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뭔 놈의 연못에 용이 살아! (3)
청명이 입맛을 다시며 손에 든 미인루를 뚫어져라 보았다.
슬프게도, 당보는 헛소리는 밥 먹듯이 하면서도 거짓말만큼은 하지 않는 놈이었다.
그러니 그 말은 진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끄응. 확실히 이론상으로는 틀린 게 없어."
이미 몇 번의 실험을 통해 내력을 증대시키는 데는 성공했다고 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말이다.
물론 그 이후 독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 죽었다고 했지만.
'관건은 독 기운을 받아들이면서 정화를 해낼 수 있느냐는 거지.'
기본적으로 고수가 독 기운을 처리하는 방법은 독 자체를 외부로 배출하거나 몸 한구석에 가두어 두었다가 나중에 빼내는 식이다.
설사 정화를 한다고 해도 그를 통해 배출할 뿐이지, 내력으로 흡수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게 보통이다.
뭔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그런 미친 짓을 하겠는가?
그런데 당보 그 미친놈은 이 기운을 정화해서 몸 안으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몸 밖으로 배출하거나 삼매진화로 태워 버리는 게 아니라.
"……사짜야, 사짜."
청명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 농담이 아니라 도사 형님 정도면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거요. 도가 계열 내력의 특징이 정화력이 뛰어나다는 거 아니외까! 독에 반쯤 동화되어 있는 당가의 내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도사 형님의 내력이라면 그놈을 배출하지 않고 정화해서 내력으로 만들 수 있다니까 그러네? 그럼 천마 새끼 대가리도 깔 수 있소!
- 그러다 죽으면?
- 그것참 아쉽고 딱한 일이지. 내가 제사는 잘 지내 드리겠소.
물론 그 말 뒤엔 당보의 제사를 치를 뻔했다.
'도가 계열의 내력이라 이거지.'
청명이 입맛을 다셨다.
조건은 갖춰졌다.
그의 앞에는 미인루가 있고, 그 미인루의 억제를 도와줄 천하에서 가장 깨끗한 영단과, 독에 대한 내성을 올려 줄 영단까지 있다.
그리고 청명의 내력.
이미 당가에서 비무를 하면서 그가 새로 만들어 낸 내력이 과거의 매화검존의 내력 이상으로 독에 강하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이건 과거의 매화검존 청명조차 시도할 수 없었던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천하의 누구도 감히 이 방법을 시도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할 수 있다면 오직 한 명.
과거 매화검존 청명 이상의 정순한 내력을 가진 채, 기의 운용 역시 당시의 매화검존에 필적하는 지금의 청명만이 가능한 방법이다.
다른 이들이 어설프게 따라하려 했다가는 입에 독을 넣는 순간 독수로 화해 버릴 게 뻔했다.
청명이 결국 혼원단 한 알과 천독단 한 알을 움켜잡았다.
"뒈지기야 하겠어?"
안 되면 배출해 버리면 그만이지!
뱀 새끼 때문에 먹는 거긴 하지만, 예전부터 생각은 쭉 해 왔었다. 그러니 당가에서 미인루를 받아 왔지.
그동안은 결심이 서지 않았는데, 마침내 계기가 생긴 것뿐이다.
"앓느니 죽어야지!"
청명이 과감하게 손을 뻗어 혼원단과 천독단을 집어 들고는 지체 없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싸아아아아아.
두 영단 모두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순식간에 녹아 목구멍을 타고 꿀꺽 넘어간다.
화아아아악.
배 속이 뜨거워진다. 몸 안에서 느껴지는 뿌듯함에 순간 멈칫할 정도였다.
'이거면 되지 않을까?'
천하의 청명도 살짝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독단도 먹었고, 혼원단도 몇 알 더 있겠다……. 차라리 영단만 먹고 다시 한번 붙어 보는 게…….
"에이!"
청명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겁이 많았다고!"
사람이 늙으면 겁쟁이가 된다더……. 아, 나 젊어졌구나? 오히려 젊으면 겁이 많은가?
어쨌든, 혼원단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처음 혼원단을 먹고 효과를 보았을 때는 눈이 돌아갔지만, 애초에 영단이라는 것은 여러 알을 먹는다고 해서 효과가 몇 배로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소림에서도 남은 대환단을 한 놈에게 모조리 먹여 천하제일의 고수를 만들어 냈겠지.
더구나 청명은 생각 없이 너무 맑은 기운을 만든 대가로 영약을 때려 붓고 또 때려 부어도 제대로 흡수를 하지 못하는 체질이 되지 않았던가?
결국 혼원단은 화산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언정 청명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천년만년 운공만 하고 살 작정이 아니라면 뭐라도 해야 한다!
마음을 굳힌 청명은 가부좌를 튼 채로 정신을 집중했다.
일단은 이 내력을 이용해서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콰아아아아!
몸속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위장에서 녹아내린 영단들이 기운의 강을 만들고 더없이 활기차게 기맥을 내달린다.
'흡수가 아니야.'
