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220화 (220/1,567)

220화. 지금 화산이라 했느냐? (5)

"이른 아침부터 어찌 나와 계십니까?"

현상의 말에 현종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잠이 잘 오질 않는구나."

"아이들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렇단다."

현종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만 그 멀고 험한 곳에 보냈더니 영 마음이 편치 않구나. 현영의 말대로 그게 그 아이들을 위함이고, 화산을 위한 길임을 알고는 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다 그런 거지요. 어디 뜻대로 된다면 그것이 사람 마음이겠습니까?"

"그래. 그렇더구나."

현종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끌어 주어야 할 아이들을, 내가 모자라서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구나.'

현종의 가슴속에 남은 한이다.

화산은 청명의 등장과 함께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그 발전의 동력은 오로지 아이들이었다.

화산의 어른으로서 그들을 이끌어 주지 못하고 그저 그 아이들에 기대어 응원할 수밖에 없다는 게 때때로 현종을 서글프게 했다.

그때 현상이 조용히, 하지만 굳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문인, 아이들을 믿으시지요."

현종이 돌아보자 그는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현영이 놈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들이 우리보다 낫다고. 저도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황당했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 맞는 말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저희는 그저 그 아이들이 돌아올 수 있는 터전이 되어 주면 됩니다. 땅은 그저 품는 것이지요."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얼굴은 그리 쉬이 밝아지지 않았다.

"하나, 그렇다 해도 걱정이구나. 이토록 먼 외지에 나가는 일은 처음일진대."

그때였다.

"자, 장문인!"

저쪽에서 현영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현종을 향해 허둥지둥 달려왔다.

"이른 아침부터 무어가 그리 급한 일이 있다고 다급하게 뛰느냐."

"크, 큰일 났습니다! 장문인! 큰일! 크, 크, 큰일입니다! 아니, 진짜 큰일이라니까요!"

현종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현영에게 경박스러운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저리 혼을 빼놓고 다니는 이는 아니다.

저 정도로 호들갑을 떤다는 건, 정말 제대로 큰일이 벌어졌다는 의미였다.

"무슨 일이더냐! 알아듣게 설명을 해 보거라!"

"다, 당! 당가!"

"당가?"

"당가주! 당가주가 찾아왔습니다! 지금 산문 앞에 있습니다!"

너무 예상치도 못한 소식에 현종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누구? 누가 왔다고?"

"사천당가의 가주가 장문인을 뵙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당가주?

갑자기 당가주가 왜?

"어, 어서!"

"그래. 내 이럴 때가 아니지!"

현종의 발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숨에 산문까지 뛰어간 그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당군악을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포권을 했다.

아니, 포권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포권을 하기도 전에 당가주가 공손히 양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사천당가의 가주 당군악이 화산파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현종이 움찔하고는 입을 벌렸다.

사천당가의 가주.

그는 절대 현종보다 신분이 낮지 않다.

과거의 화산이라면 당가의 가주보다 힘이 강했겠지만, 지금의 화산은 감히 사천당가와 비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구파일방에서 쫓겨난 화산이 어찌 오대세가 중 하나이자 사천의 패자인 당가와 맞먹을 수 있겠는가?

그런 사실을 당군악이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 지금 그는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현종에게 예의를 표하고 있다.

현종이 어찌할 바를 모르자 현영이 그런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 어엇!"

조금 뒤늦게 정신을 차린 현종이 재빨리 맞포권을 했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현종이 대 사천당가의 가주를 뵙습니다."

인사가 끝나자 당군악이 고개를 들며 가볍게 웃는다.

"반갑습니다, 장문인. 연락도 없이 찾아온 것을 너무 탓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천당가의 가주께서 친히 와 주시다니요. 너무 놀라 제가 정신이 없습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그, 그런데 무슨 일로?"

당군악이 가만히 현종을 보며 입을 열었다.

"화산의 제자들이 당가에 다녀갔습니다."

"……예?"

"당가는 그들에게 은혜를 입었고, 그들과 친우의 연을 맺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화산에 찾아뵙고 앞날을 논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치, 친우라 하셨습니까?"

친우? 친구?

청명이 놈들이 당가와 친구가 되었다고?

현종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동맹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한 곳에 친우라는 말이 쓰였다. 이는 당가주가 화산과 동맹 이상의 관계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 그게 무슨……."

