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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12화 (212/1,567)

212화. 잘 가게나, 친구들. (2)

당가의 상황이 정리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군악은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본격적으로 움직여 당외의 모든 권한을 폐하고 그를 지하뇌옥에 처넣었다.

동시에 당외의 전횡을 견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원로원을 임시 폐쇄하고 그를 구성하던 태상장로들의 권한 역시 제한했다.

태상장로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권한을 지키려 발악했지만, 이미 가문의 주도권은 당군악에게 넘어가 버린 뒤였다.

그들이 아무리 태상장로라는 지고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가솔들의 지지가 없다면 감히 가주의 권한에 대항할 수 없는 법이었다.

결국 그들은 얌전히 권한을 반납하고 뒷방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당외의 수작에 동조한 당학을 비롯한 그의 식솔들은 줄줄이 제압되어 유폐되었고…….

"조사는 아주 천천히 할 생각일세."

"굳이요?"

당군악은 반문하는 청명의 잔에 차를 따라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는 명명백백하지 않나요?"

"그렇지. 마음만 먹는다면 굳이 시간을 끌 것도 없이 그들의 죄를 증명할 수 있다네. 게다가 그들이 저지른 일이 워낙 심각하여 아마 다시는 해를 보지 못할 걸세."

"그런데 왜 시간을 끌어요?"

"그 외에도 정리할 게 많기 때문이지."

"아하."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외가 조사를 받는 동안 당가에는 절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이 조사를 받는 상황이다. 누가 감히 그런 상황에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그 분위기를 이용하여 이 기회에 얻을 수 있는 건 모조리 얻어 내겠다는 뜻이었다.

"가주님 생각보다 무서운 분이시네요."

"자네만 하겠나?"

"제가 뭘 했다고요."

"말을 말아야지."

당군악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간 그가 봐 온 이들 중 청명보다 무서운 자는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무력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도저히 젊은 무인이라 생각할 수 없는 저 심계는 어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어쩌면 화산을 친구로 받아들인 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 될지도 모르겠군.'

하기야.

청명의 말대로라면 당가가 화산을 선택한 게 아니라 화산이 당가를 선택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정말 괜찮겠는가?"

"뭐가요?"

"당패 말일세."

"아. 걔요?"

청명이 피식 웃었다.

"뭐 잘못을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뭐 그런 일로 소가주 자리에서 자를 것까지야 있겠어요?"

"당패는 소심하네. 그런 행동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가주님. 어린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건방질지 모르겠는데……."

"이제 와서?"

"……."

아니, 거참 이 양반.

사람 뻘쭘하게.

"여, 여하튼요."

"크흠. 그래, 말해 보게나."

청명이 답지 않게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사람은 실수로부터 배우는 거예요. 음……. 아니 이건 실수라 하기는 뭐하니 과오 정도로 하죠."

"……."

"당외가 왜 그렇게 속물이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글쎄. 나도 그게 궁금하군. 내가 소가주였을 때 아직 젊었던 그는 그리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네."

"당가 안에서만 살아서 그래요."

"……."

"당가에만 있으니 상처받을 일도 없고, 고생할 일도 없죠.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것이 있는지도 몰라요. 그러니 소가주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그 작은 일을 아직 품고 사는 거죠. 세상을 보며 실패하고 좌절하고 실수해서 곤욕도 치르고, 그러면서 사람은 성장하는 거죠. 거꾸로 말하면……."

청명이 당군악을 빤히 보며 말했다.

"한 번의 잘못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앗아 가 버리는 사람 밑에서는 누구도 성장할 수 없어요."

이건 당군악을 찌르는 말이다.

청명의 말에 느끼는 바가 있었던 당군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다는 거로군."

"누구나 그렇죠."

청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학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신 성격파탄자에 가까웠다.

새로운 삶을 살지 않았다면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인간이었는지, 그 끔찍한 인간을 사람 만들어 보겠답시고 장문사형이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결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격이 개차반이란 이유로 장문사형이 청명을 꺼려했다면 매화검존 청명은 물론이고 지금의 청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실수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실수로부터 무엇을 배우느냐죠."

"그렇지. 기본적인 일이지. 내가 그 기본을 잊었던 모양일세."

당군악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패 역시 그의 자식이다. 그리 칼같이 잘라 내고서 그의 마음이 편했을 리 없다.

게다가 당패는 소싯적의 당군악이었다면 화를 내고 반발했을 만한 처분을 묵묵히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좁아진 입지를 이용해 은밀히 당외의 수하를 잡아들이는 공을 세우지 않았는가?

