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그냥 제 변덕이라고 해 두죠. (5)
"거기 아직 멀었어?"
"빨리빨리 만들어! 빨리!"
"궁보계정은? 아까 전부터 만들라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부숙수 어디 갔어!"
사천당가의 숙수들은 필사적인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다섯 명이라고 하지 않았어? 이거 이십 인분은 넘게 들어간 것 같은데 뭘 이렇게 더 만들라고 하는 거지?"
"말도 마십시오. 거의 한 명이 다 먹어 치우고 있답니다!"
"이걸 다?"
"그렇다니까요."
"허허. 무슨 아귀라도 붙었나."
숙수들의 손이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바쁜 숙수들 사이로 한 사람이 자연스런 걸음으로 끼어들었다.
끼어든 이의 복장을 본 숙수들이 음식 그릇과 술병을 쟁반에 담아냈다.
"빨리빨리! 식기 전에 나르거라!"
"예!"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감춘 이가 음식 쟁반을 받아 들고는 재게 걸음을 옮긴다.
그는 주방에서 빠져나와 슬쩍 주위를 살피고는 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큰 병 하나와 작은 병 하나를 꺼내어 확인한 그가 차갑게 눈을 빛냈다.
- 놈이 술을 좋아한다더군.
작은 병 하나에 든 가루를 궁보계정에 골고루 뿌린 뒤, 다른 병에 든 액체를 술병 안으로 흘려 넣는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쟁반을 들고는 태연하게 걷기 시작했다.
화산 제자들의 처소에 도착한 그는 살짝 헛기침하고는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오! 왔다!"
"……또 와?"
"이걸 다 먹는 네가 대단한 건지, 이걸 다 주는 당가가 대단한 건지 모르겠네."
내실 중앙에 놓인 탁자에는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들이 널려 있었다.
사내가 가져온 음식들을 청명의 앞쪽에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빈 그릇들을 챙겼다.
"크으.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청명이 휘파람을 불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백천이 오만상을 찌푸린다.
"진짜로 또 먹냐? 또?"
"그럼 주는데 먹어야지."
"뭔 걸신이 들렸나? 야, 이 녀석아! 오후에 비무를 해야 한다며! 그런 놈이 이렇게 몸을 무겁게 만들어도 되는 거냐?"
"괜찮아, 괜찮아."
"화산도 음식은 잘 나오잖느냐? 왜 이렇게 굶던 사람처럼……."
"사숙."
"응?"
"그건 밥이지."
"그럼 이건?"
"이건 요리고."
"……."
미묘한 말이지만 백천은 귀신같이 청명의 말을 이해했다. 아무리 고기를 아낌없이 퍼붓고, 좋은 재료를 쓴다고 해도 화산의 주방에서 나온 음식과 이곳의 음식을 비교할 수는 없다.
사천 최고의 숙수들이 만들어 내는 요리가 아닌가?
"크으. 일단 한 입……."
청명이 그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의 시선이 한쪽으로 획 돌아간다.
"크으! 뭐지? 이 사람 죽이는 냄새는?"
청명의 눈이 새로 내어진 술병에 고정되었다. 뚜껑이 열린 술병에서 기가 막힌 향이 솔솔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지체 없이 손을 뻗은 청명이 술을 입에 들이부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아!"
"……누구 죽는 소리가 나는데."
"저리도 좋을까."
청명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술병을 바라보았다.
"와, 뭐 이런 게 다 있지? 진짜 명주구나."
백천이 슬그머니 청명에게로 다가왔다.
"그럼 어디 나도 한 입만……."
"에헤이! 어디 사질 술에 손을 대려고 해! 버릇없이!"
"……이게 미쳤나?"
문파 꼴이 거꾸로 돌아가는구나.
거꾸로 돌아가.
"크. 이 궁보계정은 거의 예술이네, 예술! 여기 있는 숙수들 다 화산으로 데려가고 싶다."
"화산 주방에 고용하게?"
