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뭔 놈의 연못에 용이 살아! (5)
"으아아아아아아!"
카아아아아아아!
묵린혈망과 청명이 호수를 가르며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수상비(水上飛)?"
"이젠 하다 하다 물 위를 뛰네! 물 위를 뛰어!"
수상비.
초상비(草上飛)를 넘어서는 경공. 물 위를 평지처럼 달릴 수 있는, 상승 경공의 최고봉 중 하나다.
기의 운용도 운용이지만 물을 밀어 내기 위해 막대한 공력이 필요하다. 때문에 초절정의 고수가 아니라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런 수상비를 지금의 청명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화산의 제자들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가능할까?'
백천이 안색을 굳혔다.
이미 청명은 묵린혈망을 잡는 데 한 번 실패했다.
'칼이 들지 않으면 아무리 저놈이라도 도리가 없지.'
이건 무인과의 싸움과 다르다.
무인끼리의 승부는 누가 더 강한 검을 쓸 수 있느냐로 갈리지 않는다.
강검을 쓰는 검수와 쾌검을 쓰는 검수가 맞붙는 경우, 검의 강함이야 당연히 강검을 쓰는 이가 압도할 것이다. 그러나 비단 그것만으로 승부가 갈리는 건 아니다. 쾌검을 쓰는 검수도 얼마든지 강검의 틈을 노릴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저 묵린혈망의 비늘은 모든 검술을 의미 없이 만들어 버린다. 화려하게 민첩하게 검을 쓴다고 해도 비늘에 막혀서야 의미가 없다.
그러니 관건은 과연 저 묵린혈망의 비늘을 청명의 검이 뚫을 수 있느냐다.
그리고 그건 지금 단 일격으로 결정이 날 것이다.
"으라차아아아아아!"
청명이 물을 박차고 뛰어올라 묵린혈망의 얼굴을 향해 돌격했다.
쩌어어어억!
그러자 놈은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하고 외치는 듯 입을 쩌억 벌리며 청명을 맞이했다.
"이 새끼가?"
청명이 눈을 희번덕댄다.
감히 미물 주제에 사람을 먹이쯤으로 취급하다니!
"타앗!"
청명의 발이 허공을 박찬다.
솟아오르는 매처럼 공중으로 몸을 한 번 더 띄워 올린 그는 묵린혈망의 검은 머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리꽂듯 하강했다.
"으아아아아앗!"
반으로 동강 난 그의 검이 새파란 검강을 머금기 시작했다. 색이 점점 짙어진다 싶더니 이내 확연한 자줏빛으로 변해 버렸다.
"저, 저거?"
"자색?"
하지만 제자들이 놀랄 틈도 제대로 주지 않고, 청명의 검이 묵린혈망의 머리를 그대로 후려친다.
까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쇠 종이 울리는 것과 같은 소리와 함께, 종보다 더 커다란 묵린혈망의 목이 아래로 획 꺾였다.
"오?"
"우어?"
백천이 눈을 끔벅거렸다.
방금 묵린혈망의 눈알이 툭 튀어나왔다 들어간 걸 본 것 같은데?
뱀에게 표정이 있다고 하면 누군가는 미쳤다 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보기에는 분명 묵린혈망이 당황한 표정을 지은 것 같았다.
"먹혔나?"
거리가 멀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백천이 본 것이라고는 청명이 다시 한번 가열하게 검을 휘두르는 광경뿐이었다.
"으랴아아아앗!"
카아아아아아아아앙!
까아아아아아아앙!
까앙!
까악!
까아아아앙!
'어?'
중간에 소리가 이상한 게 섞인 것 같은데?
백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이전에 저 묵린혈망의 울음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으니, 방금 들린 이질적인 소리가 묵린혈망의 비명 소리인지 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히 전에 붙었을 때와는 그 양상이 달랐다.
청명이 아무리 머리를 후려도
'뭐가 긁나?'
