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조상님의 회초리는 좀 아픈 법이거든. (4)
"이…… 이 미친 늙은이가 잘도 이런 짓을!"
당군악이 소매 안으로 손을 쑤셔 넣었다. 비도를 꽉 움켜쥔 그의 어깨가 금방이라도 출수할 듯 들썩였다. 당군악이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말해 주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당외는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정당한 비무일 뿐이오."
"정당한 비무에 극독을 사용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해약도 없는 극독을!"
당군악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늦었다.
이제 와서 비무대로 뛰어든다고 한들 이미 청명을 살릴 길은 없다. 괜히 당군악만 함께 중독될 뿐이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 분노에 눈앞이 아찔해진 당군악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일갈했다. 처절하리만치 끓어오르는 목소리였다.
"이런 짓거리를 하고도 그대가 당가의 원로라고 자부할 수 있소이까?! 정파의 아이와 비무를 하면서 해약도 없는 극독을 쓰는데, 당신이 극악무도한 사파의 무리와 뭐가 다르단 말이오!"
이제 당가주는 당외를 원로원주라 부르지 않았다. 당외는 더 이상 원로원주라 불릴 자격이 없다.
정파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마저 저버린 이를 어찌 원로라 부르며 존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당군악의 피 끓는 외침에도 당외는 그저 비웃음만 보일 뿐이었다.
"하하, 사파의 무리라 하셨소?"
"그렇소!"
"가주. 정신 차리시오! 바로 그것 때문에 당가가 천하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이오!"
당외가 양손에 독 기운을 끌어 올렸다.
"당가의 처지가 어떻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천하를 질타할 수 있는 독과 암기를 가지고도 이 사천 구석에 처박혀 지역의 패자나 자처하고 있을 뿐! 이 낡아 빠진 법도에 언제까지 묶여 있어야 한단 말이오!"
당외의 눈이 기이한 빛으로 일렁였다.
"청성? 아미?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들이 정말 우리의 적으로 돌아선다면 청성산과 아미산을 피로 물들이는 데 단 하루도 걸리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우리의 처지가 어떻소? 그 어중이떠중이에게 둘러싸여 아무것도 못 하고 있지 않소! 이게 가주가 원하는 당가의 미래요?"
"그래서? 아무에게나 극독을 뿌려 대시겠다? 그랬다가는 천하의 공적이 될 뿐이외다!"
"혹은 천하를 지배하거나. 그렇지 않소?"
당군악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노기가 끓어올라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뿌드득.
이를 갈아붙인 당군악이 가열한 어조로 소리쳤다.
"뭐 하느냐! 당장 저 죄인을 붙잡아 하옥하라!"
"죄인? 누가 죄인인가!"
당외가 당군악을 가리키며 일갈했다.
"죄인은 당가를 약하게 만든 가주를 말함이겠지! 그대가 얼마나 당가를 무시했으면 화산 따위와 동맹을 맺는다는 말이오?"
"이……."
당외가 끌끌 혀를 차고는 말했다.
"가주. 우리 원로들이 물러난 이유는 약해서가 아니오. 자꾸 이런 식으로 원로원을 핍박하려 든다면 우리도 생각을 달리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시오."
당군악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이 차마 소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아무리 당외가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당외는 가문의 어른. 그를 공격하는 모습을 모두에게 보일 수는 없다.
더구나…….
식솔들을 돌아본 당군악이 아차 하는 이를 악물었다.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지만, 은근히 당외의 말에 동조하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당군악은 속으로 통탄하였다.
'모두 내 잘못이다.'
당외에게 이 많은 이들 앞에서 발언할 기회를 준 것도, 그리고 당외가 저만한 야심을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것도, 무엇보다 당외와 화산신룡이 비무를 벌이게 둔 것도 모두가 당군악의 실수였다.
말렸어야 했다.
어설프게 끼어들 생각을 할 게 아니라 이 비무 자체를 말렸어야 했다. 그리하여 시작조차 못 하게 했어야 했다.
잠깐의 망설임과 대책 없는 믿음이 이토록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
당군악이 막 소매에서 비도를 뽑아 들려는 찰나였다.
"어, 어엇! 저기!"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비무장을 메운 독연을 날려 버린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던 이들이 기겁을 하며 사방으로 달아난다.
"흐음."
당외가 장력을 날려 독연을 하늘 위로 밀어 올렸다. 혹여 식솔 중에 중독되는 이가 나온다면 지금까지 그가 이뤄 놓은 것들이 모두 엉망이 되고 말 테니까.
그리고 독연이 걷힌 곳을 향해, 당외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이제 한 줌의 핏물이 되어 있을 청명을 보며 애도를 보내 주면…….
"뭐, 뭐냐?"
당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에 눈에 들어온 것은 모조리 녹아 버린 시체가 아니었다.
그냥, 청명이었다.
"어떻게……."
입은 의복이 독에 물들긴 했으나, 옷 밖으로 드러난 청명의 몸은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다.
