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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07화 (207/1,567)

207화. 조상님의 회초리는 좀 아픈 법이거든. (2)

사방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졌다.

당학이 졌다.

그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당가의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화산신룡도 아니고.'

그 일행에 불과한 여자에게 지다니.

아무리 저 유이설이라는 화산 제자가 화산신룡보다 배분이 높아 보인다고는 하나, 나이는 되레 당학보다 한참 어렸다.

그런데 당학이 당하다니…….

지켜보던 이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는 너무 큰 의미를 지닌다.

천하에 수많은 문파가 있지만, 당가만큼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은 흔하지 않았다. 당가는 아무리 식솔이라 해도 딸에게는 비전을 내주지 않는 비정한 곳이다.

그리고 그 당가의 후기지수들 중 최고로 평가받는 당학이 하필이면 화산의 여제자에게 패한 것이다.

당소소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겼어."

그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유이설이 당학을 이겼다.

다른 이들에게도 놀랄 일이겠지만, 특히나 당소소에게는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다.

당학을 이긴다.

당소소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다.

물론 조건이 다르다. 당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당가의 비전을 전수받지 못한 그녀는 죽었다 깨어나도 당학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유이설은 해냈다.

"……굉장해."

유이설을 바라보는 당소소의 얼굴이 멍했다.

중독을 치료 중인 유이설을 그렇게 한참 바라보던 그녀가 문득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응?

저 사람은 왜 또 올라오지?

청명이 휘적휘적 걸어 비무대에 올라서는 모습이 보인 것이다.

이미 승부는 났는데 굳이?

청명은 비무대에 올라 주변을 한번 쭉 돌아보았다.

자연히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시선을 모으고도 그는 살짝 더 뜸을 들였다. 모두가 충분히 주목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조금 답답해할 무렵에야 청명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청명이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가만히 입을 열었다.

"천하의 사천당가라 기대를 했는데……."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요?"

다들 살짝 놀란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건 당가를 대놓고 무시하는 발언이다.

"아아. 그렇게 화난 얼굴로 보지 마세요. 제 입장이면 다 저같이 생각할 테니까요."

청명이 턱짓으로 실려 나가는 당학을 가리켰다.

"보세요."

"……."

다들 입을 닫았다.

패자는 할 말이 없는 법이다.

"싸움을 걸기 전에 자기 역량과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는 건 기본중의 기본이죠. 설마 당가가 그 기본도 지키지 못할 줄은 몰랐거든요."

청명이 피식 웃었다.

당가의 식솔들은 당연히 그 나지막한 비웃음에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차마 청명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당학은 청명에게 패하지 않았다. 청명의 일행에게 패한 것이다.

유이설이 청명보다 강했다면 화산신룡의 별호는 그녀가 가져갔을 터. 즉, 당학이 청명에게 이길 확률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런 비무를 추진한다?

이건 대놓고 망신을 당하겠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상대를 우습게 보고 자신을 과신한다. 이건 한 문파를 이끌어 나가는 이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래서 묻는 건데……."

청명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 말도 안 되는 비무를 하자고 한 사람이 누군가요?"

자연스레 시선이 돌아간다.

입을 열어 성토하지는 않지만, 질문은 받는 순간 반사적으로 몇몇이 고개를 돌리고, 남은 이들은 그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이내 모든 시선이 당외에게로 꽂혔다.

"크흠."

당외가 불편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빌어먹을.'

상황이 엿같이 꼬여 버렸다.

당학은 청명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걸 당외라고 왜 모르겠는가? 그렇기에 청명을 중독시키려 한 게 아닌가?

그런데 당학이 유이설에게 패해 버리며 모든 게 박살났다.

모양은 꼴사납겠지만, 어찌어찌 힘겨운 승리라도 거뒀다면 가주가 약속한대로 소가주가 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이기는 것이지 어떻게 이기느냐가 아니니까.

하지만 모든 사람 앞에서 유이설에게 처참히 패해 버린 이상 그 모든 약속은 의미가 없어졌다.

게다가…….

이 비무를 추진한 이유를 묻는 시선들이 그에게로 꽂힌다.

