주가 몸을 움찔하며 뒤로 뺐다. 그러나 먹이, 아니 손을 잡은 청명은 쉽사리 놓아 주지 않았다.

"어렵고 어렵지 않고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건 화산과 야수궁이 친구라는 거지요!"

"친구?"

"예! 친구!"

청명이 헤벌쭉 웃는다.

"크으! 그동안 얼마나 설움이 많으셨습니까. 저 때려 죽일 구파일방 놈들이!"

"그렇지!"

때려 죽일 구파일방이라는 말이 나오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찬동하고 보는 맹소였다.

"따지고 보면 화산만큼 운남의 상황을 잘 이해하는 곳도 없을 겁니다. 저 삶아 먹을 놈들이 목숨 걸고 마교를 물리쳐 놨더니, 은혜도 모르고!"

"그래, 그렇지! 내가 그 마음 잘 아네! 도리가 뭔지 모르는 놈들 아닌가!"

"저희는 동병상련이지요, 동병상련!"

"그래. 내 화산이 남 같지 않았네."

"그런 우리가 서로 돕지 않으면 누가 서로 돕겠습니까! 야수궁과 화산은 피는 이어지지 않아도 형제라고 할 수 있죠. 형제!"

"흐으으읍! 그거 참 마음에 드는 말이구먼!"

강호에서 버림받은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우정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화산의 모든 힘을 다 사용해서라도 차를 팔아 드리겠습니다."

"오, 그렇게까지……!"

맹소의 부리부리한 눈에 감동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 사기?

에이! 뭔 그런 말을!

서로 좋은 일을 두고 사기라고 하면 안 되지. 이건 협력이지! 협력!

청명이 낄낄 웃으며 맹소의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니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알아서 해 보겠습니다."

"그래만 준다면 운남은 화산을 은인으로 여길 것이다."

"은인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응?"

"그저 서로 함께할 수 있도록 만드는 확실한 증거만 있으면 되죠."

"응?"

청명이 고개를 획획 저었다. 방 한구석에서 지필묵을 발견한 청명이 부리나케 뛰어가 지필묵을 가져온다.

"크으. 신뢰와 믿음으로 함께 가는 사이도 좋지만, 모름지기 이런 관계가 누누이 이어지려면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 하는 법이죠."

"……증거?"

"네네. 별건 아니에요. 그냥 뭐……."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앞으로 적어도 백 년 동안은 화산에 차 무역 전매권을 주신다는 사소한 약속이라든가."

"……."

"그 백 년 동안 다른 상단은 운남에서 무역을 할 수 없다는 약속이라든가."

"……."

"뭐 그런 사소한 이야기라도 글로 남겨 놔야 한다는 소리죠. 거기에 궁주님 손도장까지 찍어 놓으면 누가 감히 화산과 야수궁의 관계를 의심하겠어요!"

야수궁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자네 꽤 적극적이군?"

"엣헴! 제가 이래 봬도 도사 아닙니까?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망설임이 있을 리가 없죠."

"……."

"……."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어 가는 느낌이었지만, 일단은 다른 도리가 없는 야수궁주 맹소였다.

"그럼 전매권만 넘기면 되나?"

"헤헤. 더 바랄 게 있으면 따로 말하면 되겠죠."

"한 가지만 묻고 써 주겠네."

"네?"

야수궁주가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내가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간 보아 온 자네가 적어도 악인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네. 자네가 묵린혈망을 죽이고 나왔다면 나는 절대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 거야."

"……."

"그러니 약속하게. 어떤 이득을 취해도 좋으니, 반드시 운남인들의 고난을 해결해 주겠다고."

청명 역시 진지한 눈으로 야수궁주를 마주 보았다.

"약속드릴게요."

더 이상의 많은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알겠네."

청명의 대답을 들은 야수궁주가 미련 없이 붓을 잡고 계약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필휘지로 써진 계약서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사소한 조항 하나하나까지 기입한 그는 도장까지 꺼내 찍고는 청명에게 내밀었다.

'이 사람 진짜 똑똑하네.'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이 야수궁주의 머릿속에서는 옛적에 끝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계약서에 써진 조항들은 지금 바로 생각해 썼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철저하고 꼼꼼했다.

"또 필요한 게 있는가?"

"아뇨. 이 정도면 충분해요."

청명이 씨익 웃으며 계약서를 다시 훑었다.

"사숙을 불러올까요? 사숙이 지금 장문 대행인데."

"아니. 나는 자네의 지장이 필요하네."

"저를 뭘 믿고요?"

"후대의 천하제일인이 될 이의 이름은 오히려 장문인보다 무거운 법이지. 찍게나."

"끄응."

청명이 입맛을 다시고는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마침내 한 부씩 계약서를 나눠 가진 두 사람은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제 끝난 건가요."

"그렇네. 다만……. 개인적으로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네?"

야수궁주가 겸연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이건 좀 부끄러운 부탁인데."

야수궁주가 한숨을 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청명이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아니, 뭐 그런 걸로 부탁씩이나. 걱정 마세요! 제가 완벽하게 해 드릴게요."

그러고는 의기양양하게 낄낄 웃었다. 맹소가 다시 한번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겠느냐?"

"거 별걱정을 다 하시네! 저 청명입니다! 청명!"

청명이 자신의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걱정 반 불안 반의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맹소가 또다시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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