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그쪽이 왜 그러세요? (1)
'어디야!'
청명이 눈을 부릅뜨고 호수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끝도 없네.'
호수와 연못의 사이쯤 되어 보이는 크기라 밖에서 볼 땐 그 규모가 대단치 않아 보였는데, 깊이는 정말 어지간한 호수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 그 거대한 묵린혈망이 왜 하필 이곳에 자리 잡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차 주변이 어두워진다.
맑디맑은 물이라 당장에라도 바닥이 보일 것 같지만, 너무 깊다보니 빛이 드는 데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청명은 놈이 바닥으로 내려가며 남긴 붉은 핏기를 쫓아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갔다.
'소득 없이는 죽어도 못 가지!'
청명이 입술을 질끈 깨문다.
자목초는 자목초고, 사람을 이리 고생을 시켰으면 내단이라도 곱게 바치는 게 예의지! 짐승이라 그런가, 영 예의가 없네! 예의가!
주지 않는다고 받지 않을 청명이 아니었다.
안 주면 뺏는다! 그게 기본 아니던가! 분명 도가의 경전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던 것 같은데?
- 뭔 개소리야, 인마!
아닌가? 아님 말고!
도가의 방식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청명의 방식은 그러했다.
'뱀탕이고 나발이고! 일단은 내단!'
청명이 눈을 빛내며 더 깊숙하게 잠수해 들어갔다. 이제는 아예 주변이 검게 물들었지만, 청명의 눈은 이 어둠 속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래, 방금 움직인 것도 다 봤……. 어?
뭐가 지금 움직였…….
투우우우우웅!
뭔가에 벼락같이 얻어맞은 청명의 몸이 바람에 휩쓸린 낙엽……. 아니, 파도에 휩쓸린 해초처럼 날아갔다.
"꾸르르르르르륵!"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물속이니 당연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청명이 고개를 획 돌린다.
방금 뭐였지?
의문은 금세 풀렸다.
투우우우우우! 투우우우웅! 투우우우우웅!
호수 전체가 울리는 것 같은 거대한 공명음과 함께, 물살이 마치 거대한 기류처럼 청명을 향해 날아든다.
'수탄(水彈)?'
사람보다 더 큰 물 포탄이 청명을 향해 속속 날아들었다. 묵린혈망이 먼 곳에서 청명을 향해 쏘아 대고 있는 모양이었다.
'별 깜찍한 짓을 다 하네!'
이런 것 따위…….
응?
"으랴라라라라라라! 꾸르륵!"
수탄을 제대로 피하지 못한 그가 거센 물살에 휩쓸리면서 팽이처럼 팽팽 돌았다.
아, 물 먹었다.
'저 새끼가?'
물속이라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 물 밖이었다면 하품을 하며 피했을 속도의 수탄도 이곳에서는 기를 쓰고 피해야 한다.
더구나 묵린혈망 역시 청명을 죽이기보다는 어떻게든 물 밖으로 내보내는 게 우선이라 여겼는지 위력을 낮추는 대신 수탄의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수공을 전문적으로 배운 이들도 물속에서 숨을 참는 건 반 시진이 고작인데, 청명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것을 눈치챈 건지, 묵린혈망 역시 청명이 접근만 못 하게 하면 결국 물 위로 올라갈 거라 계산한 듯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뱀 대가리지!'
어디 사람을 머리로 이겨 먹으려고 해!
청명이 검을 뒤쪽으로 쭈욱 뺐다. 그리고 내력을 잔뜩 실어 앞으로 집어 던졌다.
검이 채 손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몸을 가볍게 만들고는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촤아아아아아악!
검이 물살을 가르며 쏜살같이 나아갔다.
투우우우우우웅!
투우우우우우우웅!
수탄이 몇 번이고 뿜어졌지만 청명의 검은 수탄마저 가르며 진격했다.
'거기!'
청명이 눈을 빛냈다. 조금씩 호수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묵린혈망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아무리 달아나 봐야 독 안에 든 쥐! 아니, 호수 안에 든 뱀이다!
청명이 놈을 향해 일직선으로 헤엄쳐 갔다.
물속에서 거대한 뱀과 싸우는 건 지금의 청명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낙매단하에 속이 완전히 헤집어진 묵린혈망이라면 별문제 없이 목을 따 버릴 수 있다.
