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지금 화산이라 했느냐? (1)
"보이느냐?"
"예, 형님!"
"보아라! 저 광활한 대지를! 이곳이 모두 우리 형제의 땅이 될 것이다!"
호호탕탕한 목소리가 널리 퍼져 나갔다.
"이곳에는 우리를 귀찮게 하는 관도, 심심하면 사람을 못살게 구는 협객 놈들도 없다. 이제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의 뜻을 마음껏 펼치면 된다!"
"물론입니다! 형님!"
"흐하하하하하! 올해가 지나기 전에 이곳의 모든 이들이 우리 장호채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겠다! 자아, 가자! 나의 형제들아! 훗날 역사는 이곳을 우리의 시작으로 기억할 것이다!"
"예! 형님!"
"물론입니다, 채주님!"
들끓는 열정.
뜨거운 의리.
그야말로 역사의…….
따아아아아악!
"끄륵!"
방요가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움츠렸다.
"이게 딴생각을 하네? 이제 편하다 이거지?"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고 도사님! 제가 미쳤다고 딴생각하겠습니까?"
"미쳐서 딴생각하는 게 아니지. 뒈지려고 딴생각을 하는 거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방요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냥 고향으로 내려가 땅이나 일구고 살 것을.'
뭐? 변방의 지배자?
지배자는 얼어 죽을! 이러다 맞아 죽게 생겼다.
"소처럼 끌란 말이야! 소처럼!"
"넵, 도사님! 소처럼 끌겠습니다! 음머어어어어!"
방요의 눈에 서글픈 눈물이 고였다.
"끄으으응."
팔다리를 주무르는 방요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청명들에게 잡힌 이후로 그들의 일과는 아주 단순해졌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정말 말 그대로 우마(牛馬)처럼 짐마차를 끈다. 새벽이 깊어 더 이상 이동할 수 없게 되면, 다른 이들의 숙영준비를 돕고, 그러고 나서야 겨우 짧디짧은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부, 부채주님. 너무 힘듭니다."
"어흐흑. 진짜 죽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그의 수하들이 질질 짜며 한탄을 하기 시작하자, 방요의 눈가에도 살짝 눈물이 고였다.
'내가 어쩌다 저런 놈들에게 걸려서는…….'
그들은 마적이다.
그것도 사천의 외지에서는 사신처럼 악명을 떨치는 장호채였다.
하지만 장호채의 부채주인 방요는 세상은 넓고 진짜 '사신'이라 불릴 만한 이들은 따로 있다는 것을 절절히 실감하는 중이었다.
"……막내는 아직 정신이 없느냐?"
"……아마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방요는 구석에서 입을 헤 벌리고 있는 막내를 보다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나름 준수하게 생긴 막내의 입가에서 침이 질질 흘러내린다.
"……평생을 백치로 살아야 한다고?"
"아무래도……."
"끄으으응."
젊다는 건 패기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막내 공소는 그 젊은 패기를 하필 저 청명이라는 도장에게 대드는 것으로 증명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버럭버럭 대드는 공소의 패기를 본 청명 도장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 허허. 소 새끼가 말을 하네.
방요는 그 목소리를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말을 끝으로, 청명은 마차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뒤꿈치로 공소의 대가리를 찍어 버렸다.
그 이후로 공소는 내내 저 꼴이었다.
남은 인생 동안 제 손으로 밥 한 술이나 제대로 뜰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공소가 그리된 후로는 발이 부르트고 팔다리가 부러질 것 같아도 누구 하나 힘들단 말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게다가…….
진짜 힘든 건 그들이 아니었다.
털썩.
털썩!
"끄으으으으으……."
"……."
방요는 저 앞에서 털썩털썩 쓰러지는 화산의 제자들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불과 한 식경의 수련만으로도 거의 걸레짝이 되어 버린 그들을 보고 있자니 감히 힘들다는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없다.
그때, 방요의 눈에 유일하게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온다.
"수련을 하면 버티는 시간이 늘어나야지! 왜 매번 버티는 시간에 차이가 없어? 노오력을 하란 말이야! 노오오오력을!"
방요의 허망한 시선이 바닥에 쓰러져 꿈틀꿈틀 경련하고 있는 조걸에 가 꽂혔다.
"……."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마도 처음에 자신들을 복날 개 패듯이 팬 게 바로 저자였던 것 같은데…….
그런데 지금 그 조걸이 저 청명이라는 어린놈에게 얻어맞아 먼지를 풀풀 날리고 있다.
'뭐? 변방에서 힘을 키워 중원을 도모한다고?'
