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뭔 놈의 연못에 용이 살아! (4)
"야, 인마!"
백천이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하지만 청명은 태연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혈압이 치솟은 백천은 삿대질까지 하며 말을 더듬았다.
"아, 아니! 인마! 어? 일단, 어? 일단 좀 가리라고!"
"뭘?"
"옷 입으라고! 옷!"
"응?"
청명이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을 바라본다.
"속곳은 있고만. 뭐가 문제야?"
"아오!"
백천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도 그럴 게, 청명은 겨우 속곳 한 장만 걸친 채 몸을 위풍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다.
물론 탄탄하게 자리한 근육은 탄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적어도 바지라도 입어야 덜 민망하지 않겠는가.
"네 사고도 있잖느냐! 어디!"
백천이 유이설의 눈 건강을 걱정했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태연했다. 말없이 주변을 살핀 그녀는 대충 천 같은 것을 주워 들더니 청명에게 다가가 몸에 둘러 주었다.
"입어."
"오, 역시 사고야!"
"추하니까."
"……고마워."
눈물 나게 고맙네.
천을 받아 들고 몸에 둘둘 만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그 뱀 새끼는 내가 때려잡을 수 있으니까. 얼른 자목초 구해서 돌아가자."
그 말에 윤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청명아. 지금 뱀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응? 왜?"
그때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이런 미친놈들이!"
"엥?"
커다란 고함 소리와 함께 야수궁도들이 무너진 전각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윽고 그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매화검존의 후예라고 하여 성심성의껏 손님으로 대해 주었거늘! 이런 일을 벌여?!"
"죽고 싶은 것이더냐?"
야수궁도들의 격한 반응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한번 고성이 쏟아지기 시작하니 점점 인파가 몰렸다.
"어……."
그제야 완전 박살이 나 버린 전각들과 전쟁이라도 벌어진 것 같은 주변을 둘러보며 청명이 어색하게 웃었다.
"허허. 거참, 본의 아니게."
이 사태가 고작 그 정도 말로 해결이 되겠냐?
백천이 한숨을 쉬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망할 청명이 놈이 저지른 일이지만, 여하튼 이 일행의 책임자는 그다. 그가 먼저 나서 사과를 하고 죄를 빌어야 한다.
"우선 죄송……."
하지만 그때 청명이 백천의 어깨를 잡아 뒤로 살짝 당겼다.
"사숙 내가 처리……."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어?"
분명 살짝 당겼을 뿐인데, 백천의 몸이 포탄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쿵! 쿠웅! 쿠웅! 쿵!
바닥에서 물수제비처럼 튀어 오른 백천이 담벼락에 처박혀 몸을 부르르 떤다.
"……."
"……."
"어……."
청명이 떨떠름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미안. 아직 익숙지가 않아서."
"끄으으으으으."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백천이 핏발이 선 눈으로 청명을 노려본다.
"오냐……. 오늘 너 죽고 나 죽어 보자!"
"에이. 그럼 사숙만 죽지. 있어 봐. 내가 해결할 테니까."
"으아아아아! 이 망할!"
"참으십시오, 사숙!"
"고정하십시오! 원래 그런 놈 아닙니까!"
"끄으으으으!"
발악하는 백천을 조걸과 윤종이 붙잡고 늘어졌다.
청명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더니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군중을 헤치고 나선 야수궁의 호법들 앞에 마주 섰다.
호법들이 차가운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며 일갈한다.
"이 일을 어찌할 셈이요?"
"네? 어떤 일요?"
"지금 이 전각을 다 때려 부순 게 그대들 아니오?"
"에이, 농담도 심하셔라. 저희가 어떻게요?"
"뭐라? 지금 그대들이 전각을 무너뜨린 걸 부인하겠다는 건가?"
그 말을 들은 청명이 피식피식 웃는다.
"본 사람 있어요?"
전형적인 변명이었지만, 당연히 통할 리가 없었다.
"내가 봤소!"
야수궁도 하나가 나서서 소리쳤다.
"내가 똑똑히 봤소! 저 전각에서 시커먼 용권풍이 뿜어져 나와서 전각이고 뭐고 다 날려 버리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그러니 그런 변명은 꿈도 꾸지 마시오!"
"호오?"
청명이 놀란 눈으로 야수궁도를 바라보았다.
"용권풍이요?"
"그렇소!"
호법들도 안색을 굳혔다.
"해명하시오.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그대들이 매화검존의 후예라고 해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거요! 매화검존이 직접 오지 않는 이상은!"
직접 왔어, 이것들아!
내가 매화검존이라고!