그 후 내단을 뽑아 낸 뒤 물 위로 복귀하면 그만이다.
묵린혈망도 그 사실을 아는지 청명을 향해 힘껏 꼬리를 휘둘러 온다.
'에이. 차라리 입 벌리고 잡아먹으려고 하면 편한데.'
그럼 쭉 들어가서 내단만 슥삭 하고 배 갈라 나오면 되는데.
이놈은 쓸데없이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단순 무식한 방법은 잘 쓰지 않는다. 아마도 청명의 검이 자신의 배를 가를 수 있다는 걸 이해한 거겠지.
쇄애애애애애액!
물을 가르며 날아드는 거무튀튀한 꼬리를 본 청명이 눈을 빛냈다. 어설프게 받아치려고 해 봐야 밀려날 뿐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콰드득!
청명이 검강을 씌운 검을 묵린혈망의 꼬리에 박아 넣는다.
'읏차!'
이러면 못 달아나지!
꼬리에 청명이 달라붙은 것을 본 묵린혈망이 전신을 뒤틀며 떨쳐 내려 몸부림했다.
하지만 아무리 몸을 뒤집고 꼬리를 뒤흔들어도 청명은 악착같이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바닥에 내리쳐도 귀신같이 몸을 요리조리 돌려 가며 피했다.
이제 묵린혈망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이라면, 입으로 깨무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건 오히려 청명이 바라는 바였다.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순간 '옳다구나'를 외치며 배 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꼬리만 휘두르던 묵린혈망이 입을 꾹 닫고 청명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뱀 대가리라니까.'
청명은 재빨리 꼬리에 박았던 검을 뽑았다. 그리고 몸을 획 돌려 달려드는 거대한 머리에 그대로 박아 넣었다.
물속이라 그 위력이 반감되는 건 청명만이 아니다. 아무리 세게 들이받는다고 해도 물 밖에서 얻어맞는 충격과는 차이가 있었다.
콰드드득!
청명의 검이 묵린혈망의 콧잔등에 콱 틀어박힌다. 그 고통에 거대한 아가리가 쩍 벌어졌다 재빨리 다시 닫혔다.
청명은 검을 잡은 손아귀에 더 힘을 콱 실었다.
'내단! 내 내단을 내놔라! 이 뱀 새끼야!'
묵린혈망은 몇 번이고 도리질을 치며 청명을 떼어 내려 했다.
쿵! 쿵!
꼬리로 머리 쪽을 몇 번 후려쳐 보기도 했지만 고통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제대로 청명이 있는 곳을 치지 못하고 자신을 때릴 뿐이었다.
'이래서 짐승이라니까.'
좁기는 하지만 호수 안을 헤엄치며 도망 다녔다면 청명도 고생을 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멍청해서인지 아니면 습성이 그런 것인지, 묵린혈망은 벽 쪽에 달라붙어 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덕에 고생을 덜기는 했다. 다만…….
'음. 숨이…….'
청명이 묵린혈망의 얼굴을 걷어차며 뒤로 획 물러났다. 그리고 검을 앞으로 세웠다.
시간을 더 끌면 호흡이 부족할 게 분명하니, 이쯤에서 끝내고 내단을 찾아 올라가야 한다.
청명이 기세를 끌어 올린다. 그의 검 끝이 자색으로 빛나며 어두운 물속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물 안이 훤히 보였다.
얼굴과 꼬리, 그리고 몸뚱어리에 큰 상처를 입은 묵린혈망이 결연하게 청명을 마주하고 있었다. 물 밖에서는 쉽게도 달아나던 놈이 물 안에서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비늘을 바짝 세운 묵린혈망이 위협적으로 머리를 치켜든다.
청명 역시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며 검을 틀어쥐었다.
'너는 강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미물이지. 다음 생에 태어나거든 사람한테 까불지 말고 얌전히 살아라. 애초에 그랬으면 내가 그냥 풀만 챙겨서 갔을 수도 있잖아?
청명이 살기를 품었다는 걸 감지했는지 묵린혈망이 몸을 부르르 떤다.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놈은 더욱 위협적으로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자, 그럼 슬슬 내단을…….'
어?
청명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뽑아! 뽑아! 여하튼 그 묵린인지 나발인지가 돌아오기 전에 챙겨야 한다."