채주 놈의 말을 떠올리자 혈압이 극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중원?
중워어어어언?
'그 또라이 같은 놈이!'
저런 놈들이 득실득실 거리는 중원을 무슨 수로 도모한다는 말인가! 중원을 도모하기 전에 내 모가지가 도모당하게 생겼다!
그때 청명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쭈? 여길 볼 힘이 남아 있네?"
마적들이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쯧쯧쯧. 저것들도 사람이라고."
청명은 혀를 차며 어딘가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이윽고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끄으으으응."
조걸이 몸을 바들바들 떤다.
"귀신은 뭐 하나! 저놈 안 잡아가고!"
"……귀신도 겁은 있겠지."
"어휴!"
조걸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윤종을 일으킨다.
"사형. 정신 좀 차려 보십시오."
"여, 여기가 어디냐?"
"……아닙니다. 그냥 주무십시오."
그 와중에도 사형제는 알뜰살뜰하게 챙기는 조걸이었다.
백천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연다.
"얼른 씻고 정리하자. 그래야 조금이라도 자지."
"저는 오늘 수련한 걸 조금 더 정리해 보겠습니다."
"괜찮겠느냐?"
"잠이야 낮에 짐마차 위에서 자면 되니까요. 말들에겐 미안해도 저것들에게는 미안할 것도 없고."
"흐음. 듣고 보니."
화산의 제자들이 슬쩍 마적들을 바라본다.
그 눈빛을 받은 방요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저 개도 안 물어 갈 것들.'
화산의 제자들이 저들끼리 쑥덕대더니 한쪽으로 멀어져 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적떼가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왜?"
"혹시 우리가 살아 돌아가게 된다면 다시는 중원 쪽으로는 오줌도 싸지 맙시다."
"……꼭 그러도록 하자."
지금도 그들보다 어리고 강한 이들이 저리 피를 토할 정도로 수련을 하는데 당해 낼 도리가 있겠는가?
'중원은 저런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인가?'
이상한 오해를 낳아 버린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끄으으으응."
"꺼어어어어……."
"끄으으으으……."
사람이 끄는 짐마차가 쉼 없이 길을 나아갔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왜 사람이 짐마차를 끌고 있어? 말은 왜 그냥 따라가고?"
"허어. 살다 보니 별 희한한 꼴을 다 보는구만."
"사천에서 온 상행 같은데?"
방요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접경지대를 넘어 운남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사람들을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마주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호기심을 내비치며 상행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
방요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라렸다.
예전이었다면 그를 보는 즉시 벌벌 떨면서 달아났을 것들이 다들 신기한 구경이라도 하는 듯이 슬금슬금 모여드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물론.
따아아아아악!
청명은 그런 놈을 응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끄륵!"
자신의 머리로 날아든 회초리에 방요의 눈이 툭 튀어나온다.
"어디 소 새끼가 사람한테 눈을 부라려?"
"……끄으으응."
"쯧쯧. 나도 참 착해졌다. 옛날이었으면 너 같은 놈들은 보이는 즉시 쓱싹쓱싹 썰어 버렸을 텐데."
저게 농담으로 안 들리는 게 문제다.
청명이 혀를 차고는 슬쩍 주변을 돌아본다. 그런 그의 뒤에서 짐마차에 몸을 싣고 있던 백천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이제는 완전히 운남에 들어왔구나."
"음."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원래 이렇게 산이 많나?"
운남으로 들어온 이들이 처음 느낀 것은 이곳이 생각 이상으로 척박하다는 것이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솟아 있는 산과 들밖에 없군. 왜 관이 운남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지 알 것 같다."
백천이 눈을 찌푸렸다.
"게다가 아직은 야수궁의 궁도도 보이지 않는군."
"저들이 소림쯤 된다고 해도 이 넓은 운남을 모두 지킬 수는 없겠지."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남은 야수궁이 지배한다는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인지, 운남에 들어서면 바로 야수궁의 검문을 받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운남 깊은 곳에 있는 야수궁이 이런 곳까지 나와서 주변을 지킬 것 같지는 않았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곽경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들이 직접 관리를 하는 곳은 차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곤명(昆明) 쪽부터입니다. 그 외에는 간간이 순찰을 돌기는 합니다만, 자주 보이지는 않지요."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경계하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경계해야 합니다."
곽경이 살짝 목소리를 죽였다.
"운남에서 야수궁의 영향력은 사천에서 당가의 영향력을 뛰어넘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만나는 모든 사람이 야수궁의 정보원이 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운남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은 이미 야수궁에 전해졌을 겁니다."
