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그냥 제 변덕이라고 해 두죠. (4)
"거기 좀 서 보라니까요!"
"아니, 뭐 저런 찰거머리가 다 있어!"
청명이 학을 떼며 달아났다.
그의 뒤로 당소소가 가공할 기세로 쫓아오고 있었다.
괴이하다.
무척이나 괴이하다.
물론 당소소는 당가 가주의 딸이다. 비전은 전수받지 못한다 해도, 무학의 기초가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빠른 경신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괴이한 건 그게 아니다.
'뭔 사람이 치마를 입고 저리 빨리 뛰어!'
움직이기도 힘들어 보이는 화려한 궁장에 머리 장식을 저만큼이나 꽂고 저 속도로 달리는 건 천하의 청명도 엄두를 못 낼 일이다.
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는가를 떠나서 하고 싶지도 않다!
"거기 좀 서 보라니까요!"
"……."
"여기서 도망가면 끝일 것 같죠? 내가 화산에 가서 죽칠 거야!"
"끄으으으응!"
청명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몸을 획 돌려 당소소를 바라본다.
"드디어 섰네."
당소소가 청명의 앞까지 와서 깊게 숨을 내쉬고는 허리에 둘러맨 작은 봇짐 같은 것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응?"
물통?
물통과 잔을 꺼낸 당소소가 잔에 차를 따라 청명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이게 뭔데?"
"시원한 차예요. 도망치느라 목이 타실 테니 한잔 시원하게 드세요."
청명이 눈을 껌뻑였다.
보통 사람을 쫓아오면서 이런 걸 준비하나?
……얘 진짜 특이하네?
"얼른요."
"아."
청명이 당소소가 내민 차를 받아 들고는 쭉 들이켰다.
"크으!"
일단 시원하긴 하다.
그 모습을 본 당소소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시원하죠?"
"으음."
"자. 이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좀 해요! 제 어디가 싫어서 그렇게 도망 다니시는 거예요?"
"……."
청명이 살짝 인상을 썼다.
'네가 무서운 게 아니라 혼인이 무서운 거지!'
보통은 이런 정략혼 이야기가 나오면 여자 쪽에서 울고불고 싫다고 난리를 치는 경우가 더 많은데! 너는 왜 이렇게까지 적극적이냐고!
사람 입장 곤란하게!
"제가 못생겼어요?"
"어……. 그건 아니고."
"성격이 나빠 보여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네."
"그런데 왜 자꾸 그렇게 도망가요. 이런 혼처도 흔치 않다니까요! 얼굴 예쁘지! 성격 좋지! 집안 탄탄하지!"
그렇긴 하지. 과하게 탄탄하지.
과하게.
물론 남이면 껄끄럽지만, 처가로 둘 수 있다면 당가만큼 좋은 곳도 없…….
아악! 빌어먹을! 처가는 얼어 죽을 놈의 처가!
"저기."
"네."
"나는 정말 혼인하고 싶은 생각이 없거든?"
"다들 그래요. 그러다가 마음 바뀌는 거죠."
"나는 도사거든?"
"화산은 혼인이 허락된다고 들었는데요?"
"그렇긴 하지만 나는 마음이 없다니까?"
청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피차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괜히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더 좋은 혼처를 알아봐. 나는 절대 그쪽이랑 잘해 보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그러자 당소소가 묘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그게 아니죠?"
"응?"
"그 사고인가 하는 그 사람한테 마음이 있는 거죠?"
"……어?"
당소소가 검지로 청명을 가리켰다.
"그래서 절 밀어내려는 거죠?"
와.
얘는 혼자서 어디까지 가나?
"뻔하지! 그 여자는 예쁘니까! 남자가 미인을 마다할 리가 없지!"
청명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이것아!'
미인?
아, 미인 좋지!
근데 내가 혼인을 했으면 내 손녀가 니들 할머니뻘이거든?
뭘 해도 손녀가 재롱떠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
뭐?
미이이이인?
청명이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하기야 말을 해 본들 그 누가 그의 상황을 이해하겠는가?
청명이 딱히 대답을 하지 않자 당소소가 그것 보라는 듯이 턱을 쳐들었다.
"내 말 맞죠?"
"……말을 말아야지."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하튼 나는 혼인이고 나발이고 전혀 생각 없으니까, 자꾸 귀찮게 쫓아다니지 말고 다른 데 알아봐."
"그런다고 제가 포기할 것 같아요?"
"……응?"
"나도 필사적이라구요! 어떻게든 내 매력을 알게 해 주겠어요!"
"……쥐톨만 한게."
"내가 너보다 연상이거든?"
당소소가 눈을 부라렸다.
청명이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다.
'그냥 패 버릴 수도 없고.'