지금 중요한 것은 이 기운이 아니다. 이 기운들은 오로지 미인루의 기운을 흡수하게 도와주는 매개체이자 미인루의 독기로부터 그의 몸을 보호할 방벽이 되어 주어야 한다.
'단전을 중심으로.'
혼원단과 천독단의 기운을 단전 주변에 두른 청명이 천천히 눈을 떴다.
운공 도중에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인다는 건, 평범한 무인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기운의 활용이 정도를 넘어선 청명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쓰으읍!"
못마땅한 듯 소리를 낸 청명이 미인루의 자개병을 움켜잡았다.
"……망하면 당보 너는 진짜 뒈진다."
이미 죽었지만 한 번 더 죽일 거다!
죽은 놈이 또 죽을 수 있는지 그 몸으로 확인하게 해 주지!
그는 과감하게 미인루를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직은 괜찮은데?'
위장으로 흘러들어 간 미인루가 딱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뭔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느낌만 있…….
파아아아아아아아앗!
'왔다!'
청명이 기겁을 하며 기운을 바짝 끌어 올렸다.
독기가 미친 듯이 퍼지고 있었다. 천하의 청명도 덜컥 겁이 날 정도다.
'하기야!'
당외와 싸울 때도 그랬고, 전생에서 독을 쓰는 이들과 싸웠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까지 그를 중독시켰던 독은 넓은 공간에 살포된 것이거나 무기에 묻혀 놓은 것들이 전부였다.
그게 해 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기껏해야 이 병 안에 든 양의 백분지 일, 어쩌면 천분지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수를 죽일 수 있건만, 그만한 독을 원액째로 깔끔하게 들이켰으니 이리되는 게 당연하겠지.
'너무 과했나?'
반만 먹을걸.
왜 술이고 독이고 일단 보이면 한방에 들이켠단 말인가.
아이고, 장문사형. 진즉에 내 버릇 좀 고쳐 주시지!
파아아아아아아아앗!
독기가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청명은 기겁을 하며 기운을 끌어 올려 단전을 보호했다.
'명심해.'
정화해서 흡수한다.
정화해서 배출하는 게 아니라!
몸이 알아서 독을 정화해 배출하려는 것을 막아 낸 그는 이를 악물고 기운을 돌리기 시작했다.
'뭐 이런 독이 다 있어?'
넘쳐난다.
마치 독 탄 물을 항아리째 들이부은 느낌이다. 독이 몸 안에서 불어나고 또 불어난다.
몸을 터뜨려 버릴 것처…….
투둑.
'엥?'
청명이 슬며시 눈을 떴다.
'히이이이이이이익!'
그리고 화들짝 놀라 다시 질끈 감았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조금 전 본 것을 스스로 믿지 못한 청명이 다시 슬그머니 실눈을 떴다.
하지만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보기에 끔찍할 만큼 시커멓게 물든 그의 몸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흑돼지도 아니고!'
터질 듯 불어난 신체를 감당하지 못한 옷가지가 이리저리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청명이 재빨리 다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이러다가는 내력을 회수하기도 전에 몸이 터져 죽을 판이다.
'빨리!'
기운이 가열하게 돌기 시작한다.
단전에서 뿜어져 나간 청명 고유의 정순한 기운이 단전 주변의 독 기운들을 집어삼키고는 정화시키기 시작한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봇물이 터진 듯 보일 정도다.
하지만 독 기운들 역시 순순히 당하지 않았다.
전신을 모두 탁하게 물들인 독들이 아직 남은 곳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는지, 아니면 단전에서 기운이 빠져나오며 빈 공간이 생겨서인지, 일시에 맹렬하게 단전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막아!'
그러자 단전을 둘러싸고 있던 천독단의 기운과 혼원단의 기운들이 독 기운을 막아섰다.
쾅! 콰아아아앙! 콰앙!
몸 안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는 것 같다.
순간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때마다 청명은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기운을 돌려 독기를 정화해 내고 맑아진 기운을 단전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푸우우웃!
부풀어 오른 육체의 반동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혈관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코와 입이 모조리 헐어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떨어진 피가 치익 소리와 함께 바닥을 녹여 낸다.
정화하고 또 정화해도 독기가 끝이 없다.
'오냐!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청명이 고통을 참아 내며 기운을 돌리기 시작했다.
"……."
"……."
방 앞에서 불안한 눈을 하고 있던 화산의 제자들의 시선이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뭔가 느껴지는 것 같지 않냐?"
"저도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 뭔가 좀 어……."
조걸이 미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살짝 볼까요?"
"응?"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보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잖습니까?"
백천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말장난이다. 걸이가 성장했구나."
"다 사숙의 덕 아니겠습니까?"
"그래. 뒷감당은 네가 하는 것이니, 내가 굳이 말릴 필요가 없겠구나. 어서 가 보거라."
"……."
한동안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곧 조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숙. 성격이 많이 변했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나름 뼈가 숨어 있었지만 백천은 태연하게 그 말을 받아넘겼다.