하는 느낌으로 고개나 휘휘 젓던 묵린혈망이 지금은 누가 봐도 고통스러운 듯한 기색으로 몸을 뒤틀고 있다.
"어딜!"
청명이 한 손으로 묵린혈망의 비늘을 꽉 움켜잡는다.
"아, 따가!"
날카로운 비늘 끝에 살짝 손이 베였다. 청명은 이를 악물며 손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내력으로 손을 강화한 뒤 비늘을 단단히 부여잡고 검을 들어 올렸다.
"이래도 안 깨져?"
청명이 다시 과격하게 검을 내리친다.
보라색으로 완연히 물든 검강이 닿는 순간 묵린혈망의 머리가 움푹 들어갔다 튀어나온다.
키에에에에에에엑!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광경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먹힌다!"
"와, 저게 되네?"
물론 여전히 비늘을 뚫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타격을 주고 있는 게 느껴진다. 한번 후려칠 때마다 묵린혈망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그 큰 몸뚱이를 뒤틀어 대고 있었다.
베어 죽이든 때려죽이든 결과는 같지 않은가?
게다가 전에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던 놈의 거대한 덩치가 지금은 되레 약점이 되고 있다. 팔다리가 없는 묵린혈망으로서는 머리에 달라붙은 청명을 떨쳐 낼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카아아악! 카악!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괴성과 함께 묵린혈망이 몸을 좌우로 크게 뒤틀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 인마!"
카앙! 카아아앙!
청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묵린혈망의 머리를 연거푸 내리쳤다.
얼마나 넓은지 대충 후려쳐도 다 머리에 맞는다. 청명에게는 꿈과 같은 상황이다.
이대로 몇 번 더 반복하여 내려친다면 천하의 묵린혈망이라도 해도 쓰러지지 않을 도리가 없을 듯했다.
그 순간이었다.
묵린혈망의 눈에서 새빨간 광망이 뿜어졌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
묵린혈망이 어마어마한 괴성을 내지르더니 가공할 속도로 물가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엥?"
그러더니 청명을 머리에 매단 채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찧어 버렸다.
쿠우우우우우웅!
"……끄으윽."
바닥이 움푹 패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
하지만 청명은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묵린혈망의 비늘을 놓지 않았다.
"이……."
묵린혈망이 눈이 다시 혈광을 뿜어낸다.
쾅! 쾅! 쾅! 쾅! 콰앙!
묵린혈망이 연신 머리를 바닥에다 들이받는다. 주변이 초토화되며 풀과 바위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저, 저거!"
화산의 제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검을 움켜잡았다.
이번에는 정말 누가 먼저 죽느냐의 승부다. 만일 청명이 홀로 묵린혈망을 당해 내지 못한다면 다들 한꺼번에 달려들어서라도 그를 구해 내야 한다.
그때, 청명을 머리에 단 묵린혈망이 돌연 한쪽으로 돌진하는 게 백천의 눈에 보였다.
"아! 안 돼!"
새하얀 꽃을 피운 풀.
"자목초!"
묵린혈망이 자목초가 피어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저 한 방이면 남아날 자목초는 한 뿌리도 없을 게 분명했다.
"거긴 안 돼애애애애!"
백천이 소리를 내지르자 매달려 있던 청명이 움찔하고 반응했다.
"으아차아아아!"
뛰어오른 청명이 양팔을 활짝 벌려 조금 전까지 딛고 서 있던 묵린혈망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땅에 닿은 발에 힘을 바짝 주고 버텼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청명의 발이 바닥을 쟁기처럼 파낸다. 놈이 밀면 미는 대로 쭉쭉 밀려나던 그는 점차 힘을 더해 갔다. 그리고 서서히 거대한 대가리를 밀어 내기 시작했다.
"끄으으윽. 끄으으으으으으으!"
한계까지 내력을 뽑아낸 청명은 마침내 자목초 바로 앞에서 묵린혈망을 막아 냈다.
"여긴……!"
