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조상님의 회초리는 좀 아픈 법이거든. (5)
화염에 태워진 독연이 하늘 높이 퍼져 나간다.
당외는 그 광경을 보며 그저 입을 쩌억 벌렸다.
"어…… 어떻게?"
청명이 그런 당외를 보며 피식 웃었다.
황당하긴 할 것이다.
새파란 애송이가 절정고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삼매진화를……. 그것도 이만한 삼매진화를 피워 내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사실 이 삼매진화라는 건 막대한 내력이 필요한 수법은 아니다. 중요한 건 내력이 아니라 경지와 이해도. 수련과 수련을 거듭해 내력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 핵심이다.
내력의 운용이라는 측면에서 청명은 천하에 따라올 자 없는 독보적인 수준을 이룩했다.
'그래도 내가 매화검존 출신인데.'
출신이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청명에게 삼매진화를 피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몸의 기운이 자체적으로 정화하지 못하는 잔독들은 이런 식으로 태워 버리면 그만이다. 일전에 주독을 태워 버렸던 것처럼.
청명이 슬쩍 당외를 바라본다.
경악한 그의 얼굴에 절로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우물 안 개구리들 같으니."
당보는 사천당가의 폐쇄성을 부수려 했다. 사천의 패자라는 이름으로 저들만의 무학을 틀어쥐고 살아서는 영영 천하의 패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나 당외의 반응을 보니 백 년이 지났음에도 당가는 달라진 게 없는 모양이다.
"그럼 달라지게 해 줘야지."
대가리를 깨서라도 말이다.
청명이 검을 들고 천천히 당외를 향해 다가섰다.
당외가 황급히 뒤로 한 발 물러서며 소매에서 뽑아낸 칠보추혼사를 청명에게 마구 뿌려 댔다.
"주, 죽어라! 이 괴물 같은 놈!"
파스스스.
날아온 모래가 청명의 몸에 부딪쳐 휘날린다.
"아, 퉤퉤!"
청명이 입 안으로 들어오는 모래를 뱉어 냈다.
"에이, 진짜 더럽게."
당외가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물소도 일곱 걸음을 채 떼기 전에 절명한다는 칠보추혼독이 듬뿍 밴 모래를 평범한 모래처럼 털어 낸다. 보고 있자니 이제는 허탈하기까지 할 지경이다.
"독……. 당가의 독이……."
당외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이럴 리가 없다! 절대 이럴 리가 없어! 으아아아아아아!"
그의 소매에서 온갖 독이 뿜어져 나온다.
검고 붉은 연기들, 새파란 액체들과 보랏빛을 띠는 독환들이 청명을 향해 마구잡이로 날아들었다. 그 가공할 기세에 비무장을 지켜보던 당가의 식솔들마저 기겁을 하여 더욱더 멀리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하지만 청명은 구름처럼 피어나는 독연을 손으로 헤치고, 비처럼 쏟아지는 독액을 검으로 후려쳤다.
"소용없다니까 그러시네."
담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이, 이노오오오오옴!"
당외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울분을 터뜨렸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이렇게 져서는 안 된다.
지더라도 이렇게는 질 수 없다.
만약 이렇게 패해 버린다면 그는 존재의 모든 이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부정당한다.
그가 쌓아 온 모든 것이.
평생을 수련해 온 독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 되어 준 식견마저 부정당한다면 대체 그가 무인으로서 존재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나는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두 눈에 독기를 가득 머금은 당외가 소매 안에서 암기를 뽑아낸다.
날이 매섭게 벼려진 비도가 청명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든다.
청명이 매화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비도를 쳐 낸다.
'약해.'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날아드는 비도는 그저 빠를 뿐이다. 당군악의 비도처럼 기묘한 무리를 품고 있지도 못했고, 끊임없는 수련으로 쌓아 올린 노련함도 보이지 않았다.
"이노오오오오옴!"
당외의 손끝에서 십여 개의 동전이 발출된다.
당문전(當門錢).
당가에서 암기로 쓰는 동전을 통칭하는 말이다.
과거 당보가 쓰던 당문전은 손때가 묻어 꼬질꼬질하기 짝이 없었다.
관리를 좀 하라고 해도 이게 수련의 증거라며 되레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지금 청명을 향해 날아드는 당문전은 깨끗하기 짝이 없다. 얼마나 사용하지 않았는지 새 동전으로 보일 정도다.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과거의 당보와 지금 당외의 지위는 그리 다르지 않다.