"근묵자흑이라 했느니라. 묵을 옆에 두면 검게 물드는 거고, 청명의 옆에 있으면 인성이 바닥나는 법이지."
"그나마 아시니까 다행입니다만……."
"시간 끌지 말고 빨리 확인하고 오너라."
"……예."
조걸이 구시렁대며 청명이 있는 방으로 터덜터덜 걸어간다.
'안 들켰지?'
청명의 감각이라면 이쯤 접근했다면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함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니 그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뜻이리라.
그럼 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한번…….
조걸이 손가락으로 창에 구멍을 냈다.
야수궁의 처소에 구멍을 뚫는 건 좋지 않은 일이겠지만, 어설프게 창을 열었다 청명에게 들키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나을 듯했다.
살짝 심호흡을 한 그가 뚫은 구멍에 눈을 가져다 대었다.
"……."
가만히 방 안을 바라보던 조걸이 금세 창에서 눈을 떼고는 몸을 획 돌렸다.
그리고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사숙."
"어떠하냐? 놈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무슨 짓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고요."
"……응?"
"토껴야 할 것 같은데요?"
"……으응?"
"빠, 빨리!"
"엥?"
조걸이 사색이 되어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나머지도 엉겁결에 일단 조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조걸을 앞지른 백천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뭘 어디로 도망쳐야 한다는 소리냐? 저기서? 아니면 야수궁에서?"
"아, 모릅니다! 일단 죽어라 뛰십시오!"
"아니! 말을 해 줘야 대처를……."
그때였다.
쿠쿠쿠쿠쿠쿠쿠쿠쿠쿠쿠!
백천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획 돌린다.
"아, 안 돼!"
청명이 들어간 전각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격한 그 떨림에, 백천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야, 야! 이 미친놈아! 여긴 야수……."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전각이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비산한다.
"뭐, 뭐야!"
"저거!"
달아나던 것도 잊은 그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앞에서 일어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은 소용돌이.
악룡(惡龍)이라는 말을 붙여야 적절할 것 같은 거대한 검은 소용돌이가 하늘로, 하늘로 끝없이 솟구친다.
콰아아아아! 콰아아아아!
맹렬한 기세로 회전하는 기의 용권풍이 세상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대체 방에서 뭔 짓거리를 하면 저런 게 생기지."
"돌겠네, 진짜……."
전각을 통째로 날려 버린 검은 용권풍의 색이 점점 변해 가기 시작한다.
먹이라도 풀어 놓은 것처럼 검디검었던 색이 점점 회색빛으로 변한다 싶더니 이내 새하얀 빛으로 변하고, 마침내는 투명하게 변해 버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하지만 맹렬하게 회전하는 그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처음보다 더 빠르고 강해졌다.
"어? 어어어엇?"
주변을 빨아들이는 소용돌이의 기세에, 가장 앞에 있던 조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아악!"
"조걸아!"
화산의 제자들이 황급히 조걸의 발목을 움켜잡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으아아아아아!"
조걸의 몸이 허공에 종이 인형처럼 나부낀다.
"야, 청명 이 빌어먹을 놈아! 제발 상식적으로 살자! 상식적으로! 으아아아아아!"
타당한 지적이었다.
그 말을 청명이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뿌오오오오오오오!
카아아아악!
하악! 하아아아아악!
놀라 뛰쳐나온 야수들이 소용돌이가 만들어 내는 인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소용돌이로 빨려들어 간다.
백천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악을 썼다.
"누가 저 새끼 좀 막아 봐!"
누가요?
대체 저 새끼를 누가 막습니까, 사숙?
마침내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청명의 모습이 보인다. 허공으로 일 장은 넘게 떠오른 그는 더없이 평온한 얼굴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얼마나 평온해 보이는지 당장 달려가서 턱주가리를 날려 버리고 싶을 정도다.
우드드득! 우드드드드득!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주변의 다른 전각들의 지붕마저 뜯겨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야수궁 자체가 박살이 나겠다고 생각할 찰나.
콰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기운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아아아아아아악!"
"야, 이 미친 새끼야아아아아아아!"
기의 폭풍에 휘말린 화산의 제자들이 허공으로 튕겨 날아간다.
쿵! 쿵쿵! 쿵!
십여 장은 넘게 튕겨 나가 바닥에 처박힌 화산의 제자들이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주변을 빨아들이던 용권도, 세상을 날려 버릴 기세로 뿜어지던 기운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박살 나 있는 전각들과 식겁하여 달아나는 짐승들만 아니면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할…….
"……리가 있나! 이런 미친!"
말 그대로 풍비박산된 주변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대경실색했다.
그때였다.
저벅. 저벅. 저벅.
부유하는 흙먼지 사이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온다.
세상 개운해 보이는 청명이 화산의 제자들을 발견하고는 입꼬리를 싸악 말아 올렸다.
"이제 뱀 새끼 잡으러 가자!"
"……."
우리가 잡히게 생겼어, 이 새끼야…….
제발 좀 적당히 좀 하자.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