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지금 화산이라 했느냐? (4)
'하나, 둘, 셋……. 모두 다섯.'
백천의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야수궁의 궁도는 모두 다섯.
감당할 수 있는 수인가?
잠깐 생각하던 백천은, 이내 이런 고민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단 걸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충돌해 승리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충돌하지 않는 것이다. 적을 상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자목초를 구하러 온 것이니까.
"뭐 하는 짓들이냐?"
앞쪽으로 다가온 야수궁도가 아이들을 헤치며 화산 제자들의 앞에 와 섰다. 그러더니 펼쳐진 곡식 자루와 아이들 손에 들린 음식을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는 누구냐?"
"저희는 사천 화평상단의 상인들입니다. 허가를 받고 상행을 온 와중에 굶주린 아이들을 발견하여 음식을 나눠 주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나눠 줬다고?"
야수궁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흡사 모욕적인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같았다.
백천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저리 반응할 일이던가?'
어찌되었건 힘든 이들을 도운 것이다. 고마워는 못 할망정 화를 내다니? 아무리 외지인이 달갑지 않다 해도 이해하기 힘든 반응이다.
"중원 놈들이 감히 운남인을 거지로 보는 것인가! 감히 제멋대로 이딴 일을 벌여? 상행을 왔으면 곱게 할 일만 하고 돌아갈 것이지!"
야수궁도의 얼굴이 사나워진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네놈들이 벌인 일 때문에 운남이 이토록 피폐해졌거늘! 이제는 음식을 나눠 주며 운남인들을 농락해?"
백천은 당황한 기색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이 일로 그 이야기까지 나오는 건가?
'정말 적대감이 상상 이상이로군.'
아무래도 논리가 통할 상대가 아닌 듯했다. 그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일을 벌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깊게 고개 숙인 백천의 미간이 남몰래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아이들에게만 곡식을 나눠 준다고 했다지만, 어른들이 이렇게 조금밖에 찾아오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굶주린 이들이 어디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쓰겠는가?
'운남인들이 중원인을 크게 적대한다는 걸 감안했어야 했어.'
깨닫는 게 늦었지만, 수습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백천이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바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낮은 자세에도 야수궁도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찼다.
"어디 소속이라고?"
"화평상단입니다."
"화평, 화평이라……."
잠깐의 정적 후, 야수궁도가 미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화평상단에서 너 같은 놈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백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 리가 없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나, 이자가 곤명을 관리하는 자이고, 그래서 소수만 드나드는 상단원들의 면면을 알고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또 아닐 것이다.
결국 백천은 가장 무난한 대답을 골랐다.
"제가 신입이라."
"호오, 그래?"
야수궁도가 뒤쪽을 가리켰다.
"그럼 너와 같이 있는 이들도 모두 신입 상인들이겠군."
"예, 그렇습니다. 화평상단에 확인해 보시면 될 것입니다."
"음. 그렇군."
야수궁도의 미소가 짙어진다.
"새로 들어온 신입 상인들이 본단과 떨어져서 구휼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지?"
"저희는……."
"아아, 알고 있다. 확인해 보라는 말이겠지. 그러니……."
야수궁도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희의 신원을 확인해 볼 동안 잠시 잡혀 있는 것 정도는 감수할 수 있겠지? 너희가 정말로 화평상단의 상인들이라면."
윤종의 눈이 살짝 흔들린다.
화평상단이야 당연히 그들이 새로 들어온 상인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 야수궁도들이 의심을 품었다는 점이다.
"물론입니다."
백천은 최대한 시비거리를 만들지 않았다. 지금은 그게 최선이니까.
백천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재미가 없어졌는지 야수궁도가 묘한 표정을 짓는다.
"너희는……."
"그만해라."
그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야수궁도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중원인들이라고는 하나, 어려운 이들에게 베풀려 한 이들이다. 중원인들에게 우리가 은혜도 모르는 놈이다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느냐?"
"……알겠습니다, 사형."
백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체념한 듯 순순히 몸을 돌려 돌아가던 야수궁도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도를 빛살처럼 뽑아 백천의 목을 향해 그었다.
백천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자신의 목으로 날아드는 도를 막아 냈다.
카앙!
매서운 공격이 막혔음에도 야수궁도는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무인이로군."
"……."
"그것도 내 도를 막을 정도의 무인인데, 한낱 상인 짓을 하고 있다니."
백천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여기서 더 변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상한 놈들이다. 모두 잡아가도록!"
"예!"
