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왜 너희가 그걸 모르느냐? (1)
뿌우우우우우우!
뿌우우우우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야수궁에 널리 퍼져 나갔다.
쿵! 쿵! 쿵! 쿵!
그에 이어 북소리도 슬슬 박자를 타기 시작한다. 이내 갖은 악기가 소리를 내뿜으며 신명 나는 가락을 만들어 내었다.
그 훌륭한 음율에 파묻힌 백천은 그저 멍한 얼굴로 허공을 보았다.
'환장하겠네.'
좌우에서 악기를 든 야수궁도들이 신나게 연주를 해 대고 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그들이 죄인처럼 서 있었던 광장에서는 나풀대는 천을 걸친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백천이 고개를 슬쩍 내린다.
눈앞에 산해진미가 계속해서 쌓이고 있었다. 접시마다 들어 본 적도 없는 기묘한 요리들이 놓여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요리들이지만 그 향과 빛깔은
'나 끝내 주는 요리요!'
라고 당당히 외치는 것 같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니 그의 사형제들도 마찬가지로 모두 넋과 혼이 빠져 있다.
'그렇겠지.'
당장 백천만 해도 이게 뭐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를 모르겠는데, 저들이라고 뭘 알겠는가?
그런 그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의 옆에서 호탕하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으하하하하핫! 많이 먹어라! 많이 먹어! 운남의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야수궁주가 껄껄 웃어젖힌다.
한번 웃음이 터질 때마다 그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고막을 진동시킨다.
귀에서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백천이 손가락으로 귀를 꾹꾹 눌렀다. 다행히 피는 흐르지 않았다.
"내 언제고 한번 꼭 화산을 방문하고 싶었거늘. 중원으로 갈 수 없는 몸이라 그동안 참고 있었다. 그런데 화산의 제자들이, 매화검존의 후예들이 이리 직접 방문해 주다니! 최근 들어 가장 기쁜 날이구나! 여봐라! 술을 내와라!"
"예, 궁주님!"
"도원향(桃原香)! 도원향을 내어 오도록 해라! 내 이 손님들을 제대로 대접해야겠다!"
"예, 궁주님!"
주변에 서 있던 야수궁도들 몇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궁주는 껄껄 웃더니 화산의 제자들을 흐뭇하게 돌아보았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불편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살 떨려서 눈을 못 마주치겠네.'
'여긴 뭐가 다 이렇게 커? 심지어 사람도 크네.'
'왜 머리가 저기에 있지?'
옆에 앉아 보니 야수궁주가 얼마나 거대한지 실감이 난다.
그들도 나름 청명의 수련을 통해 탄탄한 몸을 지니게 되었건만. 야수궁주의 옆에 앉으니 못 먹어 피골이 상접한 세 살짜리 아이가 된 기분이다.
"흐하하하하하하핫!"
쭈뼛거리는 그들을 보며 야수궁주가 또다시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을 때마다 꿈틀꿈틀 약동하는 근육을 보니 도무지 젓가락을 잡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거 진짜 다 먹어도 되는 거죠?"
한 놈만 빼고.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다 너희를 위해 준비한 것이다!"
"그 도원향인가 하는 술은 맛있나요?"
"운남 최고의 술이지! 원래 외인에게 내어 놓는 술이 아니다. 소량만 주조되기에 특별한 날에 특별한 이들만 마시는 술이지! 아마 천상의 향을 느낄 수 있을 거다."
"히히히힛!"
청명이 좋아 죽겠다는 듯 꺄륵꺄륵 웃어 댔다. 그러더니 태연하게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엄청난 속도로 흡입하기 시작했다.
"오, 이거 맛이 상당히 독특한데? 뭔가 낯선데 땅기는 맛이야! 다들 빨리 먹어 봐!"
그게 넘어가냐?
이 상황에서?
이제는 청명을 웬만큼 이해했다고 생각했었는데. 화산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저건 애초에 이해가 불가능한 놈이다.
그사이 야수궁주가 말했던 도원향이 나왔다.
새하얀 백옥자기에 든 술병 다섯 개가 놓이자 야수궁주가 눈을 불뚝 부라렸다.
"네 이놈들! 내가 도원향을 내어 오라 하지 않았느냐?"
"도, 도원향입니다, 궁주님."
"모조리 내어 오란 말이다, 모조리! 지금 네놈들이 대 매화검존의 후예들 앞에서 나를 망신 주려는 것이냐? 네 목을 쳐서 그 피를 마셔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그럼 죽어요.
죽었는데 어떻게 정신을 차립니까?
야수궁주가 노성에 궁도가 사색이 되어 연신 허리를 숙였다.
"지금 당장 모조리 가져오겠습니다!"
"당장!"
"예! 궁주님!"
부리나케 달려가는 궁도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야수궁주가 돌연 고개를 획 돌렸다.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거 부끄러운 꼴을 보였군. 중원의 손님들은 야수궁을 너무 탓하지 말아 주시게나."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밥도 주고 술도 주시는데. 다들 좋은 사람이죠!"
