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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27화 (227/1,567)

227화. 뭔 놈의 연못에 용이 살아! (2)

"아. 자존심 상해! 내가 한낱 뱀한테, 퉤! 아오 흙! 퉤퉤!"

청명이 입 안에 가득 밀려들어 온 흙을 뱉어 낸다.

흙을 뱉을 때마다 코에서 피가 주르륵 주르륵 흘러나왔다.

"……코피 좀 닦으라고."

"지금 코피가 중요……. 뭐야? 뭐가 이렇게 줄줄 흘러? 아이고? 뱀 새끼가 사람 잡네!"

그 몰골을 지켜보던 유이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소매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청명에게 다가온다.

아, 닦아 줄 생각…….

쑥. 쑤욱!

"아야! 아야야!"

유이설이 청명의 코에 손수건을 쑤셔 박는다.

청명이 저항했지만 유이설은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수건을 청명의 코 안으로 쑥쑥 밀어 넣었다.

"……."

저건 배려해 주는 건가 괴롭히는 건가?

……청명의 표정만 보면 괴롭히는 것 같은데.

코에 손수건을 쑤셔 박은 청명이 이를 빠득빠득 갈아붙인다.

"끄으으응. 어디 성한 데가 없네."

호들갑을 떠는 화산의 제자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야수궁주가 슬쩍 입을 열었다.

"묵린혈망은 운남의 수많은 영물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영물이다. 그나마 성격이 온순하고 자신의 영역만 침입하지 않으면 해를 끼치지 않기에 망정이지 포악하기까지 했으면 재앙이었을 거다."

"온순이요?"

"그렇지. 나름 온순한 편이다."

"끄응."

"다만 자신의 영역에 대해서는 과할 정도의 집착을 보이지. 돌 하나, 풀 한 포기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지. 저 묵린혈망의 감각을 속이고 신령초를 뽑아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 얘기를 좀 진작 해 주시지…….

"결국은 저걸 쓰러뜨려야 자목초를 구해 갈 수 있다는 뜻이네요."

"그렇지."

야수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에서 찾아온 매화검존의 후예들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유감스럽지만, 이 일만큼은 야수궁에서 도움을 줄 수 없겠구나. 전적으로 너희가 해결해야 한다."

대화를 마친 백천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청명에게 다가갔다.

"청명아, 아무래도 이 일은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포기는 뭔 놈의 포기야?"

"방법이 없지 않느냐. 칼이 박히질 않는데 무슨 수로 상대하려고? 방금은 운이 좋았다. 운이 나빴으면 제아무리 너라도 저놈의 밥이 되었을 거다."

"끄응."

청명이 앓는 소리를 냈다.

사실 까딱하면 죽을 뻔했다.

청명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저 꼬리치기 한 방에 깔끔하게 이승을 하직하고 염라대왕과 심도 깊은 면담에 들어갔을 것이다.

'뭐 저런 게 다 있지?'

저 거대한 덩치에서 나오는 힘은 둘째 치고, 더 끔찍한 것은 말도 안 되는 저 비늘의 단단함이었다.

강기를 있는 대로 끌어 올렸는데도 비늘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지금의 청명이라면 만년한철도 베어 버릴 수 있을 테니, 저 비늘 하나하나가 만년한철보다 더 강한 강도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청명은 귀찮게 됐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애초에 검술이라는 것은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 몸에 칼이 닿으면 베인다는 것을 전제로 갈고 닦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검이 들지 않으면 그 어떤 검술도 의미가 없다는 뜻과 같았다.

"결국은 내력이라 이거지?"

"그래. 지금 네 내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아무래도 중원으로 돌아간 다음에 방법을 마련……."

"알겠어. 일단 돌아가자!"

"오?"

백천이 살짝 놀란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놈이 웬 일로 사람 말을 순순히 들어먹지?

"일단 야수궁으로 돌아간다!"

"……."

아, 반만 들었구나.

그럼 그렇지.

"내력이 부족하면 내력을 늘리면 그만이지! 검술이고 나발이고 힘으로 깨 버리겠어!"

청명이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매화검존 때였다면 젓가락으로도 쑤셔 버릴 수 있었을 뱀한테 얻어맞고 도망가는 꼴이라니. 설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아이고, 사형! 장문사형!

제가 이리 삽니다!

호수를 한번 노려본 청명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읊조렸다.

"너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

그리고 몸을 획 돌려 야수궁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같이 가!"

"아니, 또 뭘 하려고?"

화산의 제자들이 부리나케 청명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야수궁주가 허허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 놈들이야."

* * *

"아무도 들어오지 마!"

"야, 이놈아 대체……."

쾅!

청명은 거칠게 문을 닫고 처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백천이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뭘 하려고."

