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왜 너희가 그걸 모르느냐? (3)
"으……. 너무 많이 마셨나."
조걸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다 못해 곧 해가 뜰 판이다.
야수궁주가 주최한 잔치는 새벽이 늦도록 이어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야수궁주와 청명의 술 내기가 새벽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누가 이겼냐고?
'내가 어떻게 알아?'
도무지 음주를 생각이 없는 둘을 두고 나머지는 모두 처소로 돌아가 버렸다. 화산의 제자들 역시 지친 몸을 이끌고 야수궁이 배정해 준 처소에 먼저 짐을 풀기로 했다.
"끄응. 점심까지 안 깨우면 좋을 텐데."
하기야 저들도 많이 마셨을 테니까.
우물가에서 세안을 하고 얼굴의 물기를 털어 낸 조걸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처소로 가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이미 잘 준비를 마친 윤종이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안 주무십니까, 사형?"
"자야겠지."
윤종이 가벼운 대답과 함께 조걸을 돌아보았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걱정이라기보다는……."
윤종이 피식 웃었다.
운남까지 와 남만야수궁에 들어와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묻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아무리 야수궁주가 예상과는 전혀 달리 그들을 환대했다고는 하나, 이곳은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는 곳이니까.
하지만 윤종은 지금 조걸의 물음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걸아."
"예, 사형."
"미안하다. 이 못난 놈 때문에."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형!"
조걸이 정색을 했다.
"이미 다 끝난 일 아닙니까?"
"일이 잘 풀렸기에 망정이지, 까딱하면 나 하나 때문에 다 죽을 뻔했다."
윤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령 잘못되었다 해도 청명이 놈이 있으니 어떻게든 했을 겁니다."
"그게 문제지."
"예?"
윤종이 고개를 저었다.
"청명이 놈이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다. 나도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녀석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지, 짐이 되어서는 안 돼. 그런데 결국 짐이 되고 말았잖으냐?"
"사형……."
"멍청한 짓이었지. 다시는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사형."
조걸이 한숨을 쉬었다. 어떤 말을 해도 윤종의 마음이 씻은 듯 가벼워지진 않으리란 걸 알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왜 그러신 겁니까? 저는 사형이 그렇게 정색하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그야……."
윤종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뭔가 깊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고아였다는 것은 알고 있느냐?"
"예, 들었잖습니까."
"그럼 내가 거지 출신이라는 건 아느냐?"
"예?"
조걸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윤종이 그런 그를 가만히 보다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억이 있을 때부터 나는 어머니와 둘이 살았다. 친척도 없고 지인도 없었지. 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빌어먹는, 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지."
"……사형."
"아직 생생하다. 그 추운 겨울날에 누구하나 도와주지 않는 길거리에서 죽어 가던 때가. 더 우스운 건 그때 나는 추위보다 배고픔이 더 고통스러웠다. 열흘이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하니 나중에는 사람을 죽여서라도 먹을 것을 빼앗고 싶더구나. 내가 아이가 아니었다면, 필시 도적이 되었을 것이다."
조걸이 입을 다물었다.
윤종의 과거에 대해 이토록 자세히 듣는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항상 대제자로서 도인의 본분을 지키려 하던 그에게서 이런 적나라한 말을 듣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장로님이 나를 구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끝내 그 길바닥에서 죽었을 것이다. 화산은 내게 은인이지. 그 어려운 살림에도 죽어 가는 어린 거지를 살려 키워 줬으니."
윤종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과거를 추억하는지, 아니면 생각을 정리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조걸은 다만 함부로 입을 열어 윤종의 사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로 굶주리는 이들만 보면 옛 생각이 난다. 그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건지 알아서 그런 건지…….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하겠더구나. 배 속을 긁어내는 것 같은 그 고통을 다시 생생하게 느끼는 기분이었다."
"이해합니다 사형."
"이해한단 말이냐?"
"예, 사형."
"네가 죽었어도 나를 이해하겠느냐?"
"……."
"저승에서 내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었겠느냐?"
"사형."
윤종이 단호하게 말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이들을 돕는 것도 도지만, 내가 아는 이들, 사형제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 역시 도인 것을. 어찌 그것만 도라 생각했다는 말이더냐. 사문의 검마저 팔아먹고."
윤종의 얼굴에 깊은 회한이 묻어난다. 만약 일이 잘못되었더라면 그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윤종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화산으로 돌아가는 대로 장문인께 죄를 청하겠다. 다시 매화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럴 수 없다 한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그 참담한 목소리를 잠자코 듣던 조걸이 손을 내저었다.
"사형. 앞에 건 몰라도 매화검을 팔았다고 욕을 먹지는 않을 겁니다."
"어째서?"
"그야. 매화검은 화산의 검이지만 화산의 신물은 아니니까요."
"음?"