"하하하하! 화통하구만!"
"낄낄낄낄낄!"
화산의 제자들이 아연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뭐가 저렇게 죽이 잘 맞지?'
그동안 청명이 타문파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모습은 여러 번 보았지만, 저렇게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죽이 착착 맞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자. 한잔 마셔 보게나!"
야수궁주가 도원향을 들었다. 다른 사람은 두 손으로 잡아야 할 커다란 술병이 야수궁주의 손에 잡히니 어린아이 장난감처럼 보인다.
왜 술 다섯 병을 보고 화를 냈는지 이해가 가는 광경이다.
쫄쫄쫄쫄.
그가 화산의 제자들의 잔에 모두 도원향을 채워 주었다.
순간,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상쾌한 향이 코를 찔러 들어온다.
"하하하. 어서 들어 보게나."
화산의 제자들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술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세상에!"
입 안에서 말도 안 되는 향이 농밀하게 퍼져 나간다.
"괜찮은가?"
"……도원향이라는 이름이 더없이 적절합니다."
"으하하하하하! 젊은 친구가 말을 잘하는군! 사람을 기분 좋게 할 줄 알아!"
야구궁주가 팔을 쭉 뻗더니 백천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끅! 끄윽!"
백천의 몸이 불판 위의 오징어처럼 뒤틀렸다.
좋다고 툭툭 두드리는 손길이지만 맞는 입장에서는 내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충격이 느껴진다.
"하하하하! 이리 기분 좋은 날이 또 있겠는가? 내가 매화검존의 후예를 만나다니."
야수궁주의 말을 듣고 있던 조걸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으음?"
"외람되지만 운남에서 매화검존이 유명합니까?"
"뭐?"
세상 행복하게 웃던 야수궁주의 눈에서 돌연 새파란 광망이 튀어나왔다.
"운남에서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매화검존은 당연히 천하의 영웅이 아니더냐?"
"……예?"
조걸이 얼떨떨하게 반문하자 야수궁주는 되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 그럼 중원에서는 척마오걸(斥魔五傑)을 모시지 않는단 말이더냐?"
"척마오걸이요? 처음 들어 보는……."
"뭐라!"
끝내 궁주의 입에서 어마어마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기겁하여 귀를 틀어막았다.
"중원이 왜 척마오걸을 회자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이더냐! 그분들이 없었다면 운남이고 중원이고 모조리 그 잔혹한 마교의 발아래서 신음했을 것을! 중원 놈들은 은혜와 도리도 모른단 말이더냐!"
그는 정말로 분노가 치민 듯 소리쳐 댔다. 그 기세에 화산의 제자들은 돌처럼 굳어 버렸다.
어마어마한, 그야말로 태산 같은 기세였다. 그때 여전히 술을 음미하던 청명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에이. 왜 애들한테 화를 내세요."
"음? 아, 그렇지. 그래. 매화검존의 후예들에게 낼 화가 아니긴 하지!"
야수궁주가 다시 껄껄 웃는다. 그리고 살짝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너희는 척마오걸이 뭔지도 모른다는 말이더냐?"
"예."
"마교와의 전쟁에서 가장 눈부신 전과를 세운 다섯 명의 영웅을 어찌 모를 수 있지? 그럼 너희는 대체 마교를 어찌 이겼다고 들었느냐?"
"……중원의 모든 이들이 합심하여……."
"합심은 처맞아 뒈질 합심이야! 그 구겨 놓은 두꺼비 같은 놈들이!"
"워워. 진정하세요."
"으음, 그렇지. 너희 잘못이 아니지."
백천이 눈을 질끈 감았다.
세상에는 청명도 있고, 청명 같은 인간도 있다. 문제는 그 둘이 지금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가 지옥인가?'
적어도 그 비슷한 건 될 것 같았다.
잠깐 생각하던 야수궁주가 혀를 쯧쯧 찼다.
"척마오걸이란 그 끔찍했던 마교와의 전쟁에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인 다섯 영웅을 말한다. 그중 하나가 그대들의 선조인 매화검존이시고, 다른 하나는 그의 친우이셨던 사천당가의 암존당보. 그리고 남은 셋은……."
뭔가 말을 하려던 야수궁주가 눈을 찌푸렸다.
"알 것 없다."
"네?"
갑자기 뭔 소리야.
"애초에 척마오걸이라는 말은 매화검존의 눈부신 전과를 시샘한 강호의 잡것들이 그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을 억지로 밀어 넣어 만든 말에 불과하다. 그러니 너희는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야수궁주가 당당히 말했다.
"매화검존께서 마교를 무찌르셨다!"
화산 제자들의 몸에 소름이 내달렸다. 심지어 부르르 떨렸다.
설마 화산도 아닌 다른 곳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심지어 저런 말은 화산에서도 들어 보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감격이 밀려오려는 찰나…….
"엣헴!"
"……."
백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왜 저놈이 배를 내밀지? 얼씨구? 저 뿌듯한 표정은 뭐고?
