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그냥 제 변덕이라고 해 두죠. (3)
"가주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이외까?"
노골적인 힐난에, 당군악이 살짝 표정을 굳혔다.
'망할 늙은이들.'
당가는 피로 이어진 문파다.
때로는 그 사실이 당가를 다른 문파와는 다른, 특별한 곳으로 만들어 준다. 철저하게 혈족 중심인 만큼, 타 문파와는 비할 바 없는 끈끈함을 발휘하니까.
하나 반드시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혈족 중심이라는 것은 결국 나이가 든 이들의 발언권이 강해진다는 뜻이다.
평범한 문파라면 일선에서 물러나고 자신만의 무학을 완성해 나갈 이들이 어른, 또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사건건 모든 일에 관여하려 든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일선에서 물러난 당가의 장로들은 태상장로라는 직함을 얻고, 가주를 조언하는 위치에 선다. 그들이 모인 곳이 바로 당가의 원로원이다.
과거의 원로원은 그저 당가의 가주에게 조언을 해 주는 기관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새 가주와 대등한……. 아니, 그 이상의 발언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가주가 가문 내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다고는 하나, 백부와 숙부들을 상대로 권한을 휘두르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화산과 동맹이라니. 무당도, 종남도 아니고 화산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가주!"
장로 중 하나가 버럭 소리치는 모습을 본 당군악이 눈살을 찌푸렸다.
존대는 사용해 준다.
하지만 저걸 존대라고 할 수 있을까?
밀려드는 언짢음을 참지 못한 당군악이 막 한 소리를 하려 했다. 하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흘러나온 누군가의 나직한 음성이 격해지는 분위기를 내리눌렀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선은 가주의 말을 들어 보도록 하세."
"하나, 원주님!"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죄송합니다."
원로원주 당외(當巍)가 주위를 찍어 누르고는 당군악을 바라본다.
"가주. 이제 말씀해 보시지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게요?"
느긋하게 물어 오는 그의 목소리에 여유가 잔뜩 묻어 있다.
당군악이 살짝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목소리에 적의가 묻어나지 않게 말이다.
"화산은 충분히 동맹의 가치가 있는 문파입니다."
당외는 당군악을 보며 빙그레 웃더니 느리게 말했다.
"기이한 일이외다."
어느새 그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가주의 혜안이 흐려진 것은 아닐진대, 어찌 그런 평가가 나오는지 모르겠구려. 내가 모르는 사이 화산이 다시 옛 명성을 되찾은 것이오? 그게 아니면……."
당외가 조소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내 모르는 사이 당가가 그만큼이나 추락한 것이외까?"
명백히 조롱이 어려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군악은 그저 냉정한 어투를 유지할 뿐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화산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한 사람은 당가를 대표하는 당가의 가주.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당가의 원로들이 모여 있는 원로원의 원주.
당가에서 가장 큰 권한을 가진 두 사람이 무겁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화산은 그렇다 치고."
"……."
"당패를 소가주의 자리에서 폐했다고 들었소이다."
이 이야기도 나올 것이라 예상은 했던 당군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가주 홀로 결정한 것이오?"
당군악이 대답 없이 당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만한 대사를 가주 홀로 결정했다는 말이오?"
"그럼 당패를 다시 소가주의 자리에 올리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그 날카로운 반응에 당외가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가주. 이 모든 것은 당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이외다. 우리가 잇속을 챙기자고 이러는 것이 아니잖소이까?"
당군악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권력에만 눈이 먼 늙은이들 같으니.'
저들이 정말 당가를 위해서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당군악 역시 저들에게 마땅히 존중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미 예전에 변질되었다.
사천에서 더 뻗어 나갈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은 가문 내의 권력을 나눠 먹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게 설령 가주의 권한을 제한하는 길이더라도 말이다.
"먼저 연유라도 들어 봅시다. 왜 당패를 폐한 것이오?"
"어울리지 않아서입니다."
