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조상님의 회초리는 좀 아픈 법이거든. (3)
"아무리 봐도 미친 것 같은데."
백천의 평가는 정당했다.
"확실히 평소의 청명인 것을 보면 미친 게 확실합니다."
물론 윤종의 평가도 일리가 있었다.
"……매운 사천 음식을 너무 먹어서 돌아 버린 것 아닐까요?"
조걸의 평가는 살짝 의아했지만 듣는 이들을 고민하게 하기엔 충분했다.
"또라이."
유이설의 평가는 단호했다.
백천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청명을 바라본다.
당가의 장로와 비무를 한다고?
'생각해 보면……. 그래, 생각을 잘 해 보면 그렇게까지 미친 짓은 아니지.'
이미 저놈은 검총에서 무당의 장로에게 검을 들고 달려든 적이 있었으니까. 천하의 무당 장로에게…….
'생각해 보면 저건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하는 짓만 보면 골백번은 더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생각이 있겠지?"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백천이 곁에 서 있는 당군악을 슬쩍 곁눈질했다.
"당가주님."
"말하게나."
"이 일이 청명과 미리 이야기가 된 겁니까?"
당군악이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에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알고……."
"생전 처음 듣는다."
"……."
"……."
한 대 맞은 듯 멍해진 백천을 보며 당군악이 부연해 주었다.
"내가 화산신룡과 미리 이야기한 것은 다른 부분일세. 직접 나서서 원로원주와 비무를 할 거라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네."
백천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그렇지.
이래야 우리 청명이지.
빌어먹을!
"청명과 직접 비무를 해 보셨으니 대충 무위는 파악이 되셨을 텐데. 청명과 저 원로원주가 붙으면 누가 이길 것 같으십니까?"
"일방적으로 박살내겠지."
"청명이가요?"
"아니. 원로원주가."
"……."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처, 청명이는 당가주님과도……."
"오해하지 말게. 화산신룡은 정말 강하네. 그 나이 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무위지."
"그렇죠."
"하지만 당외 원주도 강하네."
당군악이 고개를 저었다.
"당가의 진짜 힘은 독과 암기가 조합이 되었을 때 나오는 법이지. 알다시피 나는 화산신룡을 상대하며 독을 쓰지 않았네."
"아……."
"암기술만으로 상대한다면 좋은 승부가 될 수도 있을 걸세. 화산신룡은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는 데 있어서 기이할 정도로 강하니까. 하지만 원로원주는 독공이 특기인 사람이야. 그에 대한 대책이 없다면 십 초가 지나기도 전에 전신이 시커멓게 물든 시체가 되겠지."
아니,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그리 무표정한 얼굴로 하지 말라고요!
지금 쟤가 누구 때문에 저리 싸우고 있는데.
"하지만 청명은 무당의 장로와도……."
"원로원주는 당가의 태상장로네."
"……."
"나도 화산신룡이 무당의 허산자와 싸워 살아남았다는 말은 들었네. 하지만 허산자가 무당의 장로라고는 하나 감히 원로원주와 비견될 만한 이는 아닐세. 장로 중에서도 격이 있는 법이니까. 원로원주를 상대하려면 무당에서도 은퇴한 태상장로들이 나와야 할 걸세."
백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화를 들으며 분위기를 살피던 윤종이 살짝 다급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럼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백천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인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시작한 싸움이다. 우리가 말려 끝난다면 청명이 놈의 명예가 어떻게 되겠느냐?"
"저놈이 명예 같은 걸 신경 씁니까?"
"……."
어?
그러네?
흔들리려는 백천을 조걸이 붙들었다.
"에이. 사형. 저놈이 말린다고 들을 놈입니까?"
"……그건 맞는 말이다."
"망할 놈 같으니."
결국 걱정스런 얼굴로 청명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 화산 제자들을 힐끗 본 당군악이 소매 안에서 주먹을 살짝 쥐었다 풀었다.
'친구라.'
- 그냥 제 변덕이라고 해 두죠.
화산신룡은 그렇게 말했다.
변덕 때문에 당가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나…….
당군악이 피식 웃고 말았다.
'변덕으로 목숨을 걸 수 있나?'
주먹이 더 강하게 쥐어진다.
친구. 친구라…….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이 좀 잘못되었던 모양이다.
'대가 없이 주는 것이 친구겠지.'
당군악의 손이 소매 안에 들어 있던 비도를 틀어쥐었다.
'죽게 내버려 두진 않는다.'
원로원과 전쟁을 벌이는 한이 있어도.
당외의 입술이 실룩였다.
"원로원을 해체하라?"
"네."
"그리고 뒷방으로 사라져라?"
"아주 당가를 떠나는 것도 좋겠네요."
당외가 피식 웃었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아주 멍청한 소리를 하는구나. 나는 당학이 비무에서 지면 당가주에게 간섭하지 않기로 이미 약조를 맺었다. 그리고 내가 너 같은 애송이에게 지고도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뭐라?"
"그럴 것 같은데요?"
"……."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겠죠. 그런데……."
그리고 이내 고개가 모로 꺾인다.
"아세요?"
"……무슨 소리냐?"