윤종이 한숨을 쉬는 백천을 보며 슬쩍 입을 열었다.

"그래도 청명이가 아닙니까. 문제가 있을 때마다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냈던 놈입니다."

"……그래서 그 해결책이 언제 조용히 끝난 적이 있더냐?"

"예?"

"놈이 이상한 짓을 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지. 나는 그놈이 이상한 짓을 하는 곳이 남만야수궁이라는 게 걱정이다."

"……어,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네요.

윤종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야수궁도들의 시선을 느끼고 나니 절로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설마 그리 생각이 없지는 않겠죠?"

"그럼 좋겠다만……."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걸 아는 백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소로 들어간 청명이 봇짐에서 두 개의 목함을 꺼냈다.

하나는 큰 목함.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작은 목함.

거기에 품 안에서 또 하나의 작은 목함까지 꺼낸 그는 총 세 개의 함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한 번은 해야 했던 일이야.'

언젠가는 이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 과거에 비하면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강해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물론 지금의 청명은 과거로 치자면 화산에서 수련이나 하고 있을 나이이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더 많은 적을 상대해야 한다.

과거처럼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강해질 시간이 없다.

지금 이대로 수련만 한다 해도 30년 내로는 과거의 경지를 따라잡겠지만…….

'30년 동안 아무런 일이 없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어.'

종남이나 무당이 미쳐서 화산으로 쳐들어올 수도 있고,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마교의 잔당이 부활해 중원으로 밀고 들어올 수도 있다.

그리고 운이 나쁘면 저런 괴상한 영물한테 잡아먹힐 수도 있겠지.

그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이겨 내려면 우선 청명부터 더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화산 역시 강해질 수 있다.

'결국은 내력이야.'

이 육체에 맞춰 무학을 손보는 건 거의 끝냈다. 이제 내력만 있으면 자연히 과거의 무학들을 펼쳐 낼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청명이 입맛을 다시고는 앞에 내려놓은 세 개의 목함을 바라보았다.

딸깍.

첫 번째 커다란 목함이 열린다.

그 안에는 청명이 현종에게 강탈(?)한 혼원단이 들어 있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혼원단을 심유한 눈으로 바라보던 청명이 이윽고 두 번째 목함을 바라본다.

첫 번째 목함보다 작지만 더 고급스럽다.

딸깍.

두 번째 목함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악독한 향이 풍기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불길함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시커먼 색의 단환.

이게 바로 당문의 비전인 천독단(天毒團)이다.

천독단은 당문 최고의 영약이라 할 수 있다. 본래는 외인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청명에게 빚을 진 당군악이 특별히 내어 준 것이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 빛과는 달리 천독단은 복용자의 내력을 증진시켜 주는 천고의 영약이었다.

이를 복용한 이는 웬만한 독에는 중독되지 않고, 설사 중독이 되더라도 그 피해가 확연히 줄어들게 된다.

복용하는 것만으로 독에 대한 내성이 길러지는 무가지보 중 하나다.

"후우우우."

청명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마지막 목함을 바라보았다.

앞선 두 개의 영약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지금의 수준에 오른 청명이 영약을 감당하지 못할 리는 없으니까.

문제는 바로 이 세 번째다.

"끄응."

당군악마저 도무지 용도를 알지 못해 내어 주기 주저했던 것.

청명이 살짝 껄끄러운 손동작으로 상자를 열었다. 앞선 목함과는 다르게 백옥빛의 작은 자기병이 들어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자기병의 뚜껑을 열었다.

쏴아아아아.

열자마자 그 안에서 코를 자극하는 향이 흘러나온다. 살짝 달큼하면서도 시원한 향. 향으로만 따진다면 혼원단보다 오히려 더 청아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향기에 속아서는 안 된다.

이 자기에 든 것은 다름 아닌 당문의 독.

그것도 미인루(美人淚)라 불리는 극독이었다.

"후."

청명은 잠깐 매끈한 병의 표면을 응시하다 코로 가지고 와 독의 향을 맡았다.

"끄으으응."

코를 찌르는 향을 맡자마자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놈을 진짜 믿어도 되나."

청명의 머릿속에 옛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도사 형님."

"왜?"

"중원에서 제일가는 영약이 뭔 줄 아슈?"

뜬금없는 질문에 청명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하기야 당보 놈은 원래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내곤 했다.

"대환단? 아니면 태청단? 아니지. 혼원단이겠지."

"틀렸수다. 그것들은 영약이라고 할 수도 없지."

"……또 뭔 소리냐 그게."

청명의 표정을 본 당보가 낄낄대며 웃었다.

"진짜 영약은 우리 당문에 있단 말이지!"

