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215화 (215/1,567)

215화. 잘 가게나, 친구들. (5)

"사, 사여 주입이오!"

"자모해쓰빈다!"

"사여만 주이면 뭐은 다 하게으미다!"

백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는 거지?"

"살려만 주면 뭐든 다 하겠다는 것 같습니다."

조걸의 대답에 백천이 눈을 찌푸렸다.

"입은 때리지 말라고 했잖느냐?"

"아니, 저놈들이 반항을 해서."

"……."

보통은 반항을 한다고 턱주가리를 돌려 버리지는 않는단다. 사랑하는 사질아.

백천이 결국 고개를 휘휘 젓고 말았다.

'조걸 이놈도 못 써먹겠어.'

어떻게 된 놈들이 하나같이 청명을 닮아 간다. 그럴 거면 평소에 그렇게 청명이 욕이나 하지 말든가!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줄줄이 무릎을 꿇은 마적들을 바라보았다.

'가엽게도.'

생각해 보면 이놈들에게 동정의 여지는 없다.

이놈들은 선량한 양민들과 상인들을 등쳐 먹는 놈들이니까.

곽 행수의 말에 따르면 이 길에서 마적들에게 죽는 이들도 빈번하다 하니, 이것들 역시 선량한 이들을 죽여 제 잇속을 탐하는 쓰레기들일 확률이 높았다.

그걸 모두 알고 있음에도.

"흐흐흐흐."

"……."

등 뒤에서 자꾸 침을 질질 흘려 대는 청명이 존재한단 사실만으로도, 자꾸 솟아나는 동정심을 금할 길이 없다.

마침, 내내 음흉하게 웃던 청명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제 어쩔 셈이냐?"

"어쩌긴?"

청명이 흐뭇하게 웃으며 마적들을 바라보았다.

"얘들 여물은 좀 먹을 줄 아나 몰라. 잘 먹어야 힘내서 잘 끌 텐데."

"……."

차라리 죽여라, 이놈아.

* * *

곽경이 눈을 비볐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벼도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힘겹게 마차를 끌고 있어야 할 말들은 지금 가벼운 몸으로 또각또각 마차 옆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상단의 말 대신에 짐마차를 끌고 있는 건, 놀랍게도 사람이었다.

"끄으으으으으."

"끄으으으으으응!"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마적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짐마차를 끌었다.

"……."

'대체 평소에 뭘 처먹고 살면 사람한테 짐마차를 끌게 할 생각을 하지?'

이게 제정신 박힌 인간이 할 생각인가?

더 놀라운 건, 사람이 끄는 마차가 말들이 끌 때보다 최소 세 배는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이 저리 훌륭한 짐말이 될 수 있는데, 지금껏 굳이 말을 인간 대신 사용한 이유가 대체 뭐란 말……. 아니. 이게 아니라!

마차 마부석에 앉은 청명이라는 도사가, 들고 있던 검집으로 마적들의 머리를 콕콕 쥐어박았다.

"농땡이 치지? 다리에 힘 빠지는 것 같은데?"

"아, 아입니다!"

"니들은 운 좋은 줄 알아라. 내가 원래 마적이니 산적이니 이런 애들을 살려 두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도 쓸모가 있어서 살려 줬더니 얘들이 자꾸 쓸모가 없어지려고 하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짐마차들이 더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마차 주변에서 걷던 이들이 숫제 달려야 할 속도다.

불쌍한(?) 마적들은 차마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줄줄 흘리며 혼신의 힘으로 마차를 끌었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황당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곽경이 입을 헤 벌렸다. 그때 호위대장이 슬그머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행수님."

"예, 호위대장님."

"지금 저 마차를 끄는 이들 말입니다."

"예. 허허. 황당하기 그지없지요. 죄송합니다. 호위대장님께서는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저기 저분들이……."

"아니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예?"

호위대장이 살짝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저놈들 저보다 강합니다."

"예?"

"저보다 강하다고요."

"……예?"

곽경이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호위대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행의 호위대장을 맡고 있는 이 사람의 이름은 사마회(司馬懷). 별호는 섬전쾌수(閃電快手).

사천 일대에서는 나름 명성이 높은 이였다. 워낙 운남으로 향하는 길이 험하고 위험하다 보니 화평상단에서 거금을 주고 호위대장으로 영입한 사람이다.

사천에서 웬만큼 굴러먹은 사람이라면 섬전쾌수라는 별호를 들어 보지 못하기가 더 어려울 정도이다.

그런데 그런 이가 한낱 마적 떼보다 약하다고?

"그러니까……. 저놈들이라는 게?"