그제야 놈의 거대한 머리를 놓고 물러선 청명이 몸을 팽그르르 회전시켰다.
그리고 그대로 묵린혈망의 얼굴을 걷어찼다.
"안 된다잖아, 인마!!"
콰아아아아아아앙!
청명의 뒤돌려차기에 얻어맞은 묵린혈망의 거대한 몸이 반쯤 뒤집히며 호수로 나가떨어졌다. 거대한 물보라가 솟구쳐 올랐다.
"아고."
청명도 전신이 쑤신다는 듯 팔을 휘젓는다. 온몸이 흙과 풀로 엉망이 되었지만 수습할 여력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묵린혈망이 빠진 호수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부글. 부글. 부글.
마치 호수가 끓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구석에서 거품이 뿜어져 올라왔다.
"슬슬 끝내야지."
청명이 검을 앞으로 겨눴다.
그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끓어오르던 부분이 돌연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이내 물이 솟구쳤다가 쏟아져 내리며 묵린혈망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응?"
청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뭐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뭐가 달라……. 아!
청명이 눈을 끔뻑였다.
묵린혈망의 비늘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몸을 철저하게 보호하던 그 강철 같은 비늘들이 지금은 속살을 드러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위협적으로 하나하나 일어나 있었다.
"열받은 모양인데?"
청명이 씨익 웃었다.
"그러게 상대를 보고 까불어야지."
카아아아아아아!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묵린혈망이 고개를 위로 쳐들더니 어마어마한 괴성을 내질렀다. 귀가 아프고 몸이 떨릴 정도로 거대한 울부짖음이었다.
지켜보던 화산의 제자들이 그 울부짖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는다.
핏빛의 광망을 줄기줄기 뿜어낸 묵린혈망이 청명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목만 내민 채 이리저리 공격을 해 대던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숫제 호수 위를 날듯이 달려드는 몸짓이었다.
그 덕분에 길고 긴 묵린혈망의 몸이 반 이상 호수 위로 드러났다.
눈을 사로잡는 그 어마어마한 덩치에 지켜보던 이들이 입을 쩌억 벌렸다. 드러난 그 크기가 얼마나 압도적인지, 그 앞을 막아서는 청명은 커다란 구렁이를 상대하는 개미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청명은 제게 쇄도하는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묵린혈망 앞에서 단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표정 없는 눈으로 묵린혈망을 노려볼 뿐이었다.
'될까?'
지금 이 몸과 지금 이 내공으로?
글쎄. 알 수 없지.
하지만 시도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달려드는 묵린혈망을 보며 청명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또다시 한계를 뛰어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뛰어넘은 만큼 나아가야 의미가 있는 법.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성장도 무의미하다.
청명의 검 끝에 다시 한번 자색의 검강이 어린다. 점점 더 짙어지더니 이내 다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선홍빛의 검강.
화산의 피어나는 매화의 색을 닮은 선홍빛의 검강이 검 끝에 선명하게 어렸다.
그는 달려드는 묵린혈망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마침내 검을 움직였다.
꾸우우욱.
검의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핏줄이 서도록 내력을 불어넣자 검이 선홍빛의 빛을 내뿜는다.
'힘은 힘으로!'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내력이 전신을 휘돈다. 이전과는 비할 수 없는 내력의 힘이 몸을 활성화시킨 뒤, 이내 팔을 타고 검으로 몰려든다.
검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 웅웅 검명(劍鳴)을 토해 내었다.
그와 동시에 청명의 검 끝이 수많은 매화 꽃잎들을 그려 내기 시작했다.
마치 허공에 멈춘 듯한 매화가 피어나고 또 피어난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
지척까지 달려든 묵린혈망을 보는 청명의 눈에 새파란 광망이 어렸다.
"타아아앗!"
피어난 매화가 일제히 한곳으로 뭉쳐 들었다.
낙매단하(落梅斷河).
꽃잎은 한없이 여리지만, 수없이 모인다면 결국엔 강의 흐름마저 막아 버리는 법.