"이거죠?"
"일단 주변에 있는 건 다 뽑아!"
"네!"
화산의 제자들이 바닥에 쭈그리고 두런두런 둘러앉아 자목초를 뽑아 대기 시작했다.
"에헤이! 그렇게 뽑으면 안 됩니다! 뿌리는 흙째 뽑아야 오래간다고요! 일일이 말려서 갈 것 아니면 살려 간다는 느낌……. 아, 사형! 그게 아니라 주변까지 통째로 파내라고요!"
그나마 약초에 일가견이 있는 조걸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상황을 주도했다. 약초라고는 도라지밖에 모르는 화산의 제자들은 그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시키는 대로 자목초를 수집했다.
뽑아낸 자목초를 미리 챙겨 온 자루에 잘 담은 화산의 제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 뽑았냐?"
"예."
"다시 살펴봐! 남은 게 있는지."
"다 뽑았습니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화산의 제자들이 재빨리 신담의 영역에서 벗어났다. 일단 묵린혈망이 언제 다시 물 밖으로 나올지 모르는 데다, 남의 성지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심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야수궁주야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지만, 중원의 관습에 익숙해진 그들은 못내 찝찝함을 버릴 수가 없었다.
"됐다!"
"어쨌건 자목초를 얻었습니다!"
화산의 제자들이 상기된 얼굴로 자목초가 든 자루를 바라보았다.
그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여태 지켜만 보던 야수궁주가 천천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보게."
"……에, 예?"
"그 신령초가 든 자루 말일세. 이리 줘 보게나."
백천이 살짝 미묘한 눈으로 야수궁주를 바라보았다.
'이제껏 가만히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자목초를 달라고 하는 거지?'
설마?
순간적으로 여러 생각이 든 백천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경계하는 모습을 보며 야수궁주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주지 않을 셈인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야수궁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음, 그렇군. 자네들은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로군."
화산의 제자들의 안색이 일제히 굳었다.
사실 야수궁주가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그들만으로 자목초를 지키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목숨을 지키는 것조차 불가능할 수 있다.
"쯧쯧. 이 한심한 놈들. 그렇게 긴장할 거면서."
야수궁주가 피식 웃었다.
"내가 그럴 마음을 먹었다면 고작 그거 하나 뺏는 게 일이겠느냐?"
"……그야 그러시겠지요."
백천이 결국 긴장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저희에겐 워낙 중요한 물건인지라."
"이해한다. 뺏으려는 것도 해하려는 것도 아니니 이리 내 보거라."
그가 미련 없이 자목초가 든 자루를 야수궁주에게 내밀었다. 여기서마저 어물쩍거린다면 서로 감정이 상할 수밖에 없다.
야수궁주가 씩 웃더니 자루를 받아 열었다.
그러더니 대뜸 자목초를 반쯤 꺼내 땅에 도로 심기 시작했다.
"……뭘 하시는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너희가 이곳에 직접 온 이유는 이 신령초를 구하기 위함이겠지?"
"예, 말씀드렸다시피 그렇습니다."
"고작 이 정도 양으로 충분하더냐?"
"……아."
사실 그건 확실치 않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면 더 좋다.
"이곳에서 신령초를 다 뽑아 가 버리면 다음에 어디서 또 자목초가 자생할 수 있을진 누구도 알 수 없지. 차라리 비슷한 환경에 심어 두면 앞으로도 꾸준히 신령초가 자라지 않겠느냐."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동안은 신담의 경계 안에 있어 건드리지 못했지만, 이곳은 성역이 아니니 너희가 연락만 해 온다면 신령초를 확보해 화산으로 보내 줄 수 있다. 그게 너희에게도 편하지 않겠느냐?"
"아……."
백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까지 해 주시는 건가?'
어쩌면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야수궁주가 화산을 기꺼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 됐다."
야수궁주가 반쯤 남은 자목초 자루를 백천에게 건넸다. 그의 발아래에는 어느새 새로운 자목초 밭이 생겨나 있었다.
"욕심은 모든 것을 그르치는 법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 필요한 것만을 얻고, 남은 것은 내어 놓는 지혜를 얻는 것과 다름없지."
"크게 배웠습니다, 궁주님."