"지금 마차를 끌고 있는 마적들 말입니다. 저놈들이 저보다 강하단 말입니다."

"……."

마적을 제압한 화산의 제자들도 아니고, 저 마적들이 섬전쾌수보다 강하다고?

"이 새끼들이! 지금 발이 보이지?"

지금 저 젊은 놈한테 걷어차이고 있는 마적이?

"그것도 한 놈이 아니라 모두 저보다 강합니다."

"……열 놈 전부요?"

"네. 하나도 빠짐없이."

"……."

호위대장이 질린 얼굴로 마적들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저놈들이 장호채란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고."

"제가 아는 장호채가 맞다면 이 부근에서는 사신과도 같은 악명을 떨치는 놈들입니다. 주변에 횡행하던 마적들을 단숨에 규합한 신흥 세력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말 역시 들어 본 것 같고……."

이쯤 되자 한 가지 의문만이 남는다.

"대체 저분들은 뭐 하는 분들입니까?"

"그, 글쎄. 그게 저도 잘……."

곽경은 당군악에게 딱히 화산 문하들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손님들이니 잘 부탁한다는 말만 들었다.

그가 주워들은 것은 단 하나뿐.

"화산의 제자들이라고는 들었습니다만."

"화산? 화산이라고 하셨습니까? 혹시 그 섬서의 화산 말씀이십니까?"

"예. 제가 알기로는……."

"화산이 최근 옛 명성을 되찾고 있단 말이 있더니 과연……."

호위대장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강하기 그지없는 장호채의 마적들을, 저토록 어린 이들이 단숨에 때려잡았다.

심지어 저들 모두가 몰려가 몰매를 놓은 것도 아니다.

개중 어려 보이는 이 하나가 터덜터덜 나서더니 순식간에 저 무서운 마적들을 개 잡듯이 두들겨 잡아 버린 것이다.

'당가주께서 잘 모시라고 하더니.'

그게 내 손님이니 내 체면을 봐서 잘 돌봐 주라는 말이 아니라…… 잘 모시지 못하면 모가지가 날아갈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었나?

곽 행수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워낙 황당한 일이고 워낙 폭풍같이 벌어진 일이라 지금까지는 손을 놓고 있었지만, 이제는 정리를 해야 한다.

"저……."

"네?"

이제까지는 백천을 통해서만 대화를 했던 곽 행수지만, 지금 그의 시선은 청명에게로 향해 있었다. 마적들을 말처럼 다루는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지금은 이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한다 싶었던 것이다.

"괘, 괜찮겠습니까?"

"뭐가요?"

청명이 밝은 얼굴로 곽 행수를 돌아본다.

상행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분이 좋아진 모습이다.

"이, 이렇게 운남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안 될 이유라도?"

아니, 인마!

아무리 봐도 이상하잖아! 사람이 짐마차를 끄는데!

"아, 얘들요?"

"예. 아무래도 시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인원 문제도 있습니다. 이자들이 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합니까?"

"마적이라고 하면 되죠."

"예?"

"습격했던 마적들을 잡아서 부린다고 하면 설마 뭐라고 하겠어요? 굳이 거짓말할 필요도 없지 않나요?"

"……."

아, 아니, 그렇긴 한데…….

청명이 배시시 웃었다.

"중간에 잡은 마적들까지 인원으로 치지는 않겠죠. 그 정도도 생각 못 할까 봐요. 야수궁 애들도 사람인데."

"마적을 어찌 제압했냐 물으면……."

"저기 호위 하시는 분이 다 때려잡아서 벌을 준답시고 말 대신 짐마차를 끌게 했다고 하죠. 그럼 다들 좋아할 거예요. 여하튼 좋은 일을 한 거니까요."

"……."

정말 좋아할까?

새, 생각해 보면 싫어할 이유는 딱히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얼마나 좋아요? 말 대신 마차도 끌어 주지, 밤 되면 숙영 준비도 해 줄 거지. 그 외에도 부려 먹을 일 있으면 다용도로 알차게 부려 먹으세요."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지들도 뒈지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을까요?"

"……예?"

"행수님이 정 안 된다고 하시면 적당한 데다 묻어 놓고 가야죠. 풀어 주면 또 강도짓 할 텐데 그럴 순 없잖아요."

청명의 말에, 말처럼 마차에 매여 있던 마적들이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소리쳤다.

"개처럼! 아니! 소처럼 부지런히 끌겠습니다!"

"일하게 해 주십시오! 시키는 건 뭐든 다 하겠습니다!"

"제발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저 비실비실한 말들보다 저희가 훨씬 잘 끌 수 있습니다! 제발!"

