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지금 화산이라 했느냐? (6)
잠깐 얌전히 가는 듯하던 청명이 도로 슬쩍 고개를 밖으로 뺀다.
"아저씨.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요."
"……넌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청명을 보며 야수궁도들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저희 같은 놈들은 처음 본다고 하셨잖아요."
"아니. 너 같은 놈을 처음 본다."
"……."
아니. 이 양반 첨 본 사이에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
"……여하튼. 그럼 우리 전에도 야수궁으로 잡혀간 중원인이 있었다는 거죠?"
"당연한 말을 하는군."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야수궁도가 미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야수궁에 잡혀다가 풀려났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중원에서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없는데요."
"잘 아는구나. 그런데 뭘 물어보는 거냐?"
청명이 고개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는데?"
"……."
"다 죽은 모양이지?"
제발.
제발 그 주둥아리 좀 닫아라, 청명아. 제발.
화산의 제자들은 이제 차라리 빨리 야수궁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청명 놈과 이런 좁은 곳에 갇혀 간다는 건 너무 끔찍한 고행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소원은 금세 이루어졌다.
"문을 열어라!"
전각의 문이 좌우로 활짝 열리고 화산의 제자들을 실은 소달구지가 느리게 들어섰다.
"와……."
화산의 제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전각 안에 펼쳐진 광경은 그들의 상상 그 이상이었다.
드넓은 광장에 수많은 무인들이 좌우로 도열해 있다. 그리고 그 무인들의 주변에,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맹수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인간과 야수들이 조화로이 있는 광경은, 정말이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저거 호랑이 아닌가?"
"아니, 뭔 호랑이가 사람 옆에 앉아 있어?"
"저건 구렁이 같은데?"
"……왜 뱀을 목에 감고 있냐?"
백천이 눈을 끔벅거렸다.
남만야수궁의 무인들이 맹수를 부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설마 진짜 짐승들과 같이 살 줄이야.
게다가 지금 이곳에 있는 맹수들은 그들이 알던 것들에 비해서 두 배는 족히 크다.
"놀랄 것 없다."
그들을 압송하던 이 중 하나가 차갑게 말했다.
"곧 너희가 저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게 될 테니까."
그거 말이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우리가 먹일……. 아, 우리가 먹이구나. 그럼 배부르지. 그렇지.
청명이 피식 웃었다.
'재밌는 광경이네. 이럴 줄 알았으면 야수궁에도 미리 와 볼걸.'
전생에서는 너무 중원만 돌아다녔나 싶었다.
그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동안에도 야수궁의 무인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이들만 수백이다. 그리고 그들을 압송해 온 무리들도 백은 가볍게 넘겼다.
운남 전체를 감시해야 하는 야수궁의 문도들이 이곳에 모두 모여 있을 리 없다.
그렇다는 건, 이곳에 모인 이들도 야수궁의 모든 전력은 아니라는 뜻.
그 사실을 감안해 보면 야수궁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세외사궁.'
백천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이곳의 무인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강한지는 둘째 치고, 무공을 익힌 이들이 이리 많다는 건 실로 대단한 일이다.
천하의 소림도 이토록 많은 무승을 보유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거대한 짐승을 보고 겁을 먹은 소가 절로 발을 멈추었다.
그러자 야수궁도들이 잠가 놓은 문을 열고 화산의 제자들을 끌어냈다. 그리고 그들을 광장의 한가운데로 끌고 간다.
"아, 살살 잡아. 확 팔목 뽑아 버릴라!"
청명이 득달같이 눈을 부라리자 그를 끌고 가던 이가 황당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살다 살다 이리 겁 대가리가 없는 놈은 처음 보는군. 성질 같아서는 그냥 확!"
"성질 같아서는 뭐? 그냥 확 뭐? 내 성질은 어떤지 알아?"
모르는 게 나을 텐데?
"이익!"
야수궁도가 발작하려 하자 뒤쪽에서 서 있던 이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만둬라. 궁주님께서 곧 나오신다!"
궁주라는 말에 야수궁도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 반응만 봐도 야수궁주가 얼마나 두려움의 대상인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청명 일행을 광장의 가운데로 끌고 갔다. 그리고 정중앙에 세워 둔 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정말 말 그대로 세워 두었다.