"아니. 내 전용으로."
"……."
원시천존이시여.
왜 저런 것을 화산에 내리셨습니까?
청명이 술을 마시고 음식을 골고루 먹어 대는 것을 본 사내가 빈 그릇을 들고 조용히 방에서 빠져나갔다.
꼴꼴꼴꼴.
입가를 소매로 쓱 문질러 닦은 청명이 술병을 바라보며 피식피식 웃는다.
그러더니 충분히 배를 채웠다는 듯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 과식했다."
"거봐. 내가 적당히 먹으라고 했지."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야 뭐."
조걸이 탁자를 보며 살짝 눈을 찌푸린다.
"꽤 남았네. 아까운데 마저 먹어 치워야……."
탁!
청명의 젓가락이 빛살처럼 조걸의 젓가락을 때린다.
"……."
"그건 내 거야. 사형은 다른 거 먹어."
"……어?"
청명이 씩 웃었다.
"이건 당가에서 날 위해 준비한 음식이거든."
영문 모를 소리에 조걸이 고개를 갸웃했다.
* * *
화산신룡과 당학이 비무를 벌인다는 소식은 당가 전체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 화산신룡과?"
"당학 공자가 그 정도였나?"
"에이. 무슨 소린가! 당학 공자가 가주님의 자식이 아니어서 그렇지, 실력 하나는 당가의 젊은 무인들 중에서 최고가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화산신룡인데. 일전에 가주님도 화산신룡과의 비무에서 낭패를 보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건 가주님이 봐주신 거지. 설마 그분이 어린 화산의 도사에게 살수를 쓰셨겠는가?"
저마다 생각과 의견은 달랐지만, 다들 이 비무를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때문에 비무가 열리는 사천당가의 중앙 연무장은 아침부터 몰려든 식솔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몰려든 이들을 보는 당학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후욱."
깊이 심호흡하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당학이 소매 안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였다.
"긴장할 것 없다."
당학이 고개를 획 돌렸다.
그의 할아버지이자 원로원의 원주인 당외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원주님을 뵙습니다."
"쓸데없이 힘줄 것 없다. 할아버지라 부르거라."
"예! 조부님."
당외가 가만히 미소 짓는다.
"자신은 있느냐?"
"소손이 그동안 노력을 게을리해 온 것은 아니나…… 상대는 천하제일 후기지수로 불리는 화산신룡입니다. 솔직히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쯧쯧쯧. 못난 놈. 저보다 열 살은 어린 아이에게 겁을 먹었단 말이더냐?"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걱정할 것 없다."
"예?"
당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내가 하나뿐인 손자인 너를 사지로 보내기야 하겠느냐? 화산신룡은 약 먹은 닭처럼 골골댈 테니, 시간 끌지 말고 때려잡거라."
"그걸 어찌……."
"단!"
당외가 눈을 매섭게 빛내며 속삭였다.
"살려 둬서는 안 된다."
당외의 말을 이해한 당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가 뒤틀리며 비열한 웃음이 내걸린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놈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그렇지. 장부는 독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두 조손이 서로를 마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만 잘되면 너는 소가주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그럼 가주의 자리 역시 자연히 너에게로 이어지겠지."
"조부님의 은혜에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가주에 오르는 것이 보답이다. 그럼 내 한도 풀리겠지."
당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연무장에 모인 이들을 바라보았다.
"보이느냐?"
"예."
"저 많은 이들이 모두 당가의 가솔들이다. 형제지간에도 분란이 일어나는데, 이 많은 이들이 어찌 한 가족처럼 살아갈 수 있겠느냐?"
"……."
"진정한 가주가 갖춰야 할 것은 제 식솔들을 아끼는 마음이 아니다. 차갑고 냉철하게, 오로지 당가의 이득만을 볼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내 말 명심하거라."
"예! 조부님."
당외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이걸로 됐다.'
수하로부터 청명이 천일취(千日取)를 복용하는 모습을 확인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제 아무리 난놈이라고 해도 천일취에 중독된 상태에서는 당학을 감당하지 못한다.'