가공할 내력을 품은 매화가 뭉치고 뭉쳐 마치 유성처럼 쏘아져 나간다.
위이이이이잉!
귀를 찢어 버릴 듯한 파공음과 함께 쏘아진 유성이 묵린혈망의 몸을 파고들었다.
콰드드드득!
단단하기가 만년한철보다 더한 묵린혈망의 가죽이 낙매단하의 검강 앞에 말 그대로 갈려 나간다. 사방으로 비늘의 파편을 날려 버리고도 그 기세를 잃지 않은 검강이 마침내 묵린혈망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악!
묵린혈망이 입을 쩌억 벌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신담을 쩌렁쩌렁 울렸다.
파아아앗!
뭔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하고 단단한 등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사람 머리만 한 구멍에서 시뻘건 피가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크륵……. 크르르르……."
시커먼 몸을 덜덜 떨던 묵린혈망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작고 붉은 눈이 청명을 향했다.
"후욱!"
전신이 땀에 흠뻑 젖은 청명이 그 시선을 마주했다.
'완벽하진 않네.'
과거처럼 완벽히 펼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쨌든 어설프게나마 펼쳐낼 수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남은 건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
"쿨럭!"
마른기침을 두어 차례 토해 낸 청명이 검을 슬쩍 내리고는 허리를 쫙 폈다.
그를 그토록 괴롭게 했던 묵린혈망은, 사람으로 치면 옆구리쯤 되는 곳에 머리통만 한 구멍이 뚫린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토록 커다란 몸에 고작 저만 한 구멍이 뚫린 게 무어가 대수겠냐마는, 저 상처는 단순히 크기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낙매단하의 공력이 지금쯤 놈의 내부를 완전히 헤집어 놓았을 것이다. 그 증거로 지금 그 꼿꼿하던 머리가 휘청대고 있지 않은가?
"이제 끝내야지. 자, 덤……."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아앗!
돌연 거대한 물보라가 일었다.
묵린혈망이 쓰러지듯 물속으로 모습을 감춘 것이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헤엄쳐 호수 깊은 곳으로 달아나 버렸다.
"……어?"
청명이 눈을 부릅뜬다.
달아나?
인간이라면……. 아니, 무인이라면 쉽게 생각할 수 없을 일이다. 하지만 짐승에겐 지켜야 할 명예도, 자존심도 없다. 상대할 수 없는 적이라면 달아나는 게 이치에 맞다.
하지만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청명은 망연히 호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청명아!"
"이겼다!"
화산의 제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에게로 달려왔다.
"와, 세상에! 정말로 그걸 잡네!"
"진짜 대단하다, 청명아. 마지막에 쓴 그 검은……. 응?"
말을 하던 조걸이 고개를 갸웃했다.
"청명아?"
청명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르르 떨고 있어서였다.
슬쩍 다가가 청명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대경실색했다.
청명은 아예 반쯤 눈을 까뒤집고 이성을 놓은 얼굴로 떨고 있었다.
"이, 이게 감히…… 어딜 도망가?"
거의 회까닥 돌아 버린 눈에서 분노가 뚝뚝 떨어졌다.
"사람을 이렇게 생고생시켜 놓고 도망치시겠다? 어디서 이런 못 배워 먹은 짓거리를! 이런 상도의도 없는 뱀 같으니!"
"뭔 뱀한테서 상도의를 찾아! 돈도 없는 놈한테!"
"돈은 없어도 내단은 있겠지! 내단! 내단을 내놓아라! 내다아아아아아안!"
청명이 갑자기 호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야, 인마!"
"말려!"
하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청명이 장렬히 호수 위로 몸을 날렸다.
"내 내다아아아아아아아안!"
풍덩!
청명의 모습이 순식간에 호수 저 아래로 사라졌다.
"……."
고개를 빼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걸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백천을 바라본다.
"……괜찮을까요? 물속인데."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내버려 둬라. 뒈지든지 말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