아무리 그래도, 그냥 귀찮다는 이유로 사람을 팰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 이유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 에라이! 이 천하의 망종 놈아!
"아! 안 패요! 안 패!"
"네?"
"……아니. 아무것도."
청명이 손을 내저으며 몸을 뒤로 뺐다.
"여튼 나는……."
"도망가지 말고 이리 와요. 오늘은 좀 찬찬히 이야기를 해 보자고요. 성도에 좋은 찻집에 가서 차도 한잔하고, 지는 저녁노을도 같이 보다 보면 없던 연심도 생길 거예요."
아니, 싫다고!
나는 연심 없어도 된다고!
그 순간이었다.
"……누님."
"응?"
당소소가 고개를 획 돌린다. 당잔이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가주님께서 청명 소협을 찾으십니다."
"하필 지금?"
당소소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데려가라는 의미다. 하지만 당잔은 조금 굳어진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중요한 일인 모양입니다."
"음."
당소소가 아쉽다는 듯 청명을 보며 입맛을 다신다.
"정말 그렇게 급한 일이시래?"
"촌각을 다툰다고 하셨습니다."
"휴, 할 수 없지. 잔아."
"예, 누님."
"너는 청명 소협을 아버님께 모셔 갔다가 도망치지 못하게 잘 잡아서 내 처소로 데리고 와."
"……."
"알았어?"
"넵."
당소소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명의 앞길을 터 준다. 그리고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어디 딴 데로 새지 말고 꼭 와야 해요!"
"……."
청명은 아예 넋이 나간 얼굴로 당잔을 따라 나섰다. 당잔이 안쓰럽다는 얼굴로 그런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힘드시죠?"
"……니야."
"예?"
"……당가 것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야."
"……."
반박할 수 없어서 서글픈 당잔이었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당소소가 지그시 입술을 깨문다.
'시간이 없는데.'
이제 곧 청명은 당가를 떠날 것이다. 사람이 이리도 간절하게 잡는데 저 정도로 반응이 없다면, 청명이 당가를 떠나는 순간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진다고 봐야 한다.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그거론 안 돼."
"헉!"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기겁을 한 당소소가 몸을 획 돌리며 머리의 장식을 순간적으로 움켜잡았다.
하지만 이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한숨과 함께 손을 내렸다.
"……무슨 일이세요?"
"이야기."
"네?"
유이설이 당소소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어."
"……."
어……. 조금 이상한 사람 같은데?
연못에 떨어진 돌이 커다란 파문을 만들어 내었다.
당소소는 번져 가는 물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알아요. 좀 추하죠?"
"……."
"그런데 나라고 좋아서 매달리는 거 아니거든요? 그쪽 남자한테 찝쩍대는 것 같아서 인간적으로 미안하긴 한데."
"사질."
"네?"
"사질이야."
당소소가 슬쩍 고개를 돌려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탓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다만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요?"
"그래."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데 아무런 관심도 안 보인다고요?"
"무공이 나아지는가에는 관심이 있어."
"……세상에."
아무리 도사라지만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에휴. 글렀네."
유이설의 말대로라면 청명은 애초에 여자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이를 꼬드겨서 혼인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내 팔자야."
당소소가 한숨을 푹푹 내쉰다. 그때 유이설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쪽도 감정이 없기는 마찬가지."
"……."
"아냐?"
당소소가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다만 오해는 마세요. 이용하려던 건 아니니까. 저는 혼인을 하게 되면 정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보여."
"이젠 다 날아가 버렸지만."
유이설이 가만히 당소소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왜 집착해? 혼인."
"네?"
"충분할 것 같은데? 굳이 혼인에 얽매이지 않아도."
당소소가 피식 웃고 말았다.
확실히 바깥에서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리 보이겠지.
"당가가 어떤 곳인지는 알아요?"
"……."
"당가의 율법은 지엄하기 짝이 없어요. 제가 여기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에요. 당가가 원하는 곳으로 시집을 가는 것.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건 그에 대한 최소한의 반항 같은 거죠. 어차피 강제로 시집보내질 처지라면 혼처라도 내가 택하겠다는 거예요. 가문도 마음에 들어 할 곳으로."
"다른 방법은……."
"다른 방법 같은 건 없어요. 여기는 사천당가예요. 사천당가의 여자는 비전을 배울 수도 없고, 당가의 무인으로 살아갈 수도 없는 반쪽짜리에 불과하죠. 특히나 가주의 딸이라면."
당소소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게 엄청난 불만을 품고 살았던 건 아니에요. 가주의 딸이라는 신분 덕에 그래도 지금까지 호의호식했으니까. 이건 그 대가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하죠. 다만……."
당소소가 연못에서 시선을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만 그저……."
말끝이 흐려지더니 이내 낮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노을빛에 붉게 물든 당소소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이설이 담담하게 입을 연다.