조걸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청명이 놈이 들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뭐? 신물? 신무우우울? 검에다가 매화 박았다고 신물이면, 옷에다가 매화 박았으니 옷도 신물이겠다? 술병에다 매화 박으면 술도 신물이냐?'
라고요."
"……."
조걸이 윤종을 보며 빙그레 웃는다.
"중요한 건 그런 신외지물이 아니지요. 사형이 얼마나 화산을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윤종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조걸의 말에 납득을 해서가 아니다.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편히 해 주려 애쓰는 조걸의 마음을 이해해서다.
"청명이 놈이 그랬잖습니까. 중요한 건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게 아니라, 실수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라고요. 사형은 배우셨습니까?"
"……그래. 배웠다."
"그럼 된 것 아니겠습니까?"
윤종이 한숨을 내쉬고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 괜찮으냐? 눈을 좀 떠 보거라.
'장로님.'
그를 안아 들던 현상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죄송합니다.'
"그만 주무시지요.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자목초를 찾아 화산에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그래. 그래야지."
윤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상으로 향했다.
침상에 누워 눈을 감고, 쉬이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하려는데 문득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형."
"음?"
"사형이 한 짓은 잘못된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래도 말입니다."
"응?"
"저는 사형이 그런 사람이라 좋습니다."
"……."
"주무십시오."
방 안이 고요해졌다.
손을 들어 눈가를 훔친 윤종은 굳게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아침이 올 때까지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 * *
"……살아 있나?"
"죽은 것 같은데?"
"아니, 숨은 쉬는 것 같기도 하고."
화산의 제자들이 처소의 앞에 엎어져 있는 청명을 보며 심각한 얼굴로 모여들었다.
조걸이 어디선가 주워 온 작대기로 청명을 콕콕 찔렀다.
"죽었나?"
"죽었겠지. 그만큼 처먹고 살아 있으면 사람이 아니지."
"상식적으로 사람 배에 들어갈 수 있는 양에 한계라는 게 있는데, 그걸 다 마신다는 것이 말이나 되나? 어제 그거 혼례 잔치 때 쓰려고 모아 둔 술이라며?"
"주정뱅이."
콕. 콕콕.
조걸이 꾸준히 찔러 대자 엎어져 있던 청명이 돌연 꿈틀했다.
"살아 있다!"
"도를 깨치랬더니 주도를 깨쳤네. 그것도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그래서 누가 이겼대요?"
그때였다.
"끄으으으으……."
엎어져 있던 청명의 입에서 지옥에서나 들려올 법한 끔찍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 내가 이겼……."
"그만 잠들어라. 너는 훌륭했다."
"그래, 그래. 이겼으니 죽어도 된다."
"카악! 안 죽었어!"
청명이 끄응 하고 아주 느리게 몸을 일으키곤 대청마루에 걸터앉았다.
"내, 냉수 한 잔만……."
"문파 꼴 참 잘돌아간다. 그렇지? 사숙이 사질한테 물도 떠다 바치고?"
백천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냉수를 내밀었다. 그러자 청명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냉수를 받아 단숨에 들이켜더니 그릇을 내려놓고 머리를 움켜잡았다.
"으으으……. 머, 머리가……."
"……그쯤 되면 주독을 날려 버리는 게 낫지 않겠냐? 전에는 그렇게 했잖아."
"그럴 거면 술을 왜 먹어, 물을 먹지!"
"그래, 그래. 전에도 똑같이 말했었다."
백천의 입에서 한숨이 푹 터져 나왔다.
반송장에 가까운 놈의 몰골을 보자니 한숨을 막을 길이 없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놈이 잘해 줬어.'
야수궁과 우호를 다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야수궁주와 친해지는 것이다. 이곳에서 야수궁주가 가지는 입지는 절대적인 것 같으니까.
알고 한 건지, 모르고 그냥 좋아라 마시다 보니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청명이 놈이 야수궁주와 친교를 제대로 다져 놓은 건 확실하다.
"아으, 죽겠네."
머리를 두어 번 내저은 청명이 고개를 들 때, 한 야수궁도가 그들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허리를 굽히는 자세에서 깍듯한 격식이 느껴진다.
하기야 야수궁주가 그들을 손님으로 인정했으니 태도가 달라지는 것도 당연했다.
"예."
"궁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뭐?"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벌써 일어났다고? 그렇게 퍼 마시고?"
그의 정색에 백천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무래도 청명이 네가 진 것 같은데?"
"……이, 이럴 리가 없는데?"
"패배자."
백천이 웃으며 야수궁도를 따라나섰다.
살다 보니 청명이 지는 모습도 본다. 그 사실이 더없이 유쾌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아주 잠깐 기쁨에 젖었던 백천의 눈에 어느덧 서글픔이 가득했다. 그들의 앞, 호랑이 가죽이 씌워진 거대한 의자에 앉은 야수궁주는 더없이 패기로운…….