백천이 검을 잡은 채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그러자 뒤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야수궁도들이 천천히 화산의 제자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사숙……."
"어찌합니까?"
응전할지, 아니면 달아날지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다.
'빌어먹을.'
백천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겨우 반나절도 안 되어 이 꼴이 될 줄이야. 운남 땅을 너무 얕봤다.
그때 윤종이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숙. 저 때문에……."
"사과하지 마라."
하지만 백천은 단호하게 그 말을 잘랐다.
"결정을 한 건 나다. 그러니 책임도 내가 지는 게 맞다."
그 행동이 옳았는가 틀렸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백천은 허락을 했고, 그 순간부터 모든 책임은 그가 지게 되는 것이다.
그는 찰나의 고민 끝에 굳어진 얼굴로 외쳤다.
"응전한다!"
"예, 사숙!"
조걸이 검을 뽑아 들었고, 윤종 역시 재빨리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
아.
팔아먹었지.
분신과도 같은 검이 없다는 사실에 윤종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조걸이 뚱한 눈으로 윤종을 바라본다.
"……어디서 나무 작대기라도 주워 보십쇼."
"궈, 권각술이 있다."
"나무 작대기 찾아보십쇼."
"……."
물론 기본적인 육합권이야 배웠다만, 어디 그걸 검술에 가져다 대겠는가?
청명은 그들에게 말 그대로 '기본으로써의' 육합권을 강조했고, 그 덕분에 윤종의 권각술도 말 그대로 딱 기본만 하는 수준이었다.
윤종이 전력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백천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점차 포위망을 좁히는 야수궁도들의 기세가 상상 이상이다. 세외사궁은 결코 구파일방에 뒤지지 않는다더니, 세인들의 그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돌파한다! 윤종은 내 뒤에 바짝 붙어라!"
"예, 사숙!"
백천이 검을 앞으로 겨눴다.
그러자 앞을 막아섰던 야수궁도가 헛웃음을 흘렸다.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이곳은 운남이다. 너희에게 남은 선택지는 둘뿐이지. 하나는 이곳에서 단칼에 죽든가. 아니면 끝없는 들판에서 죽어 가든가."
"어느 쪽도 달갑지 않군."
말을 하면서도 백천의 눈은 퇴로를 살피고 있었다.
'일단은 이 성안을 빠져나가야 한다.'
생각은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백천이 뒤쪽을 바라보자 야수궁도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헛된 꿈을 꾸는군. 야수궁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 주지! 쳐라!"
명이 떨어지자 주변을 둘러싼 야수궁도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앞쪽으로 간다!"
"예! 사숙!"
백천이 이를 악물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니,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가 채 땅을 박차기도 전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쾅! 쾅! 쾅!
커다란 소음과 함께, 이쪽으로 돌진하던 야수궁도들이 빠른 속도로 도로 튕겨 나간다.
"뭐, 뭐야!"
"웬 놈이냐!"
온몸에 털이 쭈뼛 선 백천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설마…….
"호오오오오오오오?"
망할.
검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결코 빠르지 않은, 정말 빠르지 않은 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그곳에, 악마가 하나 서 있었다.
"누가……."
"……."
"사고를 친다고?"
"……."
그 악마는 당연히, 그의 사랑스러운 사질 청명이었다.
청명의 고개가 옆으로 삐딱하게 꺾였다.
"내가?"
"……."
"아니면 사숙이?"
백천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야수궁에 잡혀가는 게 낫지. 하필이면 이 상황에 저놈이 올 줄이야.
"거, 사고를 치니 마니 하시던 분이 아주 거어어어어하게 저지르셨네! 거하게! 세상에, 어떻게 곤명에 들어온 지 반나절도 안 돼서 이런 대규모 사고를 치시나?"
"그, 그게……."
"말을 말아야지. 어휴! 사숙, 사형들 뒤치다꺼리하는 게 내 일이지. 아이고, 내 팔자야!"
백천과 윤종, 그리고 조걸이 동시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진짜 양심도 없나!'
'아니, 왜 하필 이럴 때 귀신같이 나타나서는!'
'차라리 야수궁이 친근하다! 차라리!'
정말 끔찍한 상황이다.
그러나 몸을 떨어 대면서도, 그들의 표정은 어느 정도 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청명이 놈이 왔으니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서다.
하지만 그 미묘한 반가움도 오래가진 못했다.
고개를 획획 돌리던 청명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됐다.
"매화검은 또 어디 팔아먹었어!"
"……."
