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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23화 (223/1,567)

223화. 왜 너희가 그걸 모르느냐? (2)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상기됐다.

'매화검존께서.'

'그분이 그토록 위대했다니……!'

물론 매화검존은 화산의 자존심이다.

하지만 그건 화산 내에서일 뿐, 다른 곳에서는 화산의 매화검존을 그리 높이 여기지 않는다. 당장 일전에 무당을 만났을 때만 해도 매화검존이 무당의 검에 미치지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던가?

화산만의 자존심.

그런데 그 자존심이 이 먼 운남에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백천이 손을 뻗어 도원향이 든 술잔을 움켜잡고 단숨에 털어 넣었다.

"하!"

입 안에 향긋한 주향이 쫙 퍼지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다.

뿌듯해지는 가슴과 올라가는 어깨를 억제하기가 힘들다. 언제 화산이 이토록이나 인정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백천 역시 화산의 제자.

화산의 선조께서 저토록 위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정신 차리자.'

기분이 좋다고 아무 말이나 하다가는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 이곳은 남만야수궁. 아무리 야수궁주가 우호적으로 나온다고 해도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그럼……."

백천이 뭔가 말을 꺼내려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꼴꼴꼴꼴꼴.

"……."

"크하아아아아! 오늘 술빨 좀 받네!"

청명이 도원향을 아예 나발로 불고 있었다.

백천의 얼굴이 멍해진다.

'야수궁주 앞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야수궁주의 앞인데 저래도 되는 건가?

"캬아! 안주도 맛있네요. 오늘 좀 취할 것 같은데?"

"크하하하하핫! 너 정말 호탕하군! 마음에 든다! 그래, 오늘 어디 한번 진탕 취해 보자꾸나! 여봐라! 도원향! 도원향을 더 내와라!"

"구, 궁주님."

옆쪽에 시립하고 있던 궁도가 무척이나 곤란하다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창고에 있는 도원향은 모조리 내어 왔습니다."

"그래? 그럼 보고에 있는 도원향을 모조리 내와라! 따로 빼놓은 도원향이 두 상자 있을 것이다!"

"그, 그건 궁주님께서 손자분의 혼사 때 쓰신다고……."

"이런 멍청한 놈!"

쾅!

야수궁주가 탁자를 내리친다.

그러자 탁자가 허공으로 한 자는 붕 떴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그 와중에 청명은 술병을 귀신같이 잡아채어 귀한 술이 엎어지는 사태를 막아 냈다.

백천은 그 광경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내력도 쓰지 않고 이 거대한 탁자를 내리쳐 허공에 띄워 버리는 저 완력에 감탄해야 할지, 그 주먹질에도 버텨 낸 탁자에 감탄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아니, 그 와중에 술 챙기는 저 새끼가 더 감탄스럽긴 하다.

"지금 매화검존의 후예들이 왔는데 그깟 혼사가 문제더냐!"

"하, 하나!"

"이놈이?"

야수궁주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 어리석은 놈! 네놈은 매년 매화검존의 사당에 제를 올리지 않느냐?"

"물론 그분께서는 운남의 영웅이자 성인이십니다!"

"그런데 내가 이들을 성심성의껏 대접하지 않는다면 저승에서 그분이 내게 뭐라 하시겠느냐? 내가 그분을 뵙고 할 말이 있어야 할 게 아니냐!"

"아암."

청명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매화검존의 후예를 잘 대접하는 게 아니라 매화검존 본인을 잘 대접해 주고 있다.

조금 상황이 어긋났지만 뭐 어떤가? 후예보다는 본인을 대접하는 게 낫지. 야수궁주가 저승에 가서 이 상황을 알게 된다면 외려 더 뿌듯해할 것이다.

"어서 내와라! 당장!"

"예, 궁주님!"

결국 이기지 못한 궁도가 부리나케 달려가자 야수궁주가 껄껄 웃었다.

"이거 못난 꼴을 보였군."

"에이. 못난 꼴이라니요. 이렇게 호탕하신데."

"허? 그런가? 하하하하핫! 자네, 가면 갈수록 마음에 드는군."

"저도 궁주님이 마음에 드네요. 한잔 받으시죠."

청명이 손에 든 도원향을 병째로 야수궁주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다른 손으로 새 병을 집어 들었다.

"호오? 병째로? 그렇지, 그렇지! 사나이가 쩨쩨하게 잔으로 술을 마실 수야 있나! 이거 주도(酒道)를 아는 이로군."

"크으. 제가 도사다 보니 온갖 도에 통달해 있습니다."

