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잘 가게나, 친구들. (3)
"당가에서 사람이 왔다. 무너진 전각의 보수 비용을 비롯한 모든 피해액을 당가에서 배상하겠다는구나."
"아……."
조평의 말에 조걸이 살짝 탄성을 흘렸다.
"놀랄 일은 아니다. 의외로 당가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철저하니까."
"예."
"그런데 가주께서 직접 오셨더구나."
"예?"
조평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가는 체면을 모르는 가문은 아니다. 자신들의 실수로 해를 끼친 경우에는 반드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보상한다. 하지만 그리 피해를 입은 문파들이 사천당가 가주의 사과를 받았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조걸의 주먹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금전적인 보상은 별게 아니나, 당가의 가주가 타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인정할 수 없어서였겠지. 그럼에도 이번 일엔 당가주가 직접 와서 사과를 했다. 아무래도……."
조평이 슬쩍 조걸을 돌아보며 말했다.
"화산의 제자인 네가 사해상단의 둘째라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겠지."
"……."
"네가 가문 밖에서 이룬 일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컸던 모양이구나. 천하의 당가주가 네 체면을 보아 주는 걸 보니."
조걸은 아무 말 없이 조평의 말을 들었다.
지금은 그가 입을 열 때가 아니다.
잠시간 침묵하던 조평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가문에 복귀하지 않을 생각인 게냐?"
"아버지……."
조걸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불편하고 껄끄럽다.
하지만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고,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다.
"저는 화산이 좋습니다."
"가족보다 더 말이더냐?"
"물론 가족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조걸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단호한 눈으로 조평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기에 제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흠."
"저는 저희 가문이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와 형님이 하시는 일이 더없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닙니다."
조걸의 눈을 본 조평이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실룩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한 번뿐인 생이라면 저는 화산의 제자로 죽고 싶습니다."
조평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걸아."
"예, 아버지."
"내 꿈이 뭔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조평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내 꿈은 별것 없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이 사해상회를 네 형과 네가 서로 도와 잘 이어 가는 것뿐이다."
"……."
"그게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내가 꿔 온 꿈이었단다."
조금은 쓸쓸한 그 목소리에 조걸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조평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알겠구나. 그건 내 꿈이지, 네 꿈이 아니라는 걸. 내게 꿈이 있다면 당연히 네게도 꿈이 있는 것을. 나의 꿈을 위해서 너의 꿈을 짓밟아서는 안 되겠지."
"아버지……."
"청명도장이 그랬지. 결정하는 건 너라고. 그때는 그 말이 무척이나 건방지게 들렸지만, 이제는 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한다. 아비라고 해서 자식의 삶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지. 너 역시 너의 꿈을 꿀 자격이 있으니까."
조평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조걸의 어깨를 두드렸다.
"힘내거라."
조걸이 떨리는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크흠."
조평이 어색한지 낮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가문은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있고 네 형도 있으니까. 다만…… 네가 화산의 문하로 살아가더라도 우리는 항상 너를 응원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조평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운남은 무서운 곳이다."
"예."
"당가에서 너희가 한 일을 보면, 운남에서도 잘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만…… 부모 마음이라는 게 생각같이 되는 게 아니라 걱정을 아주 놓을 순 없구나. 모쪼록 몸 성히 돌아오거라."
"예, 아버지."
조평이 다시 한번 조걸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깨에서 든든하게 느껴지는 따뜻함에, 조걸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 * *
"이분들입니까?"
화평상단(和平商團)에서 운남으로 출발하는 상행의 책임자인 곽경(郭境)이 묘한 눈으로 화산 제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렇다네."
"가주님께서 친히 부탁하신 일이니 불편함이 없도록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곽경이 슬쩍 당군악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조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다만…… 운남행에 외인을 동행시킨다는 건 저희 상단에게도 큰 부담이 가는 일인지라……."
"내 사례는 심심찮게 하겠네."