'내 입으로 이걸 설명하라고?'

청명을 중독시켜서 이겼으면 다 괜찮았다는 말을?

그걸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지금은 그냥 얻어맞는 수밖에 없다. 아무런 생각 없이 제 손자의 역량을 파악하지 못하고 감히 화산신룡에게 비무를 건 멍청이가 되어서 말이다.

당외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억누르며 청명을 노려보았다.

'이 모든 게 저놈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아래로 뛰어 내려가 저놈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청명을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당가의 장로가 제 분을 못 이겨 어린 후배를 공격했다는 말을 들을 수는 없으니까.

청명이 그런 당외를 보며 히죽 웃는다.

"아. 원로시구나."

원로라는 말을 강조한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제가 듣기로는 당가의 원로원은 가주께 조언을 하는 위치라고 들었는데……. 제 손자의 역량도 모르고, 적의 역량도 모르는 사람이 누구에게 조언을 한다는 거죠?"

"이, 이놈이 감히!"

당외가 자신도 모르게 격한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보세요. 가주님은 저희가 이긴다는 쪽에 걸었잖아요. 누가 누구에게 조언을 한다는 거죠?"

"이……."

당외가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지금 청명은 그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고 있다.

당학이 진 것은 수습할 수 있다. 아쉽긴 해도, 그건 바랐던 것을 얻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이렇게 많은 이들 앞에서 밝혀지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이건 원래 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원로원은 가주에게 조언하는 곳.

당연히 조언하는 자는 가주보다 강하지는 못해도 가주 이상의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 나이가 들어 원로라는 이름을 가지고 안방을 꿰찬 이들이 식견조차 증명하지 못한다면 뒷방으로 밀려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원로원이라, 말은 좋죠. 그런데 괜히 발목이나 잡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화산 아해의 방자함을 지켜봐 주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노기를 참아 내지 못한 당외가 싸늘한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청명은 그 말을 듣고 겁을 먹기는커녕 되레 당외를 가리킨다.

"거보세요."

청명이 피식 웃는다.

"식견이 없다니까요. 누가 방자함을 봐주는지도 모르잖아요."

"……뭐라 했느냐?"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세요?"

대답하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짐작을 하는 이들도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었고, 모르는 이들은 알지 못하기에 말을 할 수 없었다.

"간단해요."

그들에게 설명해 주겠다는 듯 청명이 손을 들어 단상 위를 가리킨다.

"약하니까."

"……."

당외의 눈이 커졌다.

"약해 빠졌으니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는 거죠. 그런 주제에 가주께 조언을 한다고요?"

청명이 고개를 내젓는다.

"발목이나 안 잡으면 다행이죠."

"……놈!"

"지금도 그래요. 원로원에서 발목을 안 잡았으면 이런 망신을 당할 일은 없었을 거고, 가주께서는 원하는 일을 빠르게 추진하셨겠죠. 원로원이라는 뒷방 늙은이들의 말을 들은 대가가 이거예요."

그 순간이었다.

"화산신룡."

당군악이 살짝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말을 조심해 주게. 당가의 원로들이시네."

"크으. 우리 가주님은 마음씨도 좋으시지."

과장스레 감탄사를 뱉은 청명이 순간 표정을 굳히곤 싸늘하게 말한다.

"덕지덕지 붙은 짐 덩어리들을 그래도 어른이라고 챙겨 주시네."

"네 이놈!"

당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듣자 듣자 하니 정녕 끝을 모르는구나! 내가 언제까지 참아 줄 것이라 생각했느냐?"

"저 보세요. 식견이 없다니까요."

"뭐라?"

"나는 지금 참지 말라고 이러고 있는 거예요. 그거 하나 파악하지 못하는 양반이, 뭐? 원로?"

청명이 고개를 똑바로 뜨고 당외를 바라본다.

"증명해 보시죠. 그쪽이 원로를 자처할 자격이 있는지."

"어떻……."

당외가 원래 하려던 말은

'어떻게 증명하란 말이더냐?'

였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것이 화산신룡의 의도라는 것을 깨달은 당외가 바로 입을 다문다.