"어울리지 않는다?"
"예."
당군악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천 당가의 가주라는 중임을 감당하기에 걸맞지 않은 그릇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럼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소가주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낫습니다. 또한 그것이 당패에게도 나을 겁니다."
"그럼 새 소가주로는 누굴 올릴 셈이오?"
"그의 동생들 중 하나가 되겠지요."
당외의 눈이 가늘어졌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그는 과거 소가주의 자리에 올랐다가 선대의 판단으로 동생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물러난 적이 있다. 그 동생이 바로 당군악의 아비였다.
우연인지, 노린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당군악의 말은 당외의 아픈 부분을 찌르고 있었다.
"당패 정도면 충분히 그릇이 아니외까?"
당군악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부족합니다."
"……당패는……."
"예. 예전이었다면 저도 당패의 그릇을 논하며 소가주의 자리에서 내리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하나!"
당군악이 씹어 먹듯 말했다.
"당패로는 만족할 수 없게 만드는 이를 제 눈으로 본 이상, 타협은 있을 수 없습니다."
"화산신룡을 말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당외가 흥미롭다는 듯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요사스레 빛난다.
"무엇보다 소가주의 능력을 우선시하겠다는 것 같구려. 맞소이까?"
"정확합니다."
"그러면……."
당외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굳이 가주의 자식이 아니어도 된다는 뜻 아니겠소?"
당군악의 눈가가 꿈틀했다.
이는 무척 민감한 부분이다. 당외가 알면서도 건드린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부정해 버린다면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처사가 된다.
"당씨 성을 쓰는 능력 있는 아이라면 누구라도 소가주가 될 수 있습니다."
당외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가주의 넓은 뜻에 실로 감탄했소. 그 말 하나로 가주는 이 모든 일이 사사로운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소이다."
당외가 당군악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하나 당군악은 이게 절대 당외가 그를 지지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가주께선 당가의 아이 중 화산신룡을 넘는 이가 나온다면 그를 소가주의 자리에 올리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시겠지요?"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내는 당외를, 당군악은 대답 없이 바라만 보았다.
"듣자 하니 지금 당가에 와 있는 청명이라는 아이가 천하제일 후기지수로 불린다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보다 좋은 잣대는 없겠지요. 어떻습니까? 그 아이와 비무를 벌여 이기는 아이를 소가주의 자리에 올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당군악이 피식 웃고 말았다.
평소의 그라면 가문의 어른들 앞에서 이런 웃음을 보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웃지 않을 수가 없다.
"가주?"
"원로원주께서 굉장히 큰 착각을 하는 모양이십니다만."
당군악이 조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가에서 화산신룡을 당해 낼 수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당군악의 말에 당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가주가 그 아이에게 망신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소이다."
"……."
"가주께서 아는 것이 전부라 생각지 마시오. 당가의 아이들은 결코 약하지 않소."
당군악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빙빙 돌리실 것 없습니다. 본론만 말씀하시지요."
시퍼렇게 날이 선 말에 당외가 살짝 눈을 찌푸린다.
"가주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이 늙은이도 더는 말을 돌릴 수 없겠구려. 어떻습니까? 그 청명이라는 아이와 당학이 녀석을 맞붙여 보는 것이."
"……당학을 말입니까?"
"그렇소이다. 당학이가 이긴다면 당연히 소가주의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는 것 아니겠소이까?"
당군악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비틀렸다.
"어지간히 당학을 소가주로 만들고 싶으신 모양이십니다. 손자라 해서 특별 대우를 하지는 않으시겠다더니?"
"능력만을 본 것뿐이오."
"그 아이의 능력이 감히 화산신룡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당가의 가주라는 사람이 그리 제 식솔을 믿지 못해서야 되겠소이까?"
비수 같은 말들이 서로를 향해 날아들었다.
"좋겠지요. 하나."
당군악이 조소를 머금고 일갈했다.