"부끄럽다는 게 뭔지 아시냐고요."
"이, 이놈이!"
청명은 우습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걸 아는 사람이면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오지도 않았겠죠. 이번 일도 마찬가지예요. 보나마나 온갖 핑계를 대 가며 다시 간섭하려 들겠죠. 왜? 댁들에게는 남은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
당외의 눈에 업화가 피어났다. 동시에 이가 으드득 갈린다.
청명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 한 줌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면……."
그리고 당외를 겨눈다.
"제가 잘라드리죠. 그 손모가지."
당외를 노려보는 눈에 한기가 서려 있다.
'나이를 처먹었다고 다 어른은 아니지.'
사실 청명은 문파의 나이 든 이들에 대한 적대감이 없는 사람이다. 애초에 청명부터가 따지고 보면 늙은이인 데다가 이미 문파 최고의 어른으로 지내 본 경험이 있으니까.
하지만 저런 이들은 어른이 아니다.
문파의 어른들은 아랫사람들을 돌봐야 한다. 아랫사람들을 짓눌러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작은이과 이전투구를 벌이는 순간 어른이라는 말을 들을 자격 따윈 사라진다고 봐야 한다.
당보가 지금 저놈들을 보았다면 청명처럼 온화하게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피눈물을 뿌리며 모조리 제 손으로 쳐 죽이고도 남았을 테지.
진짜 어른은 저런 것들이 아니다.
화산의 현 장문인인 현종. 그리고 묵묵히 그를 지원하는 현상. 그리고 현……. 아, 현영 장로는 생각 좀 해 보자. 생각 좀.
그리고…….
'장문사형.'
이제는 안다.
그들이 얼마나 화산을 생각하고 아끼며 사랑했는지. 청명은 그들에게 그저 골칫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나이만 처먹었지 화산에 해 준 것이 뭐가 있는가?
'이제는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당보 역시 그 사실을 후회했다.
그는 제 잘난 맛으로 평생을 살았다. 하지만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명성이 그가 남긴 전부다.
청명은 뭐가 다른가?
"후."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괜찮아.'
잘못을 되돌릴 기회를 얻었으니까.
이번 삶은 과거와는 다를 것이다.
"자, 이제 덤비시죠."
"……나는 아직 그 조건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 말해 보세요."
청명이 좌우를 시선을 돌린다.
"이 많은 이들 앞에서 저한테 질까 봐 겁나서 그런 약속은 못 하겠다고 한번 말해 보시죠. 그럼 저는 그냥 내려갈게요. 굳이 안 싸워도 되니까요."
"하……."
당외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오냐.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대신……."
당외의 눈에서 서슬 퍼런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다."
"아이고, 무서워라."
청명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씨익 웃는다.
"걱정 마세요. 저는 별 고통 없이 끝내 드릴 테니까요."
이제 말은 필요 없다.
당외의 얼굴에서 한순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내가 저놈의 말에 말렸구나.'
이곳의 모든 이들이 둘의 대화를 들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식솔들의 시선에서 부정과 불만이 느껴진다.
아마 그가 화산신룡을 일 수에 쳐 죽여 버린다고 해도 그는 두 번 다시 과거의 입지를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거였군.'
이리되면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화산신룡은 살아서 비무대를 내려가기만 해도 목적을 모두 달성하게 된다. 당가의 장로를 이기지 못했다는 게 저 어린아이에게 흠이 될 리는 없을 테니까.
당외는 이미 졌다.
'하나.'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해야겠지. 뒷방에도 격이 있으니까.
'너는 반드시 죽는다!'
당외가 소매 속으로 손을 깊이 밀어 넣었다. 안쪽 깊숙하게 넣어 둔 독병들이 그의 손에 잡힌다.
비무에 이런 독들까지 쓰는 건 어찌 보면 과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를 이렇게까지 몰아간 것은 다름 아닌 저 화산신룡이다.
이건 그 대가다.
당외의 손에 붉은색의 독병이 잡혀 나왔다. 그는 천천히 독병의 마개를 열고 자신의 손에 흩뿌렸다.
이제 그의 손에 잡히는 암기에는 모두 독이 묻어날 것이다.
청명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보통 사천당가의 고수들은 독을 사용할 때 특수하게 제작된 사슴가죽 장갑을 낀다. 하지만 지금 당외는 맨손으로 극독을 다루고 있다.
그만큼 독공에 대한 숙련도가 높다는 뜻이다.
청명이 입술을 살짝 핥았다.
"각오는 됐겠지?"
"그쪽 상대하는 데 각오까지 필요하지는 않아서요."
"……광오하기 짝이 없군. 그 알량한 명성이 너를 지켜 주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알았으니 시작하시죠."
청명이 검을 슬쩍 내렸다.
선공을 하라는 듯이 말이다.
이윽고 당외의 몸에서 서서히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드러웠던 기세가 이내 차가워지고, 독해지더니 이내 그의 몸을 휘감고 도는 기파를 불러왔다.
"내가 힘이 없어 그동안 참고 살았다 생각하는 모양이군.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가주조차 내 상대는 아니다."
"와……."
피부가 따끔따끔해 온다.