청명이 이리 말해 주니 뱃속에 들어앉아 있던 돌덩어리 하나가 깨어져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는가? 당패는 자네의 배에 칼을 꽂았네. 앞으로 당패가 가주가 된다면 자주 마주해야 할 텐데, 그 껄끄러움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제가 왜 껄끄러워요?"

"……응?"

"껄끄러우려면 그 양반이 껄끄러워야죠. 저야 당패 소가주가 가주 자리에 오르면 좋죠. 내 배에 칼 박아 놓고 뻔뻔하게 뒤통수치거나 할 수 있겠어요?"

"……."

"후후후후. 이쪽이야 고맙죠."

아무래도 당패를 가주로 만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당군악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하지만 당패가 잘못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니 공정하게 다시 소가주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게 하겠네. 그쪽이 당패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겠지."

"그건 마음대로 하세요."

당군악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다음 문젠데……."

그가 머리를 벅벅 긁어 댄다. 평소에 근엄하던 당군악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소소……. 소소가 화산에 입문한다고 하는구만."

"걔는 대체 왜 그런대요?"

"끄으으응. 난들 알겠는가!"

당군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까딱하다가는 애지중지 키워 온 딸내미를 화산에 날름 뺏기게 생겼다.

"거절이라도 해 드려요?"

"자네에게 그럴 권한이 있는가?"

"저는 없죠. 그런데 백천 사숙……. 하기야 사숙도 이 일은 장문인께 여쭤야 한다고 하겠네요."

"장문인은 어떤 성향이신가?"

"허허허허. 당가의 여식이라. 화산의 품에 안기에는 너무 큰 사람이 왔구나. 그래도 어쨌든 귀한 걸음을 하였으니 자리를 내어 주고 잘 돌봐 주어라."

"……."

"그런 분이시라."

당군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절대 소소를 화산으로 보내고 싶지 않네."

"그럼 그러세요."

"……그러니 잘 부탁하네."

"네?"

뭔 말이 그렇게 흐르나?

당군악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무리 가문의 권력을 틀어쥐었다고는 하나, 수백 년을 내려온 전통을 하루아침에 뜯어고칠 수는 없네. 어마어마한 반발이 생기겠지. 결국 이대로라면 한두 해 내에 권세가에 시집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소리야."

"……흐음."

"나는 그저 그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네. 하지만 당가에서 그 아이가 행복할 방법이 없다면 적어도 행복해질 수 있는 곳에 보내야겠지."

"그게 왜 하필 화산이죠? 무당이나 종남을 추천드리죠. 아. 아미도 괜찮겠네요."

"지금 내 딸을 출가시키라는 말인가?"

당군악이 눈에서 불을 뿜었다.

그 가공할 기세를 보며 청명이 입맛을 다셨다.

'정말 딸 하나는 끔찍하게 생각하는 아저씨라니까.'

"여튼 그러니 그 아이를 잘 부탁하네. 자네가 돌봐 준다면 나도 안심하고 보낼 수 있겠지."

"아니, 누가 받는대요? 저는 필요 없어요. 내가 이 나이에 애나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내 딸이 연상이건만?"

"나이는 중요하지 않죠."

"……."

당군악이 허탈한 얼굴로 빤히 청명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의술을 전수해 달라고 했었지?"

"그거 이미 끝난 이야기잖아요! 여기서 설마 그걸로 협박하려는 거 아니죠?"

"소소가 그쪽으로는 전문가일세."

"……네?"

당군악이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소소가 가문에서 배운 것은 몸의 내부를 깨끗하게 만드는 몇 가지 내공심법과, 비전이 아닌 몇 가지 암기술과 경공."

"어쩐지 우라지게 빠르더라니."

"그리고 의술을 배웠네. 그 외에 배울 것이 마땅히 없으니까. 가문의 의술은 대부분 전수를 받았다네. 의약당주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지. 의약당주가 시집보내지 말고 의약당을 물려주자고 직접 건의할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네."

"헤헤. 제가 막내 사매를 받아 보는 게 소원이었죠!"

"……."

"……."

당군악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정말 이놈을 믿고 보내도 되는 걸까?'

청명이란 인간은 보면 볼수록 이상한 인간이었다.

어떨 때 보면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사람인데, 어떨 때 보면 이 인간만은 죽는 한이 있어도 믿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만으론 안 돼요."

