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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14화 (214/1,567)

214화. 잘 가게나, 친구들. (4)

"네? 이걸 입으라고요?"

"그렇습니다."

백천은 눈앞의 옷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어……. 그쪽 상단의?"

"예. 상단원들이 입는 옷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굳이 이걸?"

"아이고, 무사님. 지금 가는 곳은 운남입니다. 운남에 그런 옷을 입고 들어가면 난리가 납니다. 저희 일행으로 보여야 별문제 없이 조용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백천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일단 그럼 청명이 놈을 설득해…….

"왜?"

"……."

이미 옷을 거의 다 갈아입은 청명을 보며 백천이 움찔했다.

"입었냐?"

"응. 왜?"

"아니……. 너는 안 갈아입겠다고 할 줄 알았지."

그들이 입고 있던 무복에는 화산을 상징하는 매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인간에 대한 존중 같은 건 존재하지 않지만, 화산에 대한 존중만은 차고 넘치는 청명이다 보니 혹여 억지를 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

"아니, 그 옷이……."

"이거?"

청명이 손에 든 화산의 무복을 봇짐에 대충 쑤셔 넣었다.

"옷이 옷이지, 뭔."

"……."

"사숙도 얼른 갈아입어. 빨리 운남으로 가야지."

"……끄응."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백천이 옷을 받아 들었다.

그렇게 다들 환복을 마친 화산의 제자들은 한곳에 모여 서로를 보고는 피식피식 웃었다.

매일 무복 입은 모습만 보다가 짐꾼 옷을 입은 걸 보니 서로 어색하기가 짝이 없었다.

"조걸은 거의 맞춤옷인데?"

"크으, 역시 출신이 출신이라 완벽하네."

"노, 놀리지 마십시오, 사숙!"

조걸이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때 화평상단의 곽경이 그들에게 다가와 신신당부를 했다.

"아시다시피 운남은 위험한 곳입니다. 원래는 허가된 인원 외에 다른 이들을 상행에 동행시켜서는 안 됩니다."

"예, 행수님."

"그러니 부디 정체가 드러날 만한 행동은 하지 말아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 다시 한번 꼭! 부탁드립니다."

광경 행수가 몇 번이고 거듭 당부하자, 호기심이 생긴 백천이 넌지시 물었다.

"운남의 통제가 철저한 모양이군요."

"운남을 다스리는 이들이 분명 존재하긴 하나, 그건 명목상일 뿐입니다. 운남은 야수궁의 영향력을 피할 수 없지요. 운남에 중원인이 들어오는 것을 통제하는 이들도 바로 그 야수궁입니다. 아무래도 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다 보니 더욱 그 횡포가 심하지요."

"관이 그런 것을 내버려 두는 이유가 뭡니까?"

"운남은 척박한 땅입니다. 그들과 대립하여 정복한다고 해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관은 그곳을 수복하는 데 딱히 미련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운남의 차를 무역하는 상인들만 피해를 보고 있는 실정이죠."

"음."

하기야 백천만 해도 자목초를 구할 일이 없었다면 평생 운남에 올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저희 상단은 다시는 운남에 발을 들이지 못합니다. 그럼 망하는 길밖엔 남지 않습니다."

"걱정하시 마십시오. 저희도 사고를……."

백천이 자신도 모르게 청명을 돌아보았다.

"……안 치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노력은 합니다. 노력은.

그런데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곽경이 신신당부를 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곽 행수의 말을 들으며 야수궁이 운남에서 얼마나 절대적인 존재인지 다시금 확인한 백천이었다.

"사천에서 당가가 가지는 영향력보다 더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천에는 당가를 견제할 만한 문파들이 있지만, 운남에는 딱히 이름 있는 문파가 없으니까요."

윤종의 말에 백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음? 하지만 운남에도 점창파가 있지 않느냐?"

"……어. 그렇긴 한데……."

윤종이 머뭇거리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청명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신 대답을 해 주었다.

"점창은 그런 일에 일절 관심이 없는 문파거든."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야. 점창은 세력을 키운다든가, 영향력을 끼친다든가 하는 등의 문제엔 전혀 관심이 없는 곳이야. 그냥 자기들끼리 깊숙한 산에 모여서 도를 닦고 무공을 익히는 곳이지."

"우리도 그렇지 않느냐?"

"에이. 점창이나 곤륜에 비하면 화산이나 무당은 도인도 아니야. 무늬만 도인이지."

"……."