"껄껄껄껄."
야수궁주가 크게 웃고는 몸을 돌렸다.
그 태산 같은 뒷모습을 보며 백천이 입을 연다.
"다 끝났지?"
"예. 이제 청명이 놈만 오면 되는데……."
화산의 제자들이 조금 불안한 눈으로 잠잠한 호수를 바라보았다.
"왜 안 오지?"
"죽었나?"
조걸의 말에 윤종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뭔 기쁜 소리를 하고 그래! 그놈이 그렇게 죽을 리가 없지!"
"기쁜 소리가 아니라 재수 없는 소리 아닙니까?"
"……말 실수였을 뿐이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던 그 순간이었다.
부글.
"응?"
잔잔한 호수 위로 작은 거품이 몇 개 떠올랐다.
부글부글.
그 거품이 점점 많아진다 싶더니…….
"쁘아아아아아악!"
기괴한 괴성과 함께 청명의 몸이 물 위로 튕기듯 솟구쳐 올랐다.
첨벙!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다시 물에 첨벙 떨어진 청명이 자맥질을 몇 차례 하다가 호수를 벗어났다.
"아오. 숨 막혀 뒈지는 줄 알았네."
마침내 물가에 도착한 청명이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온몸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모두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단은?"
"없었어."
"응?"
"없었다고. 에이, 힘만 뺐네."
청명이 더는 말하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그 큰 영물에 내단이 없었다고? 그럴 리가 있나?"
"아, 내가 어떻게 알아. 팔아먹었든 어디다 빼서 숨겨 두든 했겠지. 여튼 내단 없었어! 에이, 제기랄. 헛고생만 했네!"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괜히 타박을 먹은 윤종이 들릴 듯 말 듯 삐죽거렸다.
그때 청명이 백천의 손에 들린 자루를 보고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다 뽑았어?"
"반만."
"음……."
새로 만들어진 자목초 밭을 본 청명은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났네! 가자!"
"응?"
"가자고!"
청명이 손을 휘휘 저으며 화산의 제자들을 밀어 냈다. 마치 파리라도 쫓는 듯한 손짓이었다.
"뭘 이렇게 급하게……."
"여긴 꼴도 보기 싫으니까. 이제 가. 됐어! 난 화산으로 돌아갈 거야! 사숙은 여기 살든가!"
"허, 참나."
결국 백천은 반쯤 등을 떠밀리듯 신담에서 벗어나야 했다. 다른 화산의 제자들도 딱히 미련을 두지 않고 야수궁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차피 내단을 구했다 해도 그건 그들의 것이 아니었을 테니 미련도 없었다. 어차피 목적했던 자목초는 구했다.
'어쨌든 임무를 완수했다!'
크게 기뻐하실 장문인과 장로들의 얼굴을 생각하니 하루라도 빨리 화산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가자!"
"예!"
화산의 제자들과 야수궁주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야수궁으로 향했다.
'응?'
가장 뒤에서 모두를 따라가던 유이설이 고개를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깐 고개를 갸웃하다 신담이 있는 쪽으로 다시 돌아가 수풀을 헤쳤다.
부그르르르르.
이내 신담의 한가운데가 파문을 일으킨다 싶더니 묵린혈망이 그 거대한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었다.
'살아 있어.'
딱히 적의가 보이지 않는 눈빛이다. 조금 전의 그 광폭했던 기세를 생각하니 의아할 정도였다.
'왜?'
사람에게도 가차 없는 청명이 영물을 굳이…….
고민하던 유이설이 돌연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묵린혈망의 거대한 몸 뒤편에 작은 무언가가 언뜻언뜻 보였다.
새하얀 몸.
그리고 새빨간 눈.
물론 작다고 해 봐야 사람만 한 커다란 뱀이었지만, 묵린혈망과 같이 있으니 너무 작아 귀여워 보이기까지 하는 동글동글한 뱀들이었다.
'새끼…….'
묵린혈망 뒤로 나란히 머리를 내민 세 마리의 새끼를 보는 순간 유이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안 가?"
"……갈 거야."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대답한 그녀는 묵린혈망의 새끼들을 보며 웃어 주었다.
'잘 자라렴.'
사람은 해치지 말고.
그리고 수풀을 원래대로 잘 돌려놓은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형제들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