천일취는 당가의 특수한 독 중 하나다.
천일취의 특징은 양독과 음독이 나뉘어 있다는 것. 둘을 함께 쓰지 않는다면 독으로서 작용하지 못한다. 단순한 가루와 액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두 가지가 배 속에서 만나게 되면 서로 섞이며 독이 되는 것이다.
천일취에 중독된 이는 취한 것처럼 정신이 흐려지고, 공력을 잘 끌어 올리지 못하게 된다.
'이런 비무에서 사용하기에는 최적의 약이지.'
당외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있는 당가주를 보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가주라는 놈이!'
아무리 청명을 응원해야 하는 입장이라지만, 당가의 가주가 화산 쪽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게 말이나 되는 짓인가?
'저런 놈에게 당가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다.'
오늘이 지나게 되면 당가는 그와 당학의 이름으로 재편될 것이다.
그때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는 화산의 제자들이 보였다.
"왔다!"
"화산이다! 화산신룡이다!"
모여 있던 당가의 식솔들이 그들을 보며 숨을 죽였다.
야유도 환호도 할 수 없다.
당군악이 그쪽에 서 있기에 야유를 보낼 수 없고, 화산이 상대하는 이가 당학이기에 환호도 할 수 없다.
그저 어정쩡하게 높은 목소리가 어수선하게 쉴 새 없이 울릴 뿐이었다.
"준비는 되었느냐?"
"예! 조부님!"
"좋다. 기세를 내어 주면 안 되겠지. 바로 나가거라!"
"예!"
당학이 임시로 만들어진 비무대 위로 뛰어올라,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본다.
'내가 소가주가 되는 자리다.'
더없이 근엄한 모습을 보여야겠지!
"화산신룡은 앞으로 나서라. 내가 오늘 너를 상대해 당가의 무학이 화산의 위에 있음을 증명하겠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그렇지!"
결국 팔은 안으로 굽는 법.
그 당당한 말에 당가의 식솔들이 환호를 질렀다. 은근슬쩍 당군악의 눈치를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당군악은 그 환호에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은…….
응?
쟤들 뭐 하는 거지?
중인들의 시선이 화산의 제자들에게 쏠린다. 당학의 말을 분명 들었을 텐데도, 그들은 둥글게 서서 자기들끼리 뭔가를 연신 쑥덕거리기에 바빠 보였다.
"진짜요?"
"그래도 되나?"
"……아니, 그……."
"괜찮아, 괜찮아."
"……정 그렇다면."
긴 쑥덕거림이 끝나고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망설임 없이 비무대에 오르는 이를 보며 사람들이 감탄을 토했다.
"저 사람이 화산신룡! 천하제일 후기지수!"
"과연 굉장한 기세……. 어?"
"화산신룡이 여자였어?"
모두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비무대에 오르는 이는 화산의 여제자다. 아직 사천까지는 청명의 명성이 크게 퍼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화산신룡이 남자라는 것을 모를 정도는 아니다.
"화산신룡을 상대한다고 하지 않았어?"
"웬 여자가?"
"아니! 지금 여자가 당학 공자를 상대하겠다는 건가? 당가를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중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화가 나도 당학만큼 화가 날리는 없다.
노기로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당학이 우렁우렁한 일갈을 내질렀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거리인가!"
그는 비무대 위로 올라온 유이설을 노려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나는 분명 화산신룡을 상대하기로 하였다. 너는 누군데 감히 비무대 위로 올라오는가?"
"화산의 유이설."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화산신룡은 어디에 있느냐?"
그제야 모여 있던 화산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 터덜터덜 앞으로 나선다.
"전데요?"
"……."
귀찮아 죽겠다는 티를 팍팍 내는 청명. 그 모습을 본 당학이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대가 나를 상대해야 할 텐데?"
"아, 거 그렇게 됐으니 그냥 이리합시다."