"……."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광경……은 얼어 죽을.

생과 사과 오가는 처절한 현장이었다. 곽 행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절절한 외침이 이어졌다.

"행수님!"

"형님!"

"부처님!"

어디까지 가냐, 너희들?

곽 행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괘, 괜찮겠습니까? 아무래도 마적들을 데리고 간다는 게……. 좀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위험이요?"

청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매여 있는 마적의 엉덩이를 툭툭 걷어찬 청명이 피식 웃었다.

"얘들이요?"

"……."

"아. 행수님 입장에서는 걱정이 될 수도 있겠네요. 그럼 음……."

청명이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다.

"어. 그럼……. 다리는 짐마차 끌어야 하니까 안 되겠고. 팔 두 짝은 그냥 부러뜨려 놓을까요?"

마적들이 세상 다시없을 간절함을 담아 곽 행수를 바라보았다.

격하게 고개를 젓는 그 모습을 보니 없던 동정심마저 살아나는 곽 행수였다.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고, 걱정 안 하시게 팔은 부러뜨려 놓을게요!"

"아, 아니! 소협! 잠시! 잠시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 팔을 그렇게……!"

"에이. 저것들이 무슨 사람이에요. 돈 벌자고 사람 죽이는 놈들인데, 저희가 없었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었을 텐데요."

"그, 그렇긴 하지만……."

"원래는 죽어야 하는 놈들 살려서 부리는 건데, 팔 부러지는 정도는 감수해야죠. 생각 같아서는 다리도 한 짝만 남겨 두고 싶은데, 갈 길이 구만리라. 끄응."

청명이 검집을 들고 마부석에서 일어나자 곽경의 목소리가 더욱 다급해졌다.

"지, 진정하시오! 진정하십시오, 소협! 저는 괜찮습니다! 하나도 불안하지 않을 겁니다! 말로 하면 알아먹을 겁니다!"

"네?"

그러자 마적들이 재빨리 소리쳤다.

"다 알아먹었습니다! 정말 이해했습니다, 소협!"

"팔이 있어야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저는 땅도 잘 파고 밥도 잘 짓습니다! 제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상단 분들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제가 갭니다! 개!"

"살려 주십쇼!"

청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진짜 말로 해서 알아들었다고?"

"그렇습니다!"

"정말입니다."

청명의 눈이 희번덕댄다.

"말로 알아먹을 놈들이 애초에 왜 마적질을 해, 이 새끼들아!"

따아아아아아아악!

부러진 매화검 대신 당군악에게 강탈해 온 한철검이 검집째로 마적의 머리에 세게 내려앉았다!

"이 새끼들이, 팔다리 멀쩡하고 무공까지 익힌 놈들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마적질을 해! 내가 녹림왕도 후려 깐 사람이야! 어디 싸가지 없이 내 앞에서 마적질이야! 콱 뒈질려고!"

따아아아아악! 따아아아아아아악!

짐마차를 끌고 있는 모든 마적들이 가여웠다.

하지만 가장 불쌍한 마적은, 하필이면 청명이 탄 짐마차에 묶인 놈이었다.

"니들은 운남 도착할 때까지 사람대접 받을 생각 하지 마라! 내가 말이고, 내가 소다! 마아일체(馬我一體)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끌고 또 끈다! 내가 너희한테 도(道)가 무엇인지 알려 주마!"

청명이 눈을 부라리기 시작하자 곽 행수가 슬그머니 백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백천은 그 산뜻한 외모로 빙그레 웃었다.

"포기하십쇼. 쟤는 못 말립니다."

"……."

그리고 사형제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와, 사숙. 그래도 청명이가 정말 많이 착해졌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일단 팔다리 부러뜨려 놓고, 짐마차 끌어야 하는데 실수했다고 아쉬워했을 텐데."

"아니지. 팔다리 부러뜨리고 짐마차를 끌라고 했겠지."

"아, 그게 맞네요."

그때 유이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가리."

"예?"

"대가리는 안 깼어. 착해."

"……."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쨌든 덕분에 가는 길이 훨씬 편해질 거고, 겸사겸사 저 마적들도 개과천선할 테니까요."

"개과천선이요?"

'개과천선 안 하면 뒈질 텐데, 안 하고 배겨?'

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백천을 보며, 곽 행수는 자신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나도 이제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그렇게 운남으로 가는 상행은 예상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문제없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문제없이……. 문제…….

"어디 말 새끼들이 사람 먹는 밥을 먹어! 여물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

문제가 조금 있긴 했다.

사소한. 아주 사소한 문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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