"당연하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화산의 제자들을 당가로 불러들이든, 아니면 당가의 의원들을 화산으로 파견하든 하여 제대로 의술을 전수하겠네. 소소는 거기에 도움이 될 뿐이지."

"네."

청명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이 떠나는 대로 나는 식솔들과 소소를 데리고 화산으로 갈 걸세. 그리고 장문인을 만나 뵙고 저간의 사정을 설명드린 후 직접 소소를 부탁할 셈이네."

"가주님이 직접 가시게요?"

"친구가 되자는 사람이 아랫사람을 보낼 수는 없지."

"흐음."

청명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친구가 될 생각이신가 보네요."

"안 되는가?"

"그럴 리가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오히려 바라 마지않던 일이다. 당가 자체만으로도 동맹으로 삼기에는 손색이 없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화산에는 과분할 정도다.

게다가 청명 개인적으로는 소중했던 옛 인연을 잇는 부분도 있지 않은가?

"상단은 내가 출발을 하루 늦추었네. 내일 합류해서 운남으로 가면 될 걸세."

"아, 길었네요. 원래는 훨씬 빨리 갔어야 하는 건데."

"운남에는 왜 가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이게 대외비라서요."

"친구에게도 숨길 만큼?"

"장문인이 허락하시면 말씀드리죠."

당군악이 피식 웃었다.

섬서에 있는 화산 장문이 무슨 수로 허락을 한다는 말인가?

"결국 내가 직접 화산으로 가서 들어야겠군."

"네. 선택은 장문인께서 하실 거예요."

"음."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청명과 그 사이에 정리해야 할 모든 일이 끝났다.

그러니 이제…….

당군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뭐 하시게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청명에게 그가 깊이 고개 숙였다.

"과분한 은혜를 입었네."

"에이. 왜 이러세요! 저번에 다 이야기했잖아요."

"그건 당가 가주로서의 인사였고, 이건 당가의 무인인 당군악으로서의 인사네."

"……."

"고맙네. 정말 고맙네."

청명은 살짝 감격에 찬 눈으로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그 반응에 당군악이 미소를 지었다.

겉으로는 욕심만 가득한 척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청명은 당가에 많은 것을 베풀었다.

사실 알고 보면 속이 따뜻할…….

"말로만?"

……리가 있나.

당군악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그만큼 뺏어 먹고 또 뭘 뺏어 처먹으려고!"

"계산이 철저해야 친구죠!"

"그런 친구가 어디 있는가!"

"헤헤. 화내지 말고 들어 보세요. 이건 정말 별거 아니니까요."

"……별거 아니면 미리 말하지 그랬나."

"지금만 가능한 일이거든요."

"응?"

당군악이 미간을 좁혔다.

그때는 안 됐지만 지금은 된다?

그럼 원로원의 권한이 없어지고 당가주가 모든 권한을 잡아야 가능한 일이라는 뜻이다.

그럼 작은 것이 아닐 텐데.

"제가 원하는 건요……."

청명이 작게 속삭였다.

당군악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 뭘 달라고?"

"들으신 그대로요."

"……그걸 어디다 쓰려고? 아, 아니 그걸 쓸 데야 뻔하지만."

"별거 아니죠?"

당군악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당문의 독은 외부로 반출할 수 없네."

"알아요. 그러니까 지금만 되는 거라잖아요."

"으으음."

당군악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원로원의 기능이 정지된 지금이라면 어찌어찌 가능할 것도 같다.

"정말 속곳 안에 든 마지막 비상금까지 탈탈 털어 가는군."

"먼 길 가는 친구한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요."

"끄으응."

당군악이 청명을 빤히 바라보다가 웃고 말았다.

"좋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내가 손해를 보게 되니 나도 조건이 하나 있네."

"거, 가주님씩이나 되시는 분이 조건이 많으시네요. 뭔데요?"

당군악이 살짝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보여 주게."

"네?"

"그때 자네가 비무대 위에서 펼쳤던 그 검."

"……."

"그걸 한 번만 더 보여 주게."

청명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이어지는구나.

사람은 사라져도 뜻은 이어진다.

선대가 평생에 걸쳐 이룩한 것은 후대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 뜻이 이어지는 한, 사람의 의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

그게 문파였지.

청명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엄청 힘든데."

"어려운가?"

"사천요리를 잔뜩 먹여 주시면 보여 드리죠!"

당군학이 환히 웃는다.

"얼마든지 먹여 주지. 그 배가 터질 만큼 말이야."

두 사람이 빙그레 웃으며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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