백천이 미간을 좁히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여드는 이들이 모두 야수궁의 눈과 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경계심이 자라났다.
"사람들의 행색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청명이 백천의 말을 거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마주치는 이들마다 다들 굶주려 있다는 느낌이 확연하다.
복색은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옷 사이로 드러난 몸은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본디 운남은 식량 산출량이 그리 좋지 않은 곳입니다. 기본적으로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많지 않습니다. 오시면서 산을 깎아 만든 논을 보셨지요?"
"예."
"본래 농지가 많지 않아 그런 식으로 농사를 짓는 곳이 많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가뭄이 들면서 상황이 더 좋지 않다 하더군요."
곽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그나마 예전에는 차 무역으로 번 돈이 운남에 풀리면서 나름 먹고살 만했었는데, 이제는 차 무역까지 금하고 있으니……. 농사가 잘되지 않으면 다 굶어 죽는 거지요."
그 말을 듣던 백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서역과는 거래를 하고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서역인들은 차를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중원만큼 차를 좋아하는 곳은 없지요. 게다가 서역인들이 즐겨 먹는 차는 운남의 것과 종류가 다릅니다."
그제야 이해가 됐다는 듯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은 중원과 거래를 끊은 것이 운남에게 좋지 않게 작용했다는 뜻이군요."
"운남만 그렇겠습니까? 사천도 지금 곡소리가 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중원 중심부의 상단들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사천의 상단들이 지금은 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지요. 그나마 차는 먹고사는 것과는 크게 관련이 없어서 배는 곯지 않는 것뿐입니다."
"음."
백천이 복잡한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얼마 가지 않아 곤명에 도착할 겁니다. 거기까지만 별일 없이 도착할 수 있다면 저희의 임무는 다한 셈이지요."
백천이 곽경을 향해 포권을 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사히 도착한 뒤에 받겠습니다."
곽경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도 여정은 계속되었고, 화산의 제자들은 곽경의 말대로 긴장을 유지하며 주변을 살폈다.
눈앞에 보이는 건 험한 길과 척박한 대지뿐, 크게 문제 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으라라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마차를 끄는 인간 우마 덕에 일행은 예정보다 세 배는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저기가 곤명입니다."
청명이 낡은 성벽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성도라기보다는 마을 같은 느낌인데."
"운남에는 중원과 같은 높은 성벽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은 땅에 모여 살 수 있을 만큼 식량이 나질 않기 때문이지요."
"아하."
청명이 고개를 끄덕인다.
"여하튼 감사해요. 덕분에 잘 왔어요."
"별말씀을."
화산의 제자들은 찻잎을 사기 위해 움직일 화평상단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곽경은 몇 가지 당부를 하고 바삐 길을 떠났다.
청명이 뒤로 빙글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이제 문제는 이것들인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마적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숙인다.
'착한 얼굴. 착한 얼굴!'
'최대한 불쌍한 얼굴.'
청명이 슬쩍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백천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풀어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응? 풀어 줘?"
"그래. 이들이 죄를 지은 건 사실이지만, 이곳까지 오면서 고생도 했고…… 또 나름 반성하고 있는 것 같으니 풀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구나."
청명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크으. 자비를 베풀라는 말이네. 내가 이래서 사숙을 좋아한다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청명이 빙그레 웃으면서 마적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풀어 주라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는 착하게 살겠습니다! 크흐흐흑!"
"다시는 마적질을 하지 않겠습니다."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너희 그거 알아?"
"……예?"
"사람은 시키면 반대로 하고 싶어지지."
"……."
순간 청명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타타타탓!
그의 손이 정확하게 마적들의 단전을 후려쳤다.
"커억!"
"아아아악!"
아랫배를 얻어맞은 마적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청명이 그들을 보며 씨익 웃는다.
"풀어 줄게. 여기서 잘 놀고 있어. 단전에 금제를 가해 뒀으니 내가 돌아오지 않는 이상은 무공을 되찾을 방법이 없을 거야."
"……."
"아니면 뭐 달아나서 양민으로 살든지. 편한 대로 해."
청명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미련 없이 곤명을 향해 걸었다.
윤종이 그의 옆으로 따라붙는다.
"왜 잡아 둔거냐?"
"돌아갈 때 마차는 누가 끌어?"
"……."
"쟤들이 말보다 낫지."
"……."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리고 겸사겸사 돌아가는 길에 저놈들 있던 산채도 좀 털고. 많이 모아 뒀을 것 같은데."
사는 동안 절대로 청명과는 척을 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윤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