"뭐? 크하하하하하핫! 좋아! 아주 좋아! 그럼 어디 도사님과 함께 술 한잔 마셔 볼까?"

청명과 야수궁주가 동시에 병나발을 불기 시작한다.

화산의 제자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망연히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뭐 저리 죽이 착착 맞아.'

'헤어졌다 다시 만난 부자지간 같네.'

'저 새끼는 운남에서 태어났어야 해!'

두 사람이 거나하게 술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던 백천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궁주님."

"음?"

야수궁주가 고개를 획 돌린다.

그 부리부리한 눈과 거대한 덩치에 움찔한 백천이 살짝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하신 말씀이 전부 사실입니까?"

"어떤 말? 매화검존에 대한 이야기 말하는 것이냐?"

"예, 궁주님."

"지금 화산의 제자가 내게 그걸 묻는 것이냐?"

"에이. 화내지 마시라니까?"

"으응? 그래, 그렇지! 껄껄껄껄."

야수궁주가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물론 나는 그분의 활약을 눈으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전대의 야수궁은 물론, 운남 전체가 아는 일이다."

백천이 살짝 고개를 갸웃한다.

"궁주님의 말씀대로 매화검존께서 그리 위대했다면 왜 그 사실이 중원에서는 거의 회자되지 않는 겁니까?"

퍽!

야수궁주가 들고 있던 술병을 탁자 위로 내리쳤다.

백천과 화산의 제자들이 움찔하여 몸을 뒤로 바짝 당겼다.

저 몸뚱어리 때문인지, 아니면 야수궁주라는 지고한 지위 때문인지 뭐만 했다 하면 심장이 벌렁거린다.

야수궁주가 두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듯 말했다. 귀를 아프게 하는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진다.

"그 빌어먹을 좀생이 같은 놈들이 암묵적으로 없던 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지!"

야수궁주는 자신이 더 분통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역사란 회자되어야 역사다! 역사는 일어난 일 그 자체만을 말하는 게 아니야! 일어난 일이 전해질 때 비로소 역사가 되는 법이다!"

야수궁주의 억센 얼굴에서 놀랍도록 안 어울리는 감정들이 묻어났다. 그는 안쓰러움을 가득 담아 백천을 바라보았다.

"화산의 상황이 영 좋지 않다고 들었다."

"……."

"본래라면 화산이 전해야 했지. 우리의 선조께서 그만한 일을 하셨다고. 하지만 화산은 그 말을 전할 사람도, 그 말을 할 힘도 잃었던 게다."

야수궁주가 속이 탄다는 듯 새 술병을 잡아 뚜껑을 뜯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니 회자되지 않을 수밖에.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그 사실을 말할 승자가 없다면, 승냥이들이 공을 차지한다. 중원과 운남이 연을 끊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다 저 빌어먹을 중원 놈들 때문이지.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은 것들!"

저…….

죄송합니다만, 저희도 중원인인데요.

살 떨려서 말을 못 하겠습니다. 궁주님.

화산을 대신하여 야수궁주가 분노해 주고 있었지만 청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술만 꼴꼴 마셔 댔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

정확하게 말하면 부채감 때문이다.

청명이 그 전쟁통에서 그만한 활약을 하고 마침내 천마를 쓰러뜨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인정해 버리면, 중원은 몰락한 화산을 내버려 둘 수 없게 된다.

협의를 내세우는 명문 거파들이 신세를 진 상대를 외면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 전쟁을 끝낸 이들에게 남는 여윳돈이 있었을 리 없다. 그러니 차라리 화산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 자체는 없던 것으로 해서, 은혜 자체를 없애 버리자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진 것에 가까울 것이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다.

누군가, 딱 한 사람만이라도

'화산에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말을 했다면 어떻게든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말을 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청명이 피식 웃었다.

무슨 기대를 할 수 있겠는가. 강호는 원래 비정한 법이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사당까지 세워 감사하는 이들이 특이한 것이다.

야수궁주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 전쟁은 너무도 많은 것을 앗아 갔구나. 그 전쟁통에 매화검존께서 등선하지만 않으셨어도 강호의 역사는 화산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을 것을……. 그분이 그리 가 버리셔서 화산이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했구나."

백천은 눈을 감고 말았다.

새삼 매화검존이라는 분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알 것 같다. 화산조차 자신들의 선조가 그토록 위대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잊힌 역사가 이 먼 운남 땅에서 그들을 반기고 있는 것이다.

"야수궁도 화산도. 그 전쟁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었지. 그리고 아직도 그 상처에 신음하는구나."

야수궁주가 술병을 들어 화산의 제자들의 잔을 채운다.