현영이 다시 현종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으응?"

현종이 영 감을 잡지 못하자 현영이 슬쩍 한발 앞으로 나섰다.

"방문하신 객을 산문에 세워 두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제가 객청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 그렇지! 객청! 객청으로!"

당군악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 당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문인. 저는 정말 화산과 좋은 인연을 맺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 증거로……."

당군악이 고개를 돌렸다.

"인사드리거라, 소소야."

당소소가 그 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사천당가의 여식 당소소가 대 화산파의 장문인께 인사 올립니다. 소녀는 사천당가를 떠나 화산에 입문하고자 하오니 장문인께서는 소녀를 가여이 여기시어 내쫓지 말아 주십시오."

"이, 입문?"

쟤가 왜?

현종의 얼굴에 혼란과 당혹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당군악은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

"제 여식입니다."

그러니까 네 딸이 왜?

도저히 상황을 따라갈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는 현종의 귀에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나마나 청명이 놈이 뭔가를 또 저지른 모양이군요."

"정확합니다."

"아……."

현영과 당군악의 대화를 들은 현종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이해가 안 가는 일이 있으면 거기에 청명이라는 두 글자를 끼워 넣으면 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서 하시지요."

"그러겠습니다."

"이쪽으로."

현영이 공손한 자세로 당군악을 안내했다.

당군악과 현영이 객청을 향해 한참 멀어질 때까지 현종은 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자 현상이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한다.

"거 보십시오. 우리 아이들입니다. 알아서 잘할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

"보나마나 운남에서도 잘하고 있을 겁니다. 그 아이들이 어디 보통 아이들입니까."

자부심 묻어나는 그 말에, 현종은 감동한 얼굴로 격하게 동의했다.

"그래. 그렇지. 그래야지."

그의 시선이 먼 남쪽으로 향한다.

저 멀리 어딘가에 화산의 제자들이 있다.

"잘해 내겠지! 잘하고말고! 아암! 우리 아이들인데!"

현종의 목소리에 커다란 기쁨과 기대가 묻어났다.

* * *

"……."

덜컥. 덜컥.

몸이 흔들린다.

청명이 유유자적 드러누워 평온하게 말했다.

"아, 간만에 편하게 가네. 진즉에 이리했으면 되는 거였는데."

"……."

"사숙도 좀 누워. 세상 편하네."

"……."

그러나 백천은 가만히 청명을 노려보기만 했다.

'이 새끼의 대가리 속에는 뭐가 들었을까?'

백천은 때때로 청명의 머리를 쪼개서 그 안에 뭔가 들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청명아."

"응?"

"괜찮겠니?"

"왜? 편안하게 모셔 주고 좋잖아."

편안?

모셔 줘?

백천이 슬쩍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인다.

드넓게 펼쳐진 대지와 삐죽이 솟아 있는 산들. 장엄하게 펼쳐진, 깎아지른 기암절벽들까지. 그야말로 절경이라 할 만했다.

그 시야의 사이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목제 창살만 아니라면 말이다!

"음머어어어어!"

그들이 탄 달구지를 끌던 소가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지금 청명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은 죄수들이 타는 목제 창살 달구지에 갇혀서 남만야수궁으로 압송되는 중이었다.

그런데 뭐?

편안?

백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청명아. 위기감이 좀 있어야 하지 않겠니?"

"위기는 무슨."

청명이 피식 웃고는 손을 깍지 껴 베개 삼았다.

"그럼 다른 방법 있어?"

"……."

"자목초를 구하려면 야수궁에 문의를 해야 하고, 야수궁주가 허락 안 해 주면 야수궁 놈들은 우리한테 아무 말도 안 해줄 거 아냐."

"그렇지."

"그럼 제일 좋은 방법은 야수궁주를 직접 만나는 거잖아."

"그도 그렇지!"

"그럼 이 방법이 제일 빠르잖아!"

"그게 문제라고, 이 썩을 놈아!"

백천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소란스러워지기가 무섭게 제지가 들어왔다.

쾅쾅!

호송을 하던 야수궁도가 화를 내며 창살을 후려쳤다.

"조용히 하지 못해, 이놈들!"

"끄으으응."

백천이 마지못해 다시 앉자 야수궁도가 혀를 차 댔다.