아니. 패기롭지는 않다.
"끄으……."
'대체 둘이 얼마나 퍼마신 거야?'
무너지는 하늘도 거뜬히 떠받칠 것 같던 야수궁주의 얼굴이 하루 사이에 반쪽이 되어 있었다.
눈가가 시커멓고 퀭한 데다 볼까지 쑥 들어가서 흡사 죽을병이라도 걸린 사람 같았다.
그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청명을 향해 물었다.
"……괘, 괜찮으냐?"
"하핫. 저는 멀쩡하죠. 오늘도 마실……. 우욱! 마실……. 우우웁!"
화산의 제자들이 순간 사색이 되어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일단 입부터 틀어막으며 외쳤다.
"토하지 마, 미친놈아!"
"여기가 어디라고 토해! 삼켜!"
"양동이! 양동이 빨리!"
야수궁주가 그 꼴을 보며 껄껄 웃었다.
"그렇지. 그리 먹고 멀쩡할 수가 없……. 우웨에에에에에엑!"
"으아아아! 궁주님! 또 토하시면 안 됩니다!"
"여기! 여기다가!"
아수라장이었다. 참다못한 궁도 하나가 외쳤다.
"그렇게 속이 안 좋으시면 내력으로 주독을 다스리면 되잖습니까!"
"뭐야? 이 멍청한 놈아! 그럴 거면 술을 왜 처먹어? 물을 먹지!"
그러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천이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
"……나 저 말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착각입니다, 사숙. 그럴 리가요."
그때 한참을 몸부림치던 청명과 야수궁주가 입가를 훔치더니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면……."
"무승부인가?"
어젯밤 새벽까지 퍼마신 둘의 승부는 결국 술이 떨어지는 것으로 결착이 났다. 그럼 다음 날의 상태로 결판을 내야 하는데 망가진 꼴에도 별 차이가 없다.
"……대단하시네요."
"너야말로."
화산의 제자들은 초췌한 몰골의 두 사나이가 서로를 향해 엄지를 치켜드는 모습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잘 논다.'
'끼리끼리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네.'
'끔찍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야수궁도들의 삶도 그리 행복하지는 않겠다고. 궁주가 저놈과 비슷한 걸 보니 지옥을 겪고 있을 게 분명하다. 어쩐지 갑작스러운 동질감과 연민 같은 게 느껴진다.
"그런데 아침부터 왜 부르셨어요?"
"아, 그렇지."
야수궁주가 양동이를 옆으로 치우고는 입을 열었다.
"어제 네가 말했던 그 자목초인가 뭔가 말이다."
"예."
"옆에서 주워들은 놈이 벌써 상인들에게 문의를 한 모양이다. 알고 있는 상인이 오기로 하여 불렀다."
"와. 빠르네요."
"후후후. 운남인들이 원래 신속 정확하지."
두 사람이 낄낄대며 웃는 모습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면 한 이십 년은 알고 지낸 사이라 생각할 것 같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열고 상인이 들어와 두 사람이 더 이상 의기투합하는 것을 막아 주었다.
"운남의 태양이신 궁주님을 뵙습니다."
"허례는 치우고! 그래서 자목초에 대해 아느냐?"
자신이 누군지 소개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화끈한 화법이었다. 상인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지체 없이 본론을 꺼냈다.
"중원에서 말하는 자목초는 운남에서 말하는 신령초(神靈草) 말함입니다."
"뭐라?"
야수궁주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지금 신령초라 했느냐?"
"예, 그렇습니다."
"신령초를 찾으러 왔다고?"
야수궁주의 눈이 커진다. 그의 목소리에서 사라졌던 패기가 돌아왔다.
아니, 그게 뭔데…….
"……대단한 거예요? 그거?"
청명이 조금 찝찝한 마음으로 물었다. 반응이 격한 게 아무래도 영 분위기가 좋지 않다.
"……아니. 뭐 대단한 건 아닌데."
그럼 그렇지.
예전에 중원에 들어오던 품목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게 그리 대단한 것이라면 중원의 무역품목이 될 수 있었을 리 없다.
그러나 야수궁주는 여전히 곤란한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는다.
"끄으응. 그게 참 뭐랄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청명의 물음에 야수궁주의 커다란 입에서 한숨이 푹 나왔다.
"상황이 꼬여도 이리 꼬이는구나. 일단 너희가 말한 자목초, 그러니까 신령초는 운남에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그는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말로 해 봐야 별 소용이 없겠구나. 따라오너라. 내가 직접 신령초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겠다."
야수궁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커다란 몸을 보니 신뢰감이 절로…….
"따라오……. 우웁! 양동이! 양동이 빨리! 우웨에에에엑!"
……절로 사라지네.
절로 사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