청명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해명을 못 하면 저희를 때려잡기라도 하겠다는 거네요?"
"필요하다면!"
"어…….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음?"
청명의 말에 앞에 나선 호법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말인가.
"저 사람 말대로라면 거대한 용권풍이 전각을 날려 버렸다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걸 제가 만들었다고요?"
"……응?"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요?"
"……."
어?
그게 그렇게……. 어?
청명이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용권풍이 일어서 전각이 박살 나면, 그 안에 있던 사람을 걱정해 주는 게 상식 아니에요? 제가 용권풍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그게……."
호법이 우물쭈물 입을 다물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저게 상식적이지.
사람이 용권풍을 일으킨다는 게 말이나 되나. 용도 아니고.
"그리고 또 하나 이상한 게 있는데요."
"뭐, 뭔가?"
"그 용권풍을 제가 일으켰다고 치자고요."
청명이 살짝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한다.
"그럼 맨몸으로 용권풍을 일으켜 주변을 이리 만들어 버리는 사람을 지금 때려잡겠다는 소리잖아요. 괜찮으시겠어요?"
"……."
호법이 입을 꾹 다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만약 이 상황을 이 화산의 어린 제자가 만들어 내었다면, 상식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고수라는 뜻이다. 그런 이를 잡아 가두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그러려면 적어도…….
"무슨 일이냐!"
그 순간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장내를 뒤덮었다.
"궁주님!"
"궁주님을 뵙습니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야수궁주를 본 야수궁도들이 그 자리에 부복했다. 화산의 제자들도 그를 향해 깊이 고개 숙였다.
긴장했던 호법이 야수궁주를 확인하고는 화색을 띠며 외쳤다.
"궁주님! 이들이……."
"조용!"
야수궁주가 손을 살짝 들어 그 말을 막았다. 그리고 그 부리부리한 눈을 크게 뜨며 청명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그 단호한 발걸음에 땅이 진동한다. 그의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뒤를 따르는 커다란 호랑이가 살짝살짝 떠오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쿵!
이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야수궁주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청명을 노려보았다.
"놈!"
"……네?"
야수궁주의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다. 뻘게진 얼굴로 청명을 노려보던 그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성을 얻었느냐?"
"에이, 이 정도는 소성이죠. 그래 봐야 내공 조금 늘어난 것이니까요."
"소성? 소성이라 했느냐?"
"네. 겨우 그 정도예요."
야수궁주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던 야수궁주가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청명의 어깨를 퍽퍽 내리친다.
"크하하하하하핫! 소성! 그래 소성이구나! 그래, 사내의 배포가 그 정도는 되어야지! 크하하하하하하핫!"
펑! 펑! 펑! 펑!
야수궁주의 손이 청명의 어깨를 내리칠 때마다 폭음이 터진다.
'저러다 죽겠는데?'
'사실은 열받아서 때리는 건가?'
한번 내리칠 때마다 청명의 몸이 바닥으로 한 치씩 박혀 들어간다. 야수궁주의 웃음이 끝났을 때쯤에는 청명의 몸이 무릎까지 바닥에 박혀 버렸다.
야수궁주는 그 광경마저 재미있는지 껄껄 웃으며 청명을 잡고 바닥에서 뽑아내었다.
"그래. 소성을 이룬 기념으로 한잔해야지!"
호법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궁주님! 저들은 야수궁의 전각을 무너뜨린 죄인입니다!"
"이들을 단죄하셔야 합니다."
"뭐?!"
야수궁주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고작 건물 쪼가리 몇 개 날렸다고 손님을 벌하라는 말이더냐! 언제부터 야수궁이 이런 좀생이들 소굴이 되었단 말이더냐! 이 한심한 것들이!"
그 우렁우렁한 일갈에 궁도들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때, 야수궁주 몰래 혀를 내미는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궁도들의 이마에 시퍼런 핏대가 섰다.
'아, 진짜 있는 힘껏 패고 싶다.'
'뭐 저런 새끼가 손님이랍시고 와서는…….'
'주둥아리 한 대만 후려갈길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진짜.'
'매화검존의 후예라더니 어떻게 전해지는 매화검존의 성격과 이리 다를 수가 있는가?'
물론 과거 매화검존의 성격과 지금 청명의 성격은 완벽하게 일치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미화된 역사를 전해 들은 이들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손님이 야수궁에서 소성을 이루었으면 축하하지는 못할망정! 뭐? 버얼? 버어어어얼? 이런 소인배 같은 놈들이! 너희가 어찌 그런 말을 하고도 당당한 야수궁의 남아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 머저리 같은……."