"어찌 가주님게 사례를 바라겠습니까? 그저 저희 상단이 당가의 부탁을 들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만 꼭 좀 기억해 주십시오."
"내 당연히 그리하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깊게 고개 숙여 인사한 곽경이 일행의 대표로 보이는 백천을 향해 말했다.
"나눌 말씀이 있으면 마저 나누십시오. 준비가 끝나면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곽경이 자리로 돌아가자, 백천이 상행을 이룬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당군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러모로 사정을 봐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화산이 사천당가에 준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네. 운남은 우리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니 부디 조심하시게."
"명심하겠습니다."
당군악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운남은 남만야수궁이 지배하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네. 당대의 남만야수궁주는 중원인들을 증오하는 데다가 그 성정이 포악하기 짝이 없다고 하니 특히 조심하게나. 운남에서 뭔가를 이루고 싶다면 야수궁과는 최대한 충돌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다시 한번 명심하겠습니다."
백천이 당군악을 향해 깊게 포권을 했다.
"웃는 낯으로 다시 만나기를 바라겠네."
당군악이 말을 끝내자 뒤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당소소가 슬쩍 나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잘 다녀와요! 갔다 오면 자주 보겠네요."
"끄으으응."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쉰다.
저걸 정말 받아야 하나…….
애초에 이건 장문인이 결정할 일이지만.
청명의 표정이 영 곱지 않다는 것을 본 당소소가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지 마세요. 이제 한솥밥을 먹게 될 사인데!"
백천이 가볍게 웃는다.
"그리된다면 좋은 인연이 되겠지요."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리……."
"소소."
당군악이 낮은 목소리로 당소소의 말을 끊었다.
"네, 아버님."
"네가 정말 화산의 제자가 될 생각이라면 네가 당가의 여식이라는 사실은 잊어라."
"네. 그럴 생각이에요."
"그럴 생각? 까마득한 막내가 웃어른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하더냐?"
"……."
"너는 당가의 여식으로 화산에 가는 것이냐? 아니면 화산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화산으로 가는 것이냐?"
당군악의 말을 들은 당소소가 몸을 바로 폈다.
"몸 건강히 다녀오십시오, 사숙님들. 그리고 사형들. 지금 이 순간부터 소매는 당가의 여식이 아닙니다. 먼저 화산으로 가 그곳의 법도와 율법을 배우고 있겠습니다."
백천이 빙그레 웃는다.
살짝 날카로워졌던 유이설의 눈빛도 그제야 느슨하게 풀렸다.
'고단수시네.'
청명이 당군악이 하는 양을 보며 피식 웃는다.
부러 공공연히 당소소를 야단쳐 분란의 싹을 막고, 당소소의 입지가 무너지지 않게 만들었다. 당군악이 얼마나 딸을 아끼는지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소소가 화산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기야 하겠지만…….
'그야 뭐 다들 마찬가지였으니까.'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조걸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당소소의 미래도 빤하다.
그래도 안 고쳐지면 뭐……. 대충 낙안봉 세 번 찍고 오면 현실을 알게 되겠지.
청명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당군악이 백천을 보며 평화로이 말했다.
"나는 자네들이 떠나는 대로 화산으로 가서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고 소소의 입문에 대한 일을 마무리하겠네."
"장문인께서도 환영하실 겁니다."
청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럼 저희가 돌아왔을 때는 당가에 안 계실 수도 있겠네요?"
"흐음. 그리 오래 걸리기야 하겠는가? 게다가 자네들이 운남 깊숙이 들어가는 거라면 여기서 섬서까지 가는 거리보다 더 멀 수도 있지. 그곳까지 가는 길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아서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릴 것이네."
"아, 그래요?"
청명이 슬쩍 그의 사형제들을 바라보았다.
"가는 길이 멀면 그 나름대로 괜찮죠.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청명의 시선을 느낀 화산의 제자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걸 또 할 생각인가?'