"당문의 천독단은 다른 문파의 영약에 비하면 그 급이 떨어지는 걸로 아는데. 독도 잘 만들고 의술도 뛰어난 주제에 영단은 못 만들어서 웃음거리가 되는 곳이 당문 아니더냐."

"끄응."

할 말이 없다는 듯 당보가 입맛을 다신다.

"어쨌든 천독단 같은 게 아니오. 당문의 진짜 영약은 바로 미인루(美人淚)요."

"미인루?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럴 거요. 이건 독이니까. 그것도 당문에서도 정말 만들기가 어려운 독이지."

"……독이 영약이라고? 네가 요즘 여기저기서 많이 맞더니 맛이 좀 가 버린 모양이구나?"

"내가 어디서 맞았다고 그러시오! 다 도사 형님이 때린 거 아니오!"

청명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당보가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나더니 벽에 바짝 붙어 버린다.

"그, 그렇다고 불만이 있다는 건 아니고!"

청명이 피식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계속해 봐라."

"이 미인루는 천하의 수많은 독을 합쳐서 만든 것이외다."

"어마어마한 극독인가?"

"……아니, 뭐 생각만큼 그렇게 심한 독은 아니오."

"응?"

당보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은 독이란 독은 다 모아 놓으면 엄청 독해지겠지 싶어서 만든 거였는데, 이게 의외로 그렇게 좋은 효과가 나지 않았다는 말이지. 저들끼리 막 중화가 되고, 상승효과가 안 나서 반쯤은 실패한 독이외다."

매화검존 청명이 떨떠름한 눈으로 당보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도사 형님. 내력이란 게 뭡니까?"

"……기운이지."

"그렇지요. 기운입니다. 그런데 짐승들이나 식물들은 제 크기에 맞는 기운을 품을 뿐입니다. 하지만 무인은 그 기운을 자신의 몸 안에 끝없이 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짐승 중에서도 기운을 머금을 줄 아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걸 영물이라고 하지요. 그 영물들은 몸 안에 내단을 만들어 짐승의 한계를 뛰어넘지요."

"뻔한 소리 하지 말고 결론만 말해라."

"에이. 다 왔습니다. 그런데 기운을 품을 수 있는 짐승이 영물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독물 역시 기운을 품습니다."

"응?"

당보가 씨익 웃었다.

"독이 없는 짐승이 기운을 품으면 영물이 되고, 독이 있는 짐승이 기운을 품으면 독물이 되는 법이죠. 영물은 내단에 기운을 모으지만 독물은……."

"독에 기운을 모은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덩치 좀 커졌다고 독이 더욱 독해질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독물의 독이라는 것은 그 독물이 평생 모아 온 기운을 모은 영단이나 다름없다는 거지요!"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짜 냄새가 나는데.'

"그래서 저희 당문에서는 이 온갖 독물의 독을 뭉친 미인루를 흡수하여 내력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를 몇 번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됐는데?"

"다 죽었죠, 뭐."

"……."

아니, 이 새끼가?

청명의 팔뚝이 핏줄이 돋아나자 당보가 손을 내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아, 아니! 끝까지 들어 보십쇼! 끝까지!"

"그 헛소리를 계속?"

"헛소리가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실패는 했지만 효과는 있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죽었는데?"

당보가 씨익 웃었다.

"독 때문에 발광하는 놈을 제압하려고 당문의 고수들이 달려들었다가 모조리 처맞고 나가떨어졌거든요. 그 어마어마한 내력 탓에 당가가 무너질 뻔했답니다. 이백 년 전의 일이지만요."

"……."

"물론 독에 저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죄다 받아들이는 짓을 한 덕분에 아주 깔끔하게 한 줌의 혈수(血水)가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효과는 있다 이 말이지요. 그것도 다른 영단 따위는 근처에도 가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내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미인루는 천하의 극독은 되지 못했지만, 천하의 영약은 될 수 있다 이겁니다! 정화만 할 수 있으면!"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그걸 어떻게 정화하는데?"

"……나야 모르죠."

"……."

"내가 그걸 알면 이러고 살겠습니까. 벌써 미인루 한 사발 먹고 도사 형님 허리를 분지르고 있었겠……. 아니, 이건 말실수."

"분질러?"

"……."

"허리를?"

청명이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하하."

당보가 어색한 얼굴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난다.

"오냐. 오늘 한번 뒈져 보자!"

청명이 지체 없이 당보를 향해 날아들었다.

"히이이이익! 도사 형님! 아악! 그게 아니고! 야, 이 말코 새끼야! 도사가 사람을 이렇게 패도 되……. 아악! 살려 주십쇼, 형님!"

"죽어! 죽어, 이 새끼야! 죽어!"

* * *

"……."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던 청명이 미인루가 든 자기병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약팔이에 당하는 것 같은데."

이거 먹어?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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