"길은 있어."
"……네?"
"길은 언제든 있어. 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뿐."
당소소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다 안다는 듯이 말씀하시는 건 그만둬 주실래요? 저는 지금 적당한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니거든요?"
"열어 줄게. 그 길."
당소소가 살짝 눈을 크게 뜨고 유이설을 바라본다.
길을 열어 준다고?
유이설이?
"……."
그게 가능한가 아닌가를 떠나서 더 큰 의문이 생겼다.
"왜 저를 도와주시려는 거죠?"
"나도 그랬으니까."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애를 써도.
하지만 그녀의 길은 어느 날 갑자기, 화산에 제 발로 굴러 들어왔다.
세상에서 제일 괴팍한 길이 말이다.
이제 그녀는 적어도 길을 찾아 헤매지는 않는다.
그러니…….
"다를 것 없어."
유이설이 단호한 얼굴로 당소소를 바라본다.
"적어도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있을 거야."
유이설을 빤히 바라보던 당소소가 손을 뻗는다. 그러자 유이설이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영 못 미더운데."
"밑져야 본전."
"그렇긴 하죠."
당소소가 싱긋 웃었다.
"그런데 하나 물어도 돼요?"
"물어."
"정말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
"정말? 진짜?"
유이설이 낮게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려 처소로 향했다.
"진짜 아니라고? 진짜?"
아무래도 집요하게 달라붙는 것은 상대를 막론한, 당소소의 특성인 모양이다.
* * *
타악!
문을 닫은 청명이 당군악을 빤히 바라보았다.
"……바빠 보이는군."
"누구 덕분에요."
"……절대 사과하지 않을 테다."
"끄으으응."
청명이 한숨을 푹푹 내쉬고는 당군악의 건너편에 앉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데요?"
당군악이 잠깐 말을 고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탁을 하나 해야 할 것 같네."
"네? 부탁이요?"
청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와, 그거 상행 하나 부탁했다고! 꼭 하나 받아먹으셔야겠어요?"
"그런 게 아닐세."
당군악이 손을 들어 미간을 꾹꾹 눌렀다.
"말이 나왔으니 그것 먼저 처리하지. 상행은 확보했네. 성도의 화평상단(和平商團)에서 운남으로 상행을 준비하고 있네. 내 거기에 함께 갈 수 있도록 일러뒀네."
"언제요?"
"모레쯤 출발할 모양이더군."
"생각보다 빠르네요. 감사해요."
당군악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내 부탁 말일세."
"네."
"무슨 일인고 하니……."
당군악이 원로원과 있었던 일을 청명에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뺄 건 빼고 더할 것은 더했지만, 상황을 설명하다 보니 그와 원로원간의 미묘한 알력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겠지.'
청명은 당가와 친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진정한 친우라면 서로의 치부마저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된 거네."
당군악이 슬쩍 청명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아는 청명이라면 여기서 또 뭘 내놓으랍시고 난리를…….
'음?'
당군악은 잠깐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청명의 얼굴에 지금껏 그가 본 적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다.
"……그러니까."
청명의 입에서 고저 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원로원의 태상장로들이 가주님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는 소리네요."
"말하자면 그렇네."
"발목이라."
청명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 제가 가문 놈들이 하는 말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 게 아니라 그냥 믿어 주고 밀어주었으면 가문이 좀 더 강해지지 않았을까. 그럼…… 그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 그래서 전쟁만 끝나면 이번에는 가주 녀석을 조금 도와줘 볼 생각입니다. 제가 이름만 태상장로고, 말만 어른이지 그놈들을 제대로 돌봐 준 적이 없잖습니까.
'……물론 네놈이 나를 여기로 이끈 건 아니겠지.'
죽은 이는 죽은 이일 뿐이다. 죽은 이의 의지 같은 건 없다.
그럼에도 청명은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당보의 의지를 무시할 수 없었다.
"부탁이라고 하셨죠?"
"그렇다네."
"그 부탁은 거절하죠."
당군악이 조금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강요할 수 없는…….
"대신!"
"……음?"
청명의 눈이 새파랗게 빛난다.
"선물을 하나 드리죠."
"선물?"
"네."
청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이건 청명이 주는 선물은 아니다. 그는 그저 전해 주는 것일 뿐.
이건 긴 시간을 뛰어넘어, 당가의 태상장로였던 암존(暗尊) 당보가 당군악에게 건네는 선물이 될 것이다.
"비무는 예정대로 진행해 주세요. 그리고 그날 제가 무슨 일을 벌이더라도 절대 나서지 마세요."
"……무슨 일을 하려는 건가?"
"뭐, 간단하죠."
청명이 씨익 웃었다.
"제가 제일 잘하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