다만 멀쩡한 상태는 아닌지 바닥을 부여잡은 채 경련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우웨에에에에에엑!"
청명이 연신 헛구역질을 해 대었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지만 당외는 결코 그 광경을 보며 웃지 못했다.
"우욱! 우웨에에에엑!"
두어 번 헛구역질을 해 댄 청명이 마른 입가를 쓱 문질러 닦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당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중독이……."
"아오. 너무 먹었나?"
청명이 고개를 휙휙 저었다.
"날 이렇게까지 만들다니 과연 사천요리."
"……."
당외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요리?
독이 아니라?
"……어떻게?"
어떻게 중독이 되지 않을 수 있지?
당외는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분명 이곳에 있던 모두가 보지 않았는가?
귀왕령에 휩싸이고, 칠보추혼사에 뒤덮이고, 마지막으로 환희연까지 얻어맞았다.
그 어느 독도 사람을 한 줌 핏물로 만들기에는 충분한 독이다.
물론 내력이 높은 고수라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거나, 중독 자체를 웬만큼은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놈이 그럴 수준이 될 리가 있는가!
"퉤!"
청명은 입 안이 까끌까끌하다는 듯 몇 번 침을 뱉어 내고는 고개를 들었다.
"일단 몇 가지 정정할 게 있는데요."
"……."
"첫째. 당가가 천하를 질타하지 못하는 이유는 독을 쓰지 않기 때문이 아니에요. 독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지."
"……뭐라 했느냐?"
청명이 피식 웃었다.
당외의 반응을 보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옛 생각이 나게 만드는군.'
- 그런데 너는 당가인이라는 놈이 왜 독을 쓰지 않는 거냐?
- 아이고, 형님. 언제 당가에서 천하제일인이 났다 소리를 들어 보신 적 있습니까?
- 없지.
- 그러니까요. 애초에 당가 하면 남궁세가랑 쌍벽을 이루는 명문가 아닙니까. 남궁가나 팽가는 잘도 배출하는 천하제일인이 유독 당가에서는 안 나온단 말입니다.
- 그게 독 때문이라고?
- 그렇지요. 독 그거 좋은 게 아닙니다. 물론 적당한 수준에서야 만능열쇠나 다름없죠. 대충 침 몇 개 던져서 스치기만 해도 애들이 픽픽 쓰러지는데 세상 겁날 게 뭐가 있습니까?
- 그런데?
- 그렇게 쉽게 이기는데 누가 암기술을 갈고 닦겠습니까? 당가의 독만 쓰면 무적이라고 생각해서 콧대가 높아지고 실력은 늘지 않는 거죠. 그러다가 형님 같은 고수 만나면 모가지 날아가는 겁니다. 그 등신들은 아무리 말해도 이해를 못 해요.
고수에게는 독이 통한다. 하지만 절대고수에게는 독이 통하지 않는다.
독으로 천하를 제패한다?
'그게 가능했으면 당가가 천마를 피해서 도망쳤을 리가 있나!'
단순히 천마만이 아니다. 당가는 결국 마교의 고수들조차 감당해 낼 수 없었기에 달아난 것이다.
당외가 말하는 대로 독을 쓰는 것만으로 고수들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어디 마교 따위가 당가를 쫓아냈겠는가.
해독제가 없는 독?
그건 해독제가 없다는 뜻이지 해독이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독에 대처하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 청명이 아는 것만 해도 두 가지나 되니까.
"주, 중독을 피할 수 없었을 텐데? 귀왕령은 숨을 참는다 해도 피부로 스며든다. 다른 독들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는 지금 당외가 말한 것.
내력을 이용해 몸 주위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면 된다. 독을 들이마시지 않고 피부에도 닿게 하지 않으면 중독당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는 암기에 묻은 독을 피할 방법이 없다. 하나의 암기라도 몸을 파고드는 순간 독이 몸 안으로 스며드니까.
절대고수들이 쓰는 방법은 바로, 몸속에 들어온 독을 내력으로 정화해 버리는 것이다. 기의 운용이 극에 달한 고수들은 내력으로 독을 해소해 버릴 수 있다.
해독제 같은 건 필요 없다.
해독제란 고수가 아닌 이들이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독을 중화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약일 뿐이다.
애초에 중독이 되어도 버틸 수 있는 이들에게는 해독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당가는 독이라는 무기를 들고도 천하제일이 되지 못한 것이다.
'당보는 진작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
당가에서는 거의 내놓은 사람 취급을 받던 당보는 천하를 누비며 수많은 비무와 생사결을 치렀다. 덕분에 독에 기대서는 천하제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로지 암기술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암기술 하나로 천하를 질타했던 암존 당보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뭐 여러모로 설명해 봐야 이해 못 할 테니, 그냥 제가 특이체질이라고 해 두죠."
"마, 만독불침이라고?"
"너무 나가셨네."
청명이 손을 내저었다.
"계속해서 둘째!"