윤종은 마땅한 대답을 찾으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와는 달리 조걸은 딱히 눈치가 없었다.
"곡상에."
"……응?"
"곡상. 곡물상."
"……진짜 팔아먹었어?"
"……."
"……."
청명이 멍한 눈으로 윤종과 조걸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젠 하다하다, 허……. 허허……."
정말로 어이가 없다는 듯한 그의 시선에, 둘의 고개가 한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사실 어떻게든 이리저리 말을 하면 이해시킬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설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문파 꼴 자알 돌아간다! 자알 돌아가!"
어이없음을 지나 분노하기 시작한 청명에게서 두 사람을 구해 준 건, 우습게도 다름 아닌 야수궁도였다.
"웬 놈이냐!"
패기 넘치는 야수궁도의 외침에 청명의 고개가 획 돌아간다.
"아니, 근데 진짜 저 새끼가 뒈지려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어디서 놈놈 거려! 그러는 너는 웬 놈인데, 이 새끼야!"
"……."
폭풍 같은 욕설에 야수궁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저놈은?'
웬 놈이냐 한마디 했다고 저런 반응이 나오나?
화가 나기보다는 황당하다.
"이, 이놈이."
"이게 그래도 미쳐서 놈놈대네. 너는 이따 보자."
청명이 눈살을 한번 찌푸리고는 사형제들을 돌아보았다.
셋 다 슬쩍 청명의 눈을 피하며 애먼 데다 시선을 꽂았다.
청명은 그 셋 중에서도 백천을 콕 집어 뚫어져라 보았다.
"걱정 마십시오, 사숙! 저는 사고를 치지 않았습니다!"
"……잘못했다고."
그만하라고, 이 망할 사질 놈아!
청명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상황이 여기까지 와서 하는 말인데, 오는 길에 내가 좀 알아봤거든요? 근데 이게 여기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고."
"음? 그게 뭔 말이야?"
"자목초를 구하려면 애초에 야수궁에 말하는 수밖에 없다는데?"
"정말?"
"사정 잘 안다는 약재상이 그러더라고."
"……그럼 어떻게 하려고?"
"어떻게 하긴."
청명이 씨익 웃으며 검을 검집째 들어 올렸다.
"얘네 적당히 패서 잡은 다음에 야수궁에 가서 궁주 만나 봐야지. 그게 제일 빠른 방법 아니겠어?"
"제일 빨리 죽는 방법 같은데."
"생과 사는 여일하니, 시주는 삶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구려."
"그건 불교야, 이 미친놈아!"
"아. 착각했다."
청명이 씨익 웃고는 검을 들어 올린다.
"자, 그럼……."
목을 좌우로 두 번 꺾은 청명이 피식 웃으며 야수궁도들을 보았다.
"그냥 순순히 궁주에게 안내할래? 아니면 맞고 안내할래?"
"……."
누구라도 분노할 상황이건만, 개중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야수궁도는 의외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참 동안 청명을 바라보다 가만히 입을 열었다.
"궁주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그래."
"안내를 해 달라 이거지?"
"잘 아네."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간만에 곤명을 방문해 주신 손님이신데, 내가 안내를 해 드려야지."
"말귀를 잘 알아듣는 놈이네. 앞장서."
"아, 다만. 안내는 해 줄 수 있는데 방식은 조금 생각과 다를 수 있다."
"응?"
그때였다.
등 뒤에서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응?"
청명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저 모퉁이에서 걸어 나오는 수십 명의 야수궁도가 보였다.
"하하. 저걸 믿고 지금……."
비웃으며 고개를 앞으로 돌리니 반대편 길에서 나타난 수십 명의 야수궁도가 보인다.
"오, 좀 많은데? 오늘 운동 좀……."
옆 건물 위로 수십 명의 야수궁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
골목길에서, 담벼락 위로, 그리고 심지어는 건물 안에서까지 야수궁도들이 걸어 나왔다.
"……이쯤 되면 땅 밑에서도 나올 만한데?"
다행히 거기까진 가지 않았다.
주변을 포위한 수백의 야수궁도들을 보는 청명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어, 그래서 안내는 해 준다고?"
"물론이다."
앞에 선 야수궁도가 환하게 웃었다.
"침입자는 살려서 궁주님의 앞까지 끌고 가는 게 원칙이니까."
"아, 그래?"
청명이 자신의 사형제들을 보며 잘됐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가 준다는데?"
"……."
데려가는 게 아니라 잡아가는 거잖아,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