"아니, 이놈들은 뭐 하는 놈들인데, 잡혀 가면서도 이렇게 천하태평 뻔뻔해?"

"중원 놈들 중에 이렇게나 제정신 아닌 놈들은 처음 보는군."

"내버려 둬. 저러다 신담(神潭)에 끌려가 봐야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게 되겠지."

청명이 나무 창살 사이로 고개를 삐쭉 내밀었다.

"아저씨, 아저씨!"

"……이놈은 또 뭐야?"

"얼마나 더 가야 돼요?"

"허……."

야수궁도가 황당하다는 듯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건 숫제 마차에 탄 승객 같지 않은가?

"명을 재촉하고 싶은 모양인데, 안 그래도 곧 도착한다."

대답을 들은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걸은 그런 청명을 보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고, 유이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사고는 언제 또 잡혔어?"

"네 뒤에 계속 있었잖아."

"……사람이 뭔 존재감이 없어. 그런데 잡히기는 또 잡히네. 뭐든 있으면 좋은 쪽으로 써야지! 나쁜 쪽으로만 쓰냐!"

"언제는 또 잡힌 게 아니라더니!"

"아, 그랬나?"

청명이 너스레를 떨며 고개를 돌렸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구석에 처박혀 있는 윤종이 보인다.

청명이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양반은 또 왜 저래?"

"……자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잡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잡히긴 뭘 잡혀. 편히 가는 거라니까."

"말을 말아야지."

결국 혈압이 치솟은 백천은 입을 다물었다.

청명이 윤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윤종 사형."

"……응."

"좋은 의도를 가진 일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건 아냐."

"……."

"좋은 의도를 가지고 움직였다가 보답은커녕 그 일 때문에 오래도록 고통받는 사람들도, 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어."

그제야 윤종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초점 없던 눈에 조금씩 초점이 돌아왔다.

청명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그 일 자체가 부정되는 건 아냐. 사형은 보답을 받고 싶어서 그 일을 한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다."

"그럼 배에 힘주고 버텨. 내가 한 일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다."

윤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은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죠? 장문사형?'

화산은 천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주지 않았고, 되레 화산을 괄시하며 제 잇속만 챙겨 댔다.

그럼…….

화산이 행한 모든 일은 그저 실수였고, 잘못된 일이었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청명이 그리 생각한다고 해도, 저승에 있을 장문사형과 그의 사제들은 자신들이 한 일에 한 점 후회 없이 어깨를 펼 것이다.

청명과 그들이 천마를 막지 않았다면 화산 역시 사라졌을 테니까.

그리고 그 뒷수습은 지금 청명이 열심히 하고 있고.

"……생각하니 열받네."

사고는 지들이 치고!

수습은 내가 하고!

- 억울하면 때려치우든가.

"끄으으응."

청명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윤종을 위로하려다가 청명이 직격탄을 맞았다.

누가 누굴 욕하겠는가?

그때 백천이 주위를 슬쩍 돌아보며 말한다.

"지금이라도 탈출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딴 나무 창살 따위는 얼마든지 부술 수 있잖느냐?"

"탈출해서 뭐 하게?"

"그야……."

"중요한 건 자목초를 손에 넣는 거잖아. 이게 제일 빠른 방법이라니까. 몇 번이나 더 말해야 해?"

"끄응."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조걸이 돌연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킨다.

"봐라, 청명아."

"응?"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커다란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오?"

전각이 있는 곳은 지금까지 보던 운남과는 그 경치가 확연히 달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거대해 보이는 전각 뒤로 울창하기 짝이 없는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얼마나 숲이 우거져 있는지 빛도 한 점 들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오면서 봤던 황량한 들판과 너무 달라 이질적인 광경이다.

"여기가 남만야수궁인가."

백천의 중얼거림에 화산의 제자들의 눈에 긴장한 기색이 돌았다.

남만야수궁이라는 다섯 글자가 주는 무게가, 전각을 본 순간부터 피부로 와 닿는다.

더구나 그들은 압송 아닌 압송을 당하고 있는 처지가 아니던가?

거대한 전각을 보고 있으니 야수궁의 그 웅장한 힘이 확연히 느껴지…….

"오. 얘들은 그래도 돈이 좀 있나 보네."

"……."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 드나?

이 상황에서?

이 썩을 놈아?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