"도박에는 판돈이 필요한 법이고, 도전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요. 한 가지 내기를 추가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내기?"
"예."
당군악이 단호하게 말했다.
"만약 당학과 화산신룡의 비무에서 당학이 승리한다면 소가주를 임명할 권한을 원로원에 드리겠습니다."
"허?"
당외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 말은 당학이 이긴다면 굳이 당학이 아닌 누구라도 원로원 마음대로 소가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소가주는 결국 이다음 가주가 될 이. 이는 즉 가주 임명권을 원로원에 넘긴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대신 화산신룡이 승리한다면, 제가 가주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원로원의 간섭은 받지 않겠습니다."
"으으음."
"어떠십니까? 정말로 이 내기를 수락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워낙 큰 이야기가 오고 가니 잠자코 듣고만 있던 장로들이 숙덕대기 시작했다.
"어찌 이 큰일을 그리 사사로이……."
"이건 위험합니다. 서로에게 위험해요."
그러나 당외는 생각이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좋소이다."
"허억! 원주님!"
주위의 만류에도 당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당군악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 알고 가겠습니다. 비무는 내일 당장 하는 걸로 하시지요."
"그리하시오."
"그럼."
당군악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획 몸을 돌려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원로원의 장로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괜찮겠습니까? 까딱하다가는……!"
"까딱하다가는?"
"……."
"당학이가 화산신룡에게 지기라도 한다는 뜻인가?"
"……그런 게 아니옵고."
"한심한 놈들 같으니."
당외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기회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게지. 지금 이때가 아니라면 또 언제 가주의 힘을 뺄 기회가 오겠는가?"
"그렇긴 합니다만……."
당외가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한심한 것들.'
다들 당장 품에 떨어질 작은 이득만을 생각하며 눈이 벌게져 있으니 큰일을 도모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데리고 일을 치른다는 것이 걱정이기는 하지만…….
'도리가 없지.'
완전한 기회 따위는 절대 오지 않는다.
인생의 끝자락에 도달해서야 겨우 얻은 깨달음이 아니던가?
큰일을 이루고 싶다면 어설퍼 보이는 기회에도 모든 것을 걸고 달려들 줄 알아야 한다.
'내 손자를 가주로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당외는 절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의 손자가 소가주에 자리에 올라, 이윽고 가주의 자리를 계승하게 되어야만 그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당학이가 화산신룡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가 괜히 천하제일 후기지수로 불리는 게 아닐 텐데요."
"걱정하지 말게나. 내 그 화산신룡이라는 아이를 얕보고 있음이 아닐세. 아무리 가주가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고는 하나, 그 가주를 패하게 만든 아이일세. 추호의 방심도 있을 수 없지."
"하면 어찌……?"
"첫째로, 그 화산신룡이라는 아이는 가주와의 비무에서 큰 부상을 입었네. 그 부상이 벌써 나았을 리는 없지."
"으음. 확실히 그렇습니다."
"둘째로, 그 아이가 상대한 것은 당가의 암기뿐일세. 진짜 당가의 힘을 겪어 본 적이 없다는 뜻이지."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의 진정한 힘.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이는 없다.
"마지막으로!"
당외가 섬뜩한 눈빛으로 모두를 돌아보았다.
"필요하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결과를 만들어 낸다. 그게 당가의 방식이 아니던가?"
"……."
"그 아이가 비무장에나 설 수 있으면 좋겠군. 그도 좋은 구경거리가 될 테니 말이야."
당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 장로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약간의 죄책감.
그리고 약간의 민망함.
하지만 잠깐 드러났던 그 감정들은 이내 스멀스멀 흘러나온 욕망에 뒤덮여 버렸다.
"걱정하지 말게나. 그 화산신룡이라는 아이는 제 발로 당가에서 걸어 나갈 수 없을 테니까."
당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스쳤다.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만, 하필 이 시기에 당가를 방문한 것이 네 불행이라 생각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