"에이, 너무 화내지 마세요. 야수궁을 아끼는 마음이 커서 그런 거죠."
"음? 으음, 그래. 그렇지."
"그리고 저희가 잘못한 거죠."
"잘못은 무슨 잘못이더냐! 무인이 수련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나도 소싯적에 수련장 여럿 날려 먹었다!"
"헤헤. 그렇죠.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야수궁도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어떻게 수십 년을 함께한 궁도들보다 이제 얼굴 본 지 며칠 되지 않은 외인과 더 죽이 착착 맞는다는 말인가?
'저쯤 되면 숨겨 둔 자식 아니냐?'
'자식이라기에는 너무 왜소한데.'
'얼굴만 봐도 피는 절대 안 이어졌다.'
야수궁도들과 화산의 제자들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와중에 그들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 눈에 안쓰러움이 담겨 있다는 것을 확인한 두 집단이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하하하핫! 잔치를 벌여야지!"
"아니요. 지금은 아니에요."
"응?"
야수궁주가 고개를 갸웃한다.
"지금은 아니라니?"
"일단 그 뱀부터 좀 잡고요. 뱀탕 안주 삼아서 한잔하죠."
"묵린혈망 말이냐?"
"네."
"으음, 그래. 하지만 조심하거라. 묵린혈망은 정말 영물 중의 영물이니까."
"그래 봤자 뱀이죠."
"그래! 사내가 그런 배포는 있어야지!"
"그럼요! 낄낄낄낄!"
"크하하하하하하하!"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이들에게서 다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대체 뭘 한 거냐?"
"뭘?"
"무슨 짓을 했기에 그런 일이 터진 거냐고."
"아, 그거?"
밀림을 따라 신담으로 향하던 청명이 백천의 말에 피식 웃는다.
"내공 좀 늘렸어."
"……."
"조금 늘었지. 조금."
백천이 고개를 들어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원시천존이시여.'
제발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
뭔 내공이 엿가락도 아니고, 늘리고 싶다고 늘려지는 겁니까?
필요해서 내공을 늘렸다는 데서 놀라야 하는 겁니까? 아니면 내공 늘리겠다고 전각을 다 날려먹는 데서 놀라야 하는 겁니까?
제발 좀! 제발!
"뭐, 생각만큼 많이 늘지는 않았지만…… 안 뒈지고 늘렸으니 이득이지."
"내공 늘리다가 죽을 수도 있는 거냐?"
"이번에는 좀 위험했어."
"……나는 이제 너를 모르겠다."
원래부터 몰랐지만.
백천이 한숨을 내쉬며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곧장 신담으로 향했다.
'진짜 위험했어.'
미인루의 독기와 내력은 청명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정말 조금만 실수를 했거나, 내력이 조금만 덜 정순했어도 몸이 터져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청명은 미인루의 내력을 정화해 받아들이는 데 성공했다.
'쯧. 잡기운이 너무 많았어.'
내력의 양은 방대했지만, 그 안에서 뽑아낼 수 있는 기운은 일 푼도 되지 않았다.
다행인 건 워낙 방대한 양의 내력이다 보니 겨우 일 푼 뽑아낸 양으로도 그동안 청명이 모아 왔던 내력만큼의 기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점.
전성기의 매화검존이 가졌던 것에 비한다면 아직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한동안 내력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선은!"
청명의 수풀을 좌우로 젖혔다.
드디어 맑디맑은 물이 가득한 신담이 눈에 들어왔다.
"미물 주제에 사람을 건드린 대가가 어떤 건지 알게 해 주마!"
청명아.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네가 건드렸다. 네가.
쟤는 아무것도 안 했어.
할 말은 참 많았지만, 그저 한숨만 내쉬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간다! 으라차!"
청명이 지체 없이 검을 뽑아 들고는 신담을 향해 훌쩍 뛰어올랐다.
"야! 그 검 동강 났잖아!"
"괜찮아!"
허공에서 손을 내저은 청명이 내려섰다.
"나와!"
그리고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친다.
그러자.
잔잔한 호수의 한가운데에서부터 작은 파문이 일더니 이내 묵린혈망이 물 위로 그 거대한 덩치를 드러냈다.
스으으으으으.
온통 새까만 비늘 사이로 점처럼 박힌 핏빛의 눈이 청명을 노려본다.
"넌 오늘 뒈졌다."
바닥에 침을 탁 뱉은 청명이 검을 틀어쥐고 호수 위를 달려 묵린혈망을 향해 쇄도했다.
카아아아아아!
묵린혈망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청명을 향해 마주 돌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