"뭐가 그렇게 이렇게야!"
"쯧."
청명이 빵빵해진 배를 툭툭 쳤다.
"과식을 했더니 소화불량이 와서."
"……과식? 지금 무인이 과식을 했다는 말이더냐?"
"당가 음식이 엄청 맛있더라고요."
"……."
황당하다. 아니,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다.
이 와중에 더 황당한 것은 그런 화산신룡의 옆에서
'그렇긴 하지.'
하고 중얼대며 고개를 끄덕이는 당군악이었다.
"화산은 수치를 모르는가?"
"거참, 말을 이상하게 하시네. 수치를 모르는 게 누군데요."
"뭐라?"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쪽이 나를 상대한다고요?"
"……그렇다."
"뭔 자격으로?"
"……."
당학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그래도 화산신룡인데!"
청명이 배를 쭉 내밀었다.
빵빵하다. 빵빵. 뭘 얼마나 먹었으…….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제 입으로 명성을 자랑하는 건가? 무인이 명성에 연연하다니."
"뭔 거지발싸개 같은 소리예요. 그럼 댁들은 당가가 어디 저 구석에 처박혀 있는 사람 다섯 명짜리 가문이랑 같이 취급을 받아도 그렇구나 하고 이해하는 모양이죠?"
"……."
아니, 그건 아니지.
여기가 사천당가인데.
"내가 이 명성을 어떻게 얻었는데? 죽어라고 칼질하고 맨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녀서 얻은 명성인데. 그런데 뭐요? 비무? 그것도 어디서 들어 보지도 못한 양반이 나랑 비무를 한다고?"
청명이 기묘한 표정을 짓는다. 이죽거림과 조롱이 동시에 한껏 담겨 있는 표정을.
"헛수작하지 마시죠. 도전에도 최소한의 자격은 필요한 거예요. 그게 아니면 당가 현판에다
'지나가시던 분. 비무 신청하면 받아 드립니다. 사천당가가주.'
라고 써넣으시든가!"
변명할 말도 찾지 못하던 당학이 입을 다물자 청명이 구시렁거렸다.
"이 양반들은 내가 이 별호를 뒷골목에서 도박으로 딴 줄 아나. 개나 소나 다 엉겨드네. 어디 뭐 변변하게 이름자도 못 알린 게 어디 건방지게 비무질이야."
당학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혀를 찬 청명이 턱짓으로 유이설을 가리킨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관대하니까. 우리 사고랑 싸워 이기면 내가 상대해 줄게요. 아니, 사실 뭐 이것도 귀찮으니까……."
청명이 씨익 웃었다.
"댁이 우리 사고를 이기면 내가 진 걸로 할게요."
당학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지금 나보고 여자와 싸우라는 거냐?"
"……헐."
청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연이어 파르르 떨린다.
"뒈지고 싶으면 그냥 접시 물에 코를 박으면 되지. 굳이 맞아 죽으려고 발악할 것까지야……."
"뭐?"
그 순간이었다.
"다 했나요?"
당학의 고개가 획 돌아간다.
스르르릉.
유이설의 검이 천천히 뽑혀 나왔다.
"다 했으면 이제 해요. 싸움."
분노를 참지 못한 당학의 얼굴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이……. 이 수치도 모르는 것들이!"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앗!
"……."
당학이 고개를 천천히 내린다.
그의 양 소맷자락이 잘려 바닥으로 너울너울 떨어지고 있었다.
"……."
"말이 너무 많아."
유이설의 조용한 한마디에 당학의 이가 바드득 갈렸다.
"……너. 살아서 비무대를 내려갈 생각은 하지도 마라."
순식간에 팽창한 긴장감이 연무장을 휘감았다.
이런 상황에서 단 한 사람만이 다른 말을 중얼거렸다.
"사매. 말이 많다는 건 우리가 할 말은 아니야……."
"응? 뭐라고 사숙?"
"아니……. 아무것도."
슬쩍 고개를 돌리는 백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