청명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당가가 화산이랑 동맹을 맺어 주는 게 아니라. 화산이 당가랑 동맹을 맺어 주는 거예요. 이건 중요한 문제니까 꼭 기억하세요."
당외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을 열려는 순간, 청명이 단호하게 말을 가로챘다.
"마지막으로 셋째."
"……."
"당가주님은 진작부터 이러한 점을 꿰뚫어 보고 화산과 손을 잡으려고 했는데 그쪽은 마지막까지 영 눈치가 없네요. 당가주님도 참 힘들었겠어요. 그쪽 같은 인간도 식솔이라고 먹여 살려야 하니."
"이, 이놈이!"
청명은 손에 들린 검을 들었다.
"자, 그럼 계속하자고요. 쓰고 싶은 독이 있으면 마음껏 써 보세요."
"자, 잠깐. 내력을 끌어 올릴 수 없었을 텐데? 너는 이미……."
황급히 입을 열었던 당외는 순간 움찔하더니 입을 닫았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꺼내지 말아야 할 말을 꺼낸 것이다.
"아. 그거요?"
청명이 피식 웃었다.
"멍청한 사람의 특징이 뭔지 아세요?"
"……."
"자기만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미 비무가 있기 전부터 이런 수작질이 벌어질 거라 예상했죠. 댁 같은 양반들이 하는 짓들은 대개 빤하니까."
"미리 해약을 먹었단 말이냐?"
"아, 진짜 자꾸 멍청한 소리 하시네. 댁들 독은 나한테 안 통한다니까."
청명이 피식 웃는다.
"못 믿겠으면 다시 해보시든가."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당외의 소매에서 귀왕령이 다시 뿜어져 나왔다.
뭉클뭉클 피어난 연기가 청명의 주위를 희뿌옇게 물들인다. 조금 전보다 좁은 범위를 점하는 대신 독의 농도를 끌어 올린 것이다.
"소용없다니까."
청명이 검을 한번 휘둘러 주위로 날아든 귀왕령을 밀어 내었다.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터덜터덜 당외에게로 걸어간다.
당외가 거의 넋이 빠진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분명 귀왕령이 청명의 코와 입을 타고 들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면 응당 중독이 되어야 하고, 지금쯤은 온몸이 녹아내리고 타들어 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청명은 누가 보아도 중독된 이가 아니다.
"미안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요. 말했잖아요. 나는 특이체질이라고."
황당하게 들리지만 사실이었다.
청명의 몸속에는 천하에서 가장 정순한 기운이 모여 있다. 그것도 도가 계열의 기운이다.
도가의 기운은 본래 파사(破邪)와 정화(淨化)의 특화된 기운이다. 그리고 천하의 어떤 도가 고수도 청명보다 정순한 기운을 지니지는 못했다.
도가 내력의 끝을 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청명이기에 모을 수 있었던 기운이다. 그 기운 앞에 독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차하면 혼원단이라도 한 알 꺼내 먹으려 했는데.'
생각보다 깔끔하게 독을 해독해 버렸다. 배 속 기운의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심정이다.
하기야…… 이걸 모으느라 개고생 했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 효능쯤은 있어야지!
청명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그 순간 당외의 표정이 일변했다.
조금 전까지 당황과 공포로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일순 평온을 되찾은 것이다.
"하하하하. 자신의 상태도 제대로 모르는구나. 네 손이나 제대로 보고 말하거라!"
"응?"
청명이 고개를 내려 두 손을 펼치고 바라본다.
"어? 이거 왜 이래?"
손끝부터 손목까지가 시커멓게 물들어 있다. 이건 당연히 중독의 증상이었다.
"네놈이 대단하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 대단한 네놈도 독 기운을 끝까지 몰아내지는 못한 모양이구나."
"와……. 뭐 이런 독이 다 있지?"
기어코 이걸 뚫고 들어오네. 얼마나 지독한 독이면.
당외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지옥에 가 염왕을 만나거든 사천당가의 독을 얕본 대가로 지옥으로 왔노라 말하거라."
"거참 성격까지 급하시네."
"……뭐라?"
청명이 피식 웃는다.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모양이네요.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요?"
"그 독은 해독할 수……."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아악!
뭔가 뿜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청명의 양손에서 커다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매캐한 연기가 화염을 타고 허공으로 솟아오른다.
"……."
청명이 배를 쭉 내밀었다.
"해독 못하면 태워 버리면 그만이지!"
청명이 피워 낸 불꽃을 보며, 당외는 저도 모르게 두어 발 뒤로 물러났다.
"사, 삼매……. 삼매진화(三昧瞋火)?"
어떻게?
초절정의 고수들만이 피워 낼 수 있다는 삼매진화를 저 어린놈이 쓸 수 있다는 말인가?
당외가 경악으로 말을 잇지 못하던 순간.
비무대 아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천이 돌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놈은 술독도 불로 태우더니 진짜 독도 불로 태우네."
화산은 태우지 말아야 할 텐데…….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