당외는 원로원주라는 지고한 지위로 당가를 뒤흔들고, 당보는 당가를 떠난 외인이나 다름없는 처지이긴 했으나 두 사람은 모두 당문의 태상장로라는 신분을 역임하고 있다.
한데 이 수준의 차이는 뭔가?
"멍청한!"
청명의 검이 날아드는 당문전을 단칼에 쳐 냈다.
이게 천하의 매화검존 청명조차 기겁하게 했던 당가의 암기술이라고?
'지금 건너편에 당보가 있었다면?'
지금의 청명 따위는 채 삼 초도 버티지 못하고 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겨우 이런 실력으로 당가의 장로입네 하고 거들먹거리고 있었다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너는 이 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독이 만능인 줄 알고 독만을 연구하다 보면 결국 당가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당보는 훤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청명의 눈앞에 펼쳐진 이것이 당보가 결코 보고 싶지 않아 했던 당가의 미래다.
"머리로 이해 못 한다면 몸에 때려 박아 주지!"
청명이 날아드는 암기를 쳐 내며 당외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 광경을 본 당외의 얼굴에 당혹이 어린다.
"으아아아아! 나는 지지 않는다아아아아!"
당외의 소매에서 암기와 독이 마구잡이로 뿌려졌다. 독과 암기가 하늘로 솟아올라 마치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 만천화우(滿天花雨)?"
"만천화우다!"
누군가가 내지른 경악성이 청명의 귀를 파고든다.
'아니야, 이 멍청이들!'
만천화우는 무형지독과 함께 당가의 양대 전설로 불리는 비기. 당외 따위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과거 당보가 보여 준 미완성의 만천화우는 보는 이로 하여금 환상에 빠지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래.
세상을 가득 뒤덮는 꽃잎의 비.
그건 마치…….
'잘 봐 둬! 당가!'
비슷하게 흉내 내는 것뿐이지만……. 지금 천하에서 이걸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일 테니까!
이건 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당보가 당가에 전하는 심득이자, 선물이다!
하늘로 솟구쳤던 암기와 독이 비처럼 쏟아진다. 청명은 그 독과 암기의 빗속에서 그저 가만히 검을 들어올렸다.
떨어지는 독도 암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청명의 검을 하늘로 겨눈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흔들린다.
청명의 검 끝이 한없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 검 끝에서 무수히 많은 매화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 송이. 또 한 송이.
이내 수십 송이로 불어난 매화는 다시 수백 송이로 불어나며 비무대를 모조리 매화로 뒤덮어 버렸다.
"아……."
그 광경을 보던 당군악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넋을 놓았다.
'이건…….'
그와의 비무에서 청명이 보여 주었던 검과는 무언가 다르다.
확연하게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당군악의 본능은 이 검을 놓치지 말라 소리치고 있었다.
'이건 환상인가?'
매화가 피어난다.
온 산 가득 피어난 매화들이 어디선가 불어온 훈풍에 일제히 그 꽃잎을 날려 보냈다.
그 무수한 매화 잎이, 아래로 쏟아지는 독과 암기의 비를 맞이한다.
그리고!
쇄애애애애애액! 쇄애애액!
가공할 기세로 쏟아지던 암기의 비는 한없이 연약해 보이는 매화의 꽃잎과 맞부딪힌 순간, 그 기세를 잃고 힘없이 튕겨 나갔다.
독도 암기도.
그 어떤 것도 매화의 춤을 뚫어 내지 못한다.
"아아……."
당외가 양손을 늘어뜨린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가 날린 독과 암기들이 맥없이 튕겨 나간다.
그리고!
피어난다.
피어나고 또 피어난 매화가 무심하게 꽃잎을 하늘로 날려 보낸다.
이윽고 순식간에 당외의 하늘이 모조리 매화의 꽃잎으로 가득 차 버렸다.
온 하늘에 꽃잎의 비가 내린다(滿天花雨).
어떤 꽃잎은 가볍게 솟아올랐다가 부드럽게 유영하고, 어떤 꽃잎은 위태위태하게 잡히지 않는 변화를 그리며 추락한다. 또 어떤 것은 일직선으로 바닥으로 내리꽂히고, 그저 그 자리에 머무르며 단아하게 춤을 추기도 했다.
하늘을 뒤덮은 수백, 수천의 꽃잎이 제각각 다른 변화를 보인다.