하지만 이어진 청명의 말은 그를 더 이상은 참기 어렵게 만들었다.

"간단하죠. 아까부터 자꾸 참아 주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건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말이죠."

"……뭐라고?"

"그러니까. 그쪽은 눈이 없다니까요."

청명이 자신의 검집을 툭툭 쳤다.

"내가 더 강하거든요."

"……."

"그 식견을 증명해 보시죠. 원주님이 저를 이기면 원주님이 제대로 본 거고, 제가 이기면 그 눈은 영 쓸모가 없는 것 아니겠어요?"

"하……."

당외가 허탈하게 웃는다.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핫!"

마침내 파안대소를 터뜨린 당외가 어이없다는 투로 청명을 향해 묻는다.

"지금 나와 비무를 하자는 거냐?"

"와. 그거 하나 이해시켜 드리려고 정말 오래도 설명했네요. 이 말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텐데."

"……."

당외가 자신도 모르게 뒷목을 살짝 주물렀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속을 뒤집어 놓는다. 듣고 있으니 도무지 참아 줄 수가 없었다.

"네가 작은 명성을 얻더니 이성을 잃었구나. 지금 당가의 태상장로인 나와 비무를 하자고?"

"저기."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이가 드셔서 잘 안 들리는 건 알겠는데, 같은 말을 계속 하는 게 힘들거든요. 어쩌실 거예요?"

당외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건 그리 화만 낼 일은 아니다.

어차피 상황은 최악이다.

저 시건방진 놈을 당가의 식솔들 앞에서 때려잡는다면 일단 이 상황을 봉합할 수는 있을 것이다.

"가주!"

당외가 차갑게 일갈했다.

"어찌하시겠소? 내가 저 아이를 죽인다 해도 이해하시겠소?"

당군악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화산신룡은 당가의 친구입니다."

"……."

"그러니 친구가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겠지요."

"허?"

황당하다는 듯 당군악을 바라보던 당외가 파안대소한다.

"하하하하하핫! 정말 내가 우습게 보인 모양이군."

당외가 즉시 몸을 날려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휘날린 옷자락이 내려앉기도 전에 당외가 귀신같은 얼굴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너는 도를 지나쳤다.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하고 돌아갔어야 하는 것을."

"조심하세요."

"음?"

청명이 히죽 웃었다.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놀림거리가 하나씩 늘고 있거든요. 비무가 끝나도 당가에서 살아야 할 텐데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시려고?"

당외는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는 저놈과 더 말을 섞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저 망종 놈을 독으로 시커멓게 절인 후 배에 비도를 박아 처넣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독 쓰실 거예요?"

당외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는 독공이 특기다. 독공을 쓰지 못한다면 제 실력의 삼분의 일도 발휘할 수 없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저놈을 죽이는 건 충분하다.'

막 쓰지 않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청명이 선수를 쳤다.

"독 쓰시려면 조건을 하나 더 달죠."

"……조건?"

"이건 조건이라기보다는 내기에 가까운데."

청명이 슬쩍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당군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청명을 신뢰하겠다는 뜻. 하지만 뒤이어 나온 말은 천하의 당군악마저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쪽이 이기면 원래 원했던 건 다 들어드리죠. 화산은 당가를 떠난 후 다시는 이쪽을 돌아보지 않을 거고, 아까 그 얼간이는 소가주? 네, 가주님이 소가주로 만들어 주실 거예요."

"……어어?"

천하의 당군악의 입에서 경호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미 된다고 한 것을 물릴 수도 없다.

당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청명을 노려보다 물었다.

"제정신이냐?"

"걱정 마세요. 완전하게 제정신이니까. 대신 이쪽은 조건을 바꿔야죠."

"……조건이 뭐냐?"

"내가 이기면……."

청명의 웃던 낯이 조금씩 차가워진다.

'자꾸 떠오르지 마라.'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이 빌어먹을 놈아.

살짝 심호흡을 한 청명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원로원을 해체하고 물러나세요. 당가주께 당신들 같은 조언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까."

차가운 청명의 목소리가 모두의 귀를 똑똑히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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