"받아라. 이건 같은 처지에 처한 이로서 너희에게 주는 술이다. 남만야수궁의 궁주가 주는 술이 아니라 가슴 아픈 역사를 가진 동료가 주는 술이다."

화산의 제자들이 두 손으로 야수궁주가 주는 술을 받았다.

그리고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잔을 비운 그들은 상기된 얼굴로 야수궁주를 바라본다.

"세상은 비정한 것이지. 아픔이 많겠구나."

"아뇨, 뭐 딱히."

"응?"

청명이 태연하게 말하고는 술병을 입에 물고 꼴꼴 들이켠다.

"크으으으."

그의 술병이 탁 소리와 함께 탁자에 놓였다.

"했던 일의 보상을 모두 받을 거라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거죠."

"……."

"그때 그 양반들도 뭔가 보상을 받겠다고 그런 건 아니었을 거예요."

"그 양반이라니! 선조님들한테!"

"저 조동아리!"

"야, 인마!"

"아 그렇지."

청명이 머쓱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었다.

'거 사형들한테 그 양반이라는 말도 못 하네.'

아, 원래 안 되는 거던가?

그럼 뭐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 청명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여튼 지나간 일은 그냥 지나간 일일 뿐이에요. 억울하다고 드러눕고 소리쳐 봐야 뭐 어쩌겠어요. 이미 끝난 일인데."

"으음."

"중요한 건 지금이죠. 우리 대에서 화산을 최고로 만들면 돼요. 그럼 그 과거도 당연히 인정받겠죠. 역사는 승자의 것이니까!"

야수궁주가 청명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입꼬리를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러면 된 거지. 그러면 된 거야."

답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뇌까리던 야수궁주가 손을 뻗어 청명의 등을 팡팡 때렸다.

"흐하하하하핫!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에 드는 말만 하는군! 과연 매화검존의 후예로다!"

"끄륵."

자신의 간단한 손동작이 매화검존의 후예가 아니라 매화검존 본인을 또다시 저승으로 보낼 뻔했다는 걸 모르는 야수궁주가 기뻐 죽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어쩌면 저 야수궁도들의 탄탄한 근육은 이 손길에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고, 청명은 생각했다.

"아 참 그렇지."

야수궁주가 고개를 획 돌려 청명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묻는 것을 잊었구나. 이 먼 운남까지는 어째서 왔느냐? 섬서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것이 결코 짧은 길이 아니었을 텐데."

"아, 그렇죠. 안 그래도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요."

"음?"

"혹시 여기에 자목초라는 풀이 있나요?"

"자목초?"

야수궁주가 고개를 갸웃한다.

"자목초. 자목초라……. 나는 처음 듣는 것 같은데."

"모르세요?"

청명이 눈을 찌푸렸다.

야수궁주가 모른다면 이건 문제다.

"그런 얼굴로 보지 말거라. 내가 야수궁주라고는 하나 운남의 모든 일에 대해 알 수는 없다. 더구나 나는 그런 자잘한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다."

아, 그래 보이네요.

근육 채우기도 바쁘신 분이 풀떼기 이름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지.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내일 당장 수하들에게 시켜 그 자목초라는 풀에 대해 알아 오겠다!"

"크으! 그렇게까지!"

"하하하핫! 매화검존의 후예가 왔는데 그 정도도 못 해 주겠느냐! 그러니 걱정은 집어치우고 먹고 마시자꾸나! 좋은 날이다! 너무도 좋은 날이야! 흐하하하하하핫! 자, 받아라!"

청명과 야수궁주가 다시 술병을 하나씩 들고 고개를 확 젖혀 입 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 꼭 닮은 모습을 보며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상에 닮은 사람이 꼭 하나는 있다더니.'

물론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저 청명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뭐, 덕분에 일이 잘 풀리고는 있지만.

"끄으! 어린 도사가 술이 세구나?"

"궁주님도 좀 마실 줄 아시네요?"

"뭐라? 허허?"

야수궁주가 술병을 움켜잡았다.

"오냐! 어디 한번 오늘 끝장을 보자!"

"에이. 그러다가 수하들 앞에서 망신당하실 텐데?"

"내 생전 술 내기로는 져 본 적이 없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마셔라!"

"좋죠!"

술이 미친 듯이 동나기 시작했다.

화산의 제자들도 어느새 긴장을 풀고 편히 마시기 시작했다. 손님으로 초대받은 곳에서 술을 마다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그래서 그때 매화검존이!"

"꺄르르륵!"

하지만…….

아무래도 저 대화에는 끼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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