다른 제자들은 그런 청명의 변화를 보지 못했는지 야수궁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매화검존께서 말입니까?"
"전혀 몰랐다는 말이더냐?"
"그분께서 천하에 손꼽히는 고수였고, 마교와의 전쟁에서 굉장한 활약을 하셨다고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뭐라! 천하에 손꼽히는 고수? 이 멍청한 놈이!"
야수궁주가 눈을 부라렸다.
"어느 미친놈이 감히 매화검존을 그 따위로 지칭한다는 말이더냐! 그분은 당대의 천하제일인이셨다! 그 마교조차도 매화검존의 매자만 들으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기 바빴는데! 감히 그분을 그따위로 불러?"
"에엣헴!"
"……."
청명아.
목 부러지겠다.
그런데 너 자꾸 왜 그러니?
"천하 모두가 그분께 구원을 받은 것이다! 심지어 우리 운남도 마찬가지였지! 그 잔혹한 마교의 마수가 운남을 향했을 때 그 빌어먹을 중원 놈들은 그간 친한 척하던 태도를 싹 바꾸어 우리를 외면했지. 때문에 우리는 멸문 직전까지 가야 했다! 그런데 매화검존께서 그놈들의 뒤를 쳐 준 덕분에 운남의 마교들이 중원으로 물러났지!"
"아……."
백천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이야기를 듣고 보니 중원인에 대한 적대적 태도와 매화검존에 대한 우호적 태도가 모두 이해가 간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교 놈들이 별동대를 만들어 운남을 완전히 정리하려 했을 때, 사천까지 달려와 그놈들을 싹 다 몰살시켜 버리신 분도 바로 그 위대하신 매화검존이시다! 그분께서 우리 운남을 지켜 주셨다!"
"오오!"
"그분이 아니었다면 야수궁은 멸문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은인이 아니겠느냐. 저 간악하고 비열한 중원인들 중 그런 성인이 등장하시다니,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난 꼴이지!"
"아, 그래서……."
"그래! 그래서 우리 야수궁은 매화검존의 사당을 만들고 매해 그분께 제를 올리고 있다. 은혜를 모르면 벌레만도 못한 법이지! 그분이 우리 운남을 그토록 아끼셨는데, 어찌 우리가 그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잊겠느냐?"
야수궁주의 찬사를 들으며, 청명은 흐뭇하게 웃었다.
'뭐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냥 여기서 싸워야 한다면 싸우고, 저기 마교 놈들 있다고 하면 달려가서 신나게 후려 깐 것밖에는 없다.
뭐?
운남을 아껴?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뭔가 심각한 오해가 생긴 모양인데, 굳이 바로잡아 줄 필요는 없겠지?
"심지어 그분이 운남을 지키셨을 때, 중원 놈들은 그분께서 사천까지 오는 걸 반대했다고 하더구나! 크으으으. 운남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셨다면 그분께서 어찌 그 반대를 무릅써 가며 오셨겠느냐?"
말만 해도 격한 감동이 몰려오는 듯, 야수궁주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가를 훔쳤다.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그런 일이."
"역시 매화검존!"
청명만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 소리지.'
내가 그런 적이…….
아?
- 도사 형님! 그 새끼들이 사천에 나타났답니다!
- 가자! 가서 대가리 다 깨 버린다!
- 그런데 지휘부 놈들이 가지 말라는데요?
- 그래? 그럼 더 가야지! 이 새끼들이 싸가지 없게 누구한테 명령질이야! 가자!
- 예!
어…….
그게 이렇게 되네?
허허허허.
역시 사람은 마음을 곱게 써야 돼.
야수궁주가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분은 당연히 성인으로 존중받으실 분이시지만, 무인으로서도 존경받아야 할 분이시다! 그분의 검은 하늘의 경지에 올라 그 사악한 마교도들마저 벌벌 떨었다. 그분의 업적은 너무도 눈부셔서 감히 일일이 입으로 옮길 수 없을 정도다."
"에에에에엣헴!"
"……."
백천이 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매화검존께서!"
"꺄륵!"
"그야말로 눈부신!"
"꺄르륵!"
"그분의 은혜를 잊지 않아야!"
"꺄르르륵."
"……."
이게 미쳤나?
아니, 미치긴 원래 미쳐 있었지만, 이제는 아예 완전히 맛이 간 것 같은데?
매화검존의 칭찬이 나올 때마다 청명이 몸을 배배 꼰다.
"그러니 내가 어찌 매화검존의 후예를 대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대들은 이 운남에서 손님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중원인이다! 그러니 편히 쉬고 즐기거라! 운남은 너희를 환영한다!"
야수궁주가 크게 소리쳤다.
"뭐 하느냐! 모두 먹고 마셔라! 내가 허락한다! 귀한 분들이 오셨다!"
"예, 궁주님!"
왁자지껄해지는 장내를 보며 청명이 흐뭇하게 웃는다.
'키야. 이리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봐야 해.
그렇죠 장문사형?
낄낄낄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