아니, 저 미친놈이 이제는 하다 하다 자기 문파를 까네.

"도인이 다 같은 도인이지."

"아니, 정말이라니까. 점창이나 곤륜은 자기들이 세간에서 어떤 평을 받는지도 별 관심이 없어."

"……."

"구파에서 쫓겨난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고 말걸?"

"그게 말이나 되냐?"

"생각해 봐. 조금이라도 그런 쪽에 관심이 있었으면 그 먼 청해나 운남에 문파를 세우겠냐고. 사천만 해도 시골 취급받는데 운남이야 말해 뭐 하겠어?"

"으음. 그도 그러네."

백천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같은 도인 입장에서는 존경할 만한 문파지. 정말 속세의 명리에 일절 관여하지 않으니까. 점창 입장에서는 바깥에서 야수궁이 뭘 하든 말든 관심도 없을걸?"

"대단하다면 대단하다."

백천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대단하긴 하지만 그더러 그렇게 살아 보라고 한다면 영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까 점창은 신경 쓰지 마. 중요한 건 야수궁이니까."

"……너는 그런 걸 어떻게 그리 잘 아는 거냐?"

"내가 거지 출신이잖아. 온갖 소문은 다 듣고 자랐지."

천연덕스럽게 대꾸한 청명은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말을 돌렸다.

"사천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했으니까 쓸데없이 사고 치지 말자고. 일단은 빨리 운남으로 가는 게 중요하니까 최대한 상단에 협조하고."

백천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지금 누가 누구에게 훈계를 하는 것인가?

"시간은 네가 다 끌었잖아! 너만 좀 빨리빨리 움직였어도 며칠 전에 출발했다!"

"거 사람이 쪼잔하게! 지난 일 가지고!"

"어휴!"

뒷목에 혈압이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억누른 백천이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하튼 알았다. 우선은 최대한 협조해서 조용히 운남으로 가자."

과연 그 말이 지켜질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짐을 실은 짐마차들의 주변을 걸으며 상행을 따라갔다.

사천으로 올 때 사두마차의 말을 쉴 새 없이 갈아 가며 달렸던 것을 생각하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느린 속도였다. 때문에 답답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

상행을 떠나는 이들이 말을 여러 필 여분으로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의 체력을 감안하며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끄으응. 이래서 어느 세월에 운남에 도착하나?"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운남에 직접 가는 것은 그도 이번이 처음이다. 갑갑함에 온몸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길이라도 좀 잘 닦여 있으면 더 빨리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백천이 엉망으로 펼쳐진 길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심지어 성도에서 멀어져 운남으로 가까워질수록 길이 험해졌다.

길이란 것은 꾸준히 관리를 해 주어야 유지가 된다. 관리를 해 주지 않으면 짐마차가 오고 갈 때마다 바닥이 패이고 돌이 드러나 엉망이 되기 마련이다.

평소 이런 길의 관리는 관에서 하기 마련인데, 운남은 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보니 그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곽경이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고소를 머금었다.

"아직은 사천 땅입니다."

"아, 그래요?"

"예. 다만 이곳이 운남으로 가는 길이다보니 관에서도 굳이 정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거지요."

"그럼 갈수록 길이 더 나빠진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사천과 운남의 경계에 가까워질수록 산적과 야적들이 횡행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행이지요."

곽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중원의 관이나 무파들도 야수궁과의 충돌을 꺼려 해 그쪽으로는 무인들을 파견하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지금 운남과 사천의 접경지는 무법 지대나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아, 그래서……."

백천이 슬쩍 고개를 돌려 상단을 호위하고 있는 호위무사들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인원이 한정되어 있어 사람이 부족할 텐데, 웬 호위무사들을 저리 많이 끌고 왔나 했더니 마적 떼에 대비하는 인원인 모양이었다.

"이미 저희는 접경지에 접어들었으니 다들 조심하셔야 합니다. 혹 수상한 이들을 발견하시면 저희에게 바로 말해 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속도를 내고 있으니 답답하더라도 조금 참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행수님. 폐를 끼쳐 드린 것만으로도 죄송한데, 저희 때문에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백천이 곽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여유로운 모습이 사라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늦어……."

"……."

"늦어. 늦다고! 이건 너무 늦어!"

"……왜 또 심통이 났느냐?"

청명이 볼을 부풀렸다.

"이렇게 가서 언제 운남에 도착해!"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더냐? 말들이 짐마차를 끌고 가니 속도가 늦을 수밖에. 바꿀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끌고 갈 수도 없잖느냐?"