기세가 아니라 저 기파에 섞여 나오는 독이 그만큼이나 지독하다는 뜻이리라.
보라.
당외가 딛고 선 비무장 바닥의 청석이 스멀스멀 녹고 있었다.
'돌을 녹여 버릴 정도의 독이라…….'
무시무시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물러나라!"
"뒤로! 뒤로 물러나! 당장!"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던 당가의 식솔들이 기겁을 하며 뒤로 우르르 물러났다. 독을 밥처럼 먹는다는 당가인들조차 저 가공할 독력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어설프게 주변에 있다가는 휘말려 중독될 수도 있다.
가솔들이 물러나는 것을 지켜보던 당외의 눈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죽어라!"
파아아아아아아!
그의 양손에서 시커먼 경기가 마구 뿜어졌다.
독장(毒掌)!
독과 경기를 섞어 만들어 내는 독장이 청명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날아든다.
스읏.
청명은 살짝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 당외의 독장을 피해 버렸다. 너무도 수월하게 말이다.
"쉽게 당하면 재미가 없지!"
하나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당외가 앞으로 두어 발 나선다. 그리고 곧장 좌우로 소매를 털어 내었다.
쐐애애애애애액!
우모침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세침들이 저마다 독기를 품고 청명을 향해 날아든다. 이전 비무에서 당학이 보여 주었던 일 수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한 기세였다.
하지만 당외를 상대하는 자 역시 유이설이 아니라 청명이었다.
"읏차아아아아아!"
청명이 검을 과격하게 좌에서 우로 휘두른다.
검을 휘둘러 만들어 낸 검풍이 날아드는 세침을 살짝 밀어 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연격으로 휘두른다. 세침의 비 사이에 틈을 만든 청명이 주저 없이 몸을 앞으로 날렸다.
"이정도로는 어림없지!"
청명이 앞으로 돌진한다.
하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당외의 입가에 걸린 것은 비릿한 미소였다.
"쥐새끼가!"
퍼어어어어어엉!
거대한 폭약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붉은빛의 먼지가 뿜어져 나온다. 순식간에 비무장 전체가 뒤덮여 버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당군악이 비명을 내질렀다.
"귀, 귀왕령(鬼王令)! 원주! 제정신인가! 이 미친놈이!"
화산의 제자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귀왕령(鬼王令).
당가의 독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해약이 존재하는 약이고, 다른 하나는 오로지 적을 살상하기 위해 해약을 만들지 않거나, 만들 수 없는 약이다.
귀왕령은 후자에 속하는 독이었다.
비무에 귀왕령을 사용한다는 것은 살초를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한 경우다. 당가가 정파로 남기 위해 지켜야 하는 것 중 하나가, 같은 정파인을 상대로는 해약이 없는 독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원로원주가 그 법칙을 깨 버린 것이다.
"막아야 한다! 빌어먹을, 저 미친 늙은이를 끌어내!"
당군악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내질렀지만, 누구도 비무대에 접근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귀왕령은 해약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당가인들조차도 중독이 된다면 살아날 수 없다는 뜻이다.
"쯧쯧. 놀라기는."
당외가 당군악의 반응을 보며 혀를 찼다.
이미 논리로 힘을 얻는 건 글러 먹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실력 행사뿐.
'진즉에 이리했어야 했다.'
애초에 공포로써 지배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명분과 체면에 집착한 것이 문제였다.
"아이야. 너는 너무 건방졌다."
그가 소매에서 한 줌의 모래를 잡아 뺐다.
"당가는 독과 암기의 가문이 아니라. 독의 가문이란다. 암기술만 보고 당가를 너무 얕봤구나."
촤아아아아악.
모래가 비무대 위로 뿌려진다.
당학이 사용했던 단혼사가 아니다.
당외가 특별히 제조한 칠보추혼사(七步追魂砂)였다. 말 그대로 한번 중독이 되면 일곱 걸음을 걷기도 전에 혼이 달아난다는, 무시무시한 독 모래다.
"제아무리 대단한 무인이라 해도 피어오르는 먼지 한 톨까지 모두 피할 수는 없고, 쏟아지는 모래를 모두 막아 낼 수는 없다. 너희 정파 놈들은 당가를 우습게 여기지. 하지만 그건 당가가 너희의 사정을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짜 독을 아낌없이 사용했다면 천하의 패자는 당가가 되었을 것이다."
이죽거린 당외가 먼지 속에 드러나는 청명의 그림자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청명의 모습이 얼핏 보인다.
이대로 둬도 죽겠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되지."
당외의 손에 또 다른 독병이 잡혔다.
그는 뚜껑을 열자마자 지체 없이 장력으로 독병을 날려 버렸다.
뿜어져 나온 새파란 연기가 당외의 장력과 섞이며 청명에게 날아가 그의 몸을 강타했다.
"이건 네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환희연(歡喜煙)이라고 하지. 너는 죽는 그 순간까지 지옥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고통에 겨워 발악하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마치 기뻐 날뛰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청명에 대한 응징을 끝낸 당외가 슬쩍 고개를 돌려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어떻소? 가주?"
당군악의 눈에 핏발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