'운남으로 가는 내내? 상행에 끼어들어서도?'
'……그냥 가문을 잇는다고 할 걸 그랬나?'
사천으로 오는 동안 당했던 일들을 생각하니 절로 몸이 굳어지는 화산의 문도들이었다.
당군악이 청명에게 다가와 작게 속삭인다.
"내가 준 건 절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네. 알고 있겠지?"
"걱정 마세요. 내가 애도 아니고."
"……."
차라리 애면 걱정을 덜하지.
너니까 내가 걱정을 하는 거지, 이놈아.
당군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이만 출발하겠습니다."
백천이 당군악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했다.
"대접 잘 받고 가요. 돌아와서도 부탁드릴게요."
"……또 들를 셈인가?"
"당연하죠."
당군악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 강녕하십시오, 당가주님."
"살펴 가게나."
백천이 뭔가 미련이 남은 듯한 청명을 질질 잡아끌며 걸음을 옮겼다.
"너는 뭔 놈의 말이 그렇게 많으냐!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이리 오거라!"
"그럼 다음에 봐요."
청명이 질질 끌려가면서 손을 흔든다.
그때,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당소소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무심하게 걸어가는 유이설을 향해 소리쳤다.
"저, 저기……!"
유이설이 슬쩍 뒤를 돌아본다.
뭔가 말을 하러 왔음에도 당소소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유이설을 그저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듯, 유이설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후회는 없어?"
"……네."
유이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에서 봐."
"예!"
그걸로 끝이었다.
유이설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걸어간다.
그 모습을 본 백천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삼대제자 중 여자가 없어서 조금 섭섭해하는 것 같더니, 새로 들어오는 막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큰 관심은 없어요."
"하나 조금 걱정이긴 하구나. 당가의 여식이라 다루기가 쉽지 않을 텐데."
"네?"
유이설이 멍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백천을 바라보았다.
"……어려워요?"
"청명이 놈도 쩔쩔매지 않았느냐?"
"그건 남의 집 자식이라."
"……응?"
"화산의 제자면 모두 평등한 사람. 아마 다시 만나는 날,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게 될 거예요."
"……."
백천의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당가 가주의 딸을 후려 깐다고?
'……하기야 저놈이면 그러고도 남지.'
사숙도 까는 놈이 누굴 못 까겠는가?
"그 전에 시간이 있죠. 화산에 잘 적응한다면 괜찮겠죠. 다만."
유이설의 눈에 한기가 돌았다.
"당가 여식이라고 건방지게 굴면 청명이 전에 제가 머리를 깨 버릴 거예요."
"……."
백천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빌었다.
부디 당소소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를.
"갔구나."
"네, 갔어요."
화평상단의 상행이 마침내 성도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걸 확인한 당군악이 낮게 탄식했다.
"정말 폭풍처럼 당가를 휩쓸고 갔군."
"……중원에는 다 저런 사람들뿐인가요?"
"그럴 리가 없지."
저만한 사람들은 천하를 뒤져도 다시없을 것이다.
고소를 머금은 당군악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우리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들은 중원 전체에 폭풍을 몰고 올 테니까."
청명이 있는 한 화산은 바람 잘 날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커 나갈 게 분명했다.
그 속도에 뒤지지 않으려면 당가 역시 지금부터 쉼 없이 달려야 한다.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그들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
"네 짐이 무겁다."
"걱정하지 마세요.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당군악이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그럼 어디 확인하러 가 보자꾸나."
"네? 뭘요?"
"화산의 다른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말이다."
"네, 바로 출발하죠."
당소소와 당군악이 몸을 돌렸다.
두어 발짝 떼었던 당군악은 문득 다시 청명들이 떠난 곳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웃으며 낮게 읊조렸다.
"잘 가게나, 친구들."
친구.
당군악의 인생 처음으로 해 보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