"그래도 너무 느려! 이렇게 해서 운남에 다녀오면 계절이 바뀌는 게 아니라 해가 바뀔 지경이야! 돌아가는 길에 장문인이 살아 계시길 빌어야 할 판이라고!"

"야, 이 빌어 처먹을 놈아! 그게 할 말이냐!"

"답답해서 이러잖아, 답답해서!"

청명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차라리 우리가 끌고 가는 건 어때?"

"……일단 사람이 마차를 끌어서 눈에 띄는 건 둘째 치고. 그럼 우리가 무공을 익힌 이들이란 걸 운남 사람들이 다 알게 될 텐데, 그건 어떻게 감당하려고."

"끄으으응."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느린데.'

상행에 끼어들 때부터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이건 생각하는 것보다 두 배는 더 느렸다. 이래서야 한 달 내로 도착이나 하면 감지덕지일 정도다.

'무슨 수를 내긴 해야 하는데.'

청명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뭔 야영 준비가 이리 오래 걸려?"

가던 길을 멈추고 야영 준비에 들어간 지가 한참인데 아직도 상단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조걸 사형. 원래 이렇게 야영 준비가 오래 걸리나?"

"보통은 이렇게까지 걸리지 않지만……."

조걸이 머리를 긁었다.

"안 그래도 호위무사들을 배치하느라 상단원들이 부족한데, 우리까지 슬그머니 끼어들면서 상단원이 더 줄어 버린 모양이다."

"엥?"

청명이 혀를 찼다.

"그럼 지금 일손이 부족해서 오래 걸리는 거라고?"

"그런가 보네."

"에이! 그럼 진작부터 도와달라고 했으면 빨리 끝냈을 건데! 왜 말을 안 해. 사람 민망하게."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당가주님의 손님이니 부려 먹기 애매했겠지."

"그 시간에 빨리 도와서 빨리 자고 빨리 출발하는 게 낫지!"

"우리 입장은 그렇다만……."

백천이 고소를 머금었다.

'확실히 이놈은 이런 점이 재미있다니까.'

화산에서야 웃고 마는 별호지만, 화산신룡이라는 이름은 지금 중원 전체를 진동시키고 있다. 천하제일 후기지수라는 말이 아무에게나 붙는 게 아니다.

그럼 자연히 콧대가 높아질 만도 한데, 청명은 명성이 없었을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개차반이지.'

아. 이게 좋은 게 아니구나?

"뭐 해. 얼른 도와. 저 아저씨들이 빨리 쉬어야 내일 조금이라도 일찍 출발하지."

"그래. 그러자꾸나."

백천이 나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 순간이었다.

"응?"

"어?"

"뭐지?"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한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수풀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이윽고.

"흐흐흐흐흐."

"흐하하하하하!"

음흉하고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괴한들이 수풀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웬 놈들이냐!"

상단을 호위하던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병기를 뽑아 들고는 괴한들의 앞을 막아섰다.

"흐흐흐흐. 팔자 좋게 이곳에 숙영지를 펴다니. 너희는 여기가 우리 장호채(障虎砦)의 앞마당임을 몰랐단 말이더냐?"

"물건만 놓고 가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그게 아니면 그 목숨까지 내어 놓고 가든지!"

나타난 괴한들을 바라보던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입을 벌렸다.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산적이네?"

"산적이야."

"아니, 여긴 들판이니까 마적(馬賊)이나 야적(野賊)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하튼 강도네."

"네, 그렇죠."

세상에.

강도라니.

백천이 헛웃음을 흘렸다.

"살다 살다 내가 강도를 다 당해 보네."

"처리할까요?"

조걸이 한발 앞으로 나선 그 순간이었다.

"에이, 아니지."

등 뒤에서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좋아서 어찌할 바 모르는 듯한 목소리가.

화산의 제자들이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곳에 부처의 미소를 짓고 있는 청명이 있었다.

"쟤들이 무슨 마적이야. 내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걸?"

"……뭐로 보이는데?"

"마적이 아니라 말이지, 말."

"……말?"

"응."

청명이 한껏 입을 벌려 웃었다.

"우릴 운남까지 데려다줄 힘 좋은 말들이네. 아이고, 우리는 참 운도 좋지."

"……."

"뭐 해? 달아나기 전에 빨리 잡아!"

"……."

하필이면 여길 털러 나타난 마적들이 불쌍해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백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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