꽃잎의 비.
그리고 꽃잎의 춤이었다.
"어, 어떻게?"
당외가 세상 다시없을 처절한 비명을 내지른다.
"어떻게 네놈이이이이이이!"
세상을 뒤덮었던 꽃잎들이 일제히 당외를 향해 날아든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당외가 공력을 불어넣은 양손을 미친 듯이 휘저으며 날아드는 꽃잎을 튕겨 냈다.
그의 소매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엄청난 속도였다.
카카카카카캉!
공력이 잔뜩 주입되어 강철보다 더 단단해진 소매는 여린 꽃잎들을 있는 대로 후려쳐 대었다.
하나 인간의 두 팔로 막아 내기에는 그를 향해 날아드는 꽃잎들이 너무도 많았다.
서걱.
"큭!"
옆구리에 스친 꽃잎이 작은 자상을 만들어 낸다.
푸욱!
"끄으윽!"
등에 내려앉은 꽃잎이 살을 베어 낸다.
"나, 나는!"
당외의 두 눈에 시뻘건 핏발이 섰다.
"나는 당가의 당외다!"
소용돌이치는 꽃잎이 당위의 전신을 뒤덮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제 당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처절한 비명소리만이 당가를 쩌렁쩌렁 울렸을 뿐이다.
스르르륵.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온 세상을 휘돌 것 같았던 꽃잎들이 봄볕을 받은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린다.
스르르릉.
청명이 뽑은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의 앞에 서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당외.
그는 반쯤 풀린 눈으로 멍하니 청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옷은 모두 갈가리 찢겨 나간 지 오래다. 그 틈으로 보이는 몸에는 수없이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다.
당외가 힘겹게 입을 연다.
"……이 검은?"
"매화만천(梅花滿天)."
"……매화만천. 이게…… 이게 화산의 검이로군."
"어……."
청명이 뒷머리를 두어 번 긁었다.
이건 사실 화산의 검 매화만천에 당보가 보여 주었던 만천화우의 심득을 청명의 나름대로 섞어 넣은 검이었다.
즉 화산의 검이지만 당가의 비기기도 하다.
당외는 거기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정말……."
당외의 몸이 천천히 넘어간다.
"꿈…… 같은 검이었……."
털썩.
당외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동시에 청명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이자의 무공을 폐했으니, 이제 당가주가 알아서 하겠지.'
아무리 청명이 내기를 걸어 가며 사람들 앞에서 당외를 쓰러뜨린다고 해도, 어차피 모든 것은 당가의 의지에 달렸다.
청명이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당외를 쓰러뜨리고 그의 무공을 폐하는 것. 그리고 수많은 이들 앞에서 원로원이 얼마나 쓸모없는 곳인지를 증명하는 것뿐이다.
청명이 몸을 빙글 돌려 당가주를 비롯한 당가의 식솔들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그를 바라보는 당군악의 표정이 복잡 미묘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짧게 심호흡을 한 그는 청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비무는 화산신룡 청명 소협의 승리다!"
그리 높지 않은 함성.
맑디맑은 하늘.
당가의 새로운 변화를 암시하는 순간이었고, 조금의 어색함과 다소간의 기대감이 공존했다.
그 기묘한 공존을 느끼며 청명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됐느냐?'
한참 동안이나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렸다.
들릴 리가 없지.
알고 있다.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은 그저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라는 것.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해 홀로 다른 세상에 떨어진 청명만이 미련을 부여잡고 과거를 돌이키고 또 돌이켜 볼 뿐이다.
천천히 고개를 내린 청명이 그의 사형제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읊조렸다.
'걱정 마라, 이놈아.'
당가는 내가 가끔씩 돌봐 줄 테니까.
아, 물론 공짜는 아니지만.
청명이 씁쓸한 얼굴로 비무대를 내려가려는 찰나였다.
- 고맙습니다. 도사 형님.
청명이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당보.
당보가 생전의 모습 그대로 그를 보며 환히 웃고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이내 환상처럼 사라져 버렸다.
꾸우욱.
주먹을 꽉 움켜쥔 청명이 살짝 눈을 감는다.
이어진 인연은 여기에서 끝났다. 이전 생에 미처 지키지 못했던 약속이 지금 이 순간 지켜졌다.
그러니…….
'편히 눈감거라.'
안녕.
내 하나뿐인 친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