무기도 뺏지 않고 몸을 속박하려 들지도 않는다.
"달아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요?"
"달아나 봤자라는 뜻이겠지. 저들의 눈을 피해 이 넓은 운남 땅을 통과한 뒤 사천까지 갈 수 있겠느냐?"
"……그렇네요."
지금까지 온 길을 되돌아가는 데만 해도 열흘은 걸릴 것이다. 야수궁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운남에서 그들의 피해 달아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당장 여기서 달아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다들…… 생각이상으로 강하다."
화산의 제자들이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위압적이다.
도열한 무인들의 구릿빛 육체는 탄탄한 근육으로 빈틈없이 덮여 있다. 눈빛은 하나같이 강렬하고 매서웠다. 야수궁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과는 다르게 모두가 정련된 군인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위압적인데 그 사이를 자유롭게 누비는 맹수들이 간간이 이쪽으로 이를 드러내며 위협을 해 온다.
이쪽을 향해 으르렁대는 호랑이의 날카로운 이빨이 섬뜩하기 그지없다.
"……저 호랑이는 중원에 가져다 놓으면 산신 소리는 쉽게 듣겠는데?"
"저쯤 되면 이미 호랑이가 아닌 것 아닙니까?"
"아까부터 머리 위에서 사람만 한 새가 날아다녀요."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왜 뱀을 목에 감고 있냐고, 왜?"
뭔가 오금이 저린다.
적이 강해서 불안한 게 아니다.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무언가를 마주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함이다.
운남이나 곤명에서 느꼈던 이질감은, 지금 야수궁에서 느껴지는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마치 이곳은 다른 세계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카아아아아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들의 바로 앞으로 백색의 섬전이 달려든다.
"뭐, 뭐야!"
카아아아아아!
달려든 섬전이 겨우 한 발짝 앞에서 멈춰 섰다. 전신이 순백색 털로 뒤덮인 담비였다. 털을 세우며 위협을 가해 오는 모습이…….
"여, 영물인 것 같은데?"
"고양인가?"
뭐?
모두의 고개가 청명에게로 돌아갔다.
이 새끼는 눈이 없나?
"쭛쭛쭛. 이리 와 봐. 쭛쭛!"
"하지 마! 그러다 손가락 잘려!"
쪼그려 앉은 청명이 성질을 부리는 담비를 향해 손을 내밀자 윤종과 조걸이 기겁하여 그를 뜯어 말렸다.
하지만 청명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왜? 말 잘 듣네. 착한데?"
"응?"
조걸과 윤종이 눈을 비빈다.
조금 전까지 털을 바짝 세우고 있던 백색의 담비가 어느새 청명의 품에 반쯤 안기다시피 해 손을 핥고 있었다.
중간 중간 애교를 부리는 꼴이…….
"필사적인데?"
"……뭘 느꼈나?"
열심히 꼬리를 쳐 대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다기보다는 간절해 보인다.
"……진짜 영물인가 보다."
"대가리는 소중한 거지. 안 맞아도 아는 걸 보니 확실히 영물이네."
동물은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안다던데.
영물쯤 되는 놈이 저리 열심히 꼬리를 쳐야 할 정도면 청명이 놈은 대체 얼마나 성격이 나쁜 건가?
어쨌거나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청명이 아예 담비를 들어다가 백천에게 들이밀며 낄낄거렸다.
"물어. 물어!"
"하지 말라고!"
"흐즈 믈르그!"
백천이 이를 갈았다.
이런 순간에도 장난을 치다니. 대단한 건지, 정신이 나간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순간!
쾅!
돌로 된 계단 위로 세워진 커다란 전각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사내가 보무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와……."
"오……."
순간 화산의 제자들 모두가 그 모습에 압도되었다.
마치 돌기둥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두터운 팔과 다리에는 약동하는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있고, 몸을 감싼 짐승의 털가죽 틈새로 드러난 대흉근은 강철보다도 단단해 보였다.
어깨 아래로 길게 자라난 머리는 그 결이 철사처럼 거칠어 폭발적인 야수성을 여지없이 보여 주었다.
'이, 이 사람이…….'
호랑이처럼 느리게 걸어 계단 위에 선 사내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노려보았다.
"중원인!"
우렁우렁한 일갈에 백천이 눈을 질끈 감았다.
때로는 말에 담긴 내용보다는 어투로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때가 있다. 야수궁주의 짧은 외침에는 그가 가진 중원인에 대한 적대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처음부터 너무 쉽게 생각했다.'
중원인에 대한 야수궁주의 적대감이 저 정도라면, 어떤 수를 써도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뿌드득.
이를 무섭게 갈아붙인 야수궁주가 소리쳤다.
"너희는 누구냐! 누군데 감히 신분을 위장하고 이 신성한 땅으로 들어왔느냐! 말하라! 그 이유가 충분치 않을 때에는 너희 모두를 갈기갈기 찢어 짐승 먹이로 주겠다!"
그 목소리가 어마어마한 공력을 담고 세상을 진동시킨다.
백천이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막으려다 움찔하고는 손을 내린다.
'어마어마한 내력.'
그 당가주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내력이다.
내력이 무력의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야수궁주의 내력은 지금까지 그가 본 이들 중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말하라! 저주받을 중원인들아! 그러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찢어 죽일 테니!"
야수궁주의 눈에 핏발이 선다.
저건 변명을 들어 보겠다는 태도가 아니다. 당당히 찢어 죽일 명분을 찾겠다는 태도다.
'어찌해야 하나?'
백천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난다. 단 한 번의 말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그때였다.
"저희는 화산에서 왔는데요."
화산 제자들의 고개가 획 돌아간다.
청명은 어느새 앞으로 두어 발짝 나서 있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콧잔등을 긁으며 말했다.
"뭘 좀 찾으러 왔는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어……."
"야! 야, 인마!"
"……딸꾹."
언제 어디서나 침착함을 유지하는 유이설마저도 이번엔 적잖이 당황한 듯 딸꾹질을 해 댔다.
그, 그걸 밝히면 어떡해…….
"화산? 지금 화산이라 했느냐?"
"네, 화산에서 왔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야수궁주의 눈에서 어마어마한 광망이 뿜어졌다.
"저주받을 구파일방이었던, 그 화산을 말하는 것이냐? 섬서의 그 화산! 네놈들이 그 화산의 제자들이라고!"
야수궁주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목소리가 두 배는 더 커지고, 그에 담긴 내력도 배로 늘어났다. 거의 음공(音功) 수준으로 터져 나오는 목소리 탓에 화산 제자들의 무릎이 휘청했다.
하지만 청명은 조금도 기 죽지 않고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외쳤다.
"네. 그 화산요!"
"이……."
야수궁주는 거의 계단을 박차고 뛰어 내려와 가공할 기세로 청명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청명의 바로 앞에서 굳건한 바위처럼 우뚝 멈춰 섰다.
"……."
화산의 제자들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야수궁주가 청명의 앞에 선 순간 그가 얼마나 거대한지 새삼 알게 되었다. 청명도 작은 키는 아닌데, 그의 머리가 야수궁주의 가슴팍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그 거대한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입에 힘이 들어가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 왔다.
그리고 그 기세에 어울리지 않게 야수궁주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화산?"
낮디낮은, 그래서 더욱 위협적으로 들리는 음성이었다.
"……."
청명을 눈빛으로 찢어 죽이겠다는 듯 노려보던 야수궁주가 갑자기 양팔을 획 들어 올렸다. 그 두 팔로 청명을 내려쳐 그대로 뭉개 버리겠다는 듯 말이다.
백천이 자신도 모르게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가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야수궁주가 팔을 힘차게 내리친다.
백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 돼!"
탁!
그러나 당장이라도 청명을 짓이길 듯하던 야수궁주의 커다란 손은 청명의 양쪽 어깨를 움켜잡았다. 굳건하게 힘을 준 그는 힘주어 말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바로 그 매화검존의 후예라는 말이더냐!"
"……네?"
어?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내 살아생전 매화검존의 후예를 만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어서오너라! 남만야수궁은 매화검존의 후예들을 환영한다! 그분의 후예라면 야수궁의 손님이 될 자격이 있다!"
"……."
네?
왜요?
"흐하하하하핫! 잔치를 준비해라! 손님이다! 손님이 오셨다!"
야수궁주가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그러자 야수궁도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일사불란하게 바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윤종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돌려 백천을 보았다.
"이게 뭐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입니까?"
"……."
나라고 알겠냐?
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