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그냥 제 변덕이라고 해 두죠. (2)
"동맹?"
백천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 사고뭉치가 뭔 일을 벌일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전격적으로?'
아니, 밥 먹고 잠깐 사라지더니 그새 뭔 짓을 벌였기에 동맹이라는 거대한 이야기가 나오는가?
그것도 화산과 당가의 동맹?
윤종 역시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아, 아니, 잠깐만. 그런 대사를 우리끼리 마음대로 정해도 되는 거야?"
정확하게는 네 마음대로 정해도 되느냐는 말이 나와야겠지만, 그래도 나름 순화를 해 주는 윤종이었다.
"못 할 이유가 뭐 있어. 여기 사숙이 있는데?"
"응?"
백천 사숙? 사숙이 뭐?
"잊었어? 출발할 때 장문인께서 백천 사숙에게 화산의 모든 권한을 일임한다고 했었잖아."
어?
어…….
그랬지. 분명 그런 말씀을 하시기는 했지.
그런데…….
"그, 그걸 여기서 써먹는다고?"
백천의 눈이 커졌다.
"아, 아니. 잠깐만. 그건 남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하신 말씀이잖아!"
현종이 백천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한다고 한 의도는 중원과 연락이 원활하지 않은 남만에서, 화산의 제자들이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 주기 위함이다.
당가와 동맹을 맺는 것까지 장문인의 계산에 있었을 리가 없다.
"이놈아! 이렇게 마음대로 동맹을 맺어 가면 장문인이 뭐라고 하시겠냐?"
"좋아하시겠지? 헤헤헤!"
"그렇지. 물론 좋아하……. 아니! 빌어먹을, 그게 아니잖아!"
백천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제발 한 발만 앞서가자, 청명아! 더 나가지 말고 한 발만!'
따라가는 사람도 생각을 해 줘야 할 게 아니냐고! 뭔 놈의 동맹을 밥 먹고 식후 운동으로 체결하고 오냐!
"하아아아아."
백천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다른 화산의 제자들도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당가와의 동맹이라니.
당가주가 청명을 좋게 본 것이야 모를 이가 어디 있었겠냐마는 설마 그게 여기까지 이어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청명이 사고를 쳤으면 그걸 수습하는 건 백천의 몫이다. 황당함을 일단 미뤄 둔 그는 심호흡을 하며 냉정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나쁘지 않다.'
아니, 나쁘지 않다 수준이 아니다. 굉장한 이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대세가로 불리는 당가를 협력자로 얻을 수 있다면 화산은 날개를 달 수 있다.'
냉정하게 보자면 당가가 왜 화산 따위와 동맹을 맺어 주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니 쌍수를 들어 환영해도 모자랄 판이지만…….
백천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세상 일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겠지.'
생각을 정리한 백천이 조금 진중해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선은 잘했다."
"응?"
백천이 청명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당가주님과 어떻게 협의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 정도의 결과를 얻어 낸 것은 잘한 일이다. 고생했다."
"사숙. 뭐 잘못 먹었어?"
"……."
"사천 음식이 입에 안 맞아? 아니면 당가에서 독이라도 풀었나?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아니, 이 새끼는 칭찬을 해 줘도?
이마에 핏대를 세운 백천이 심호흡을 하며 노화를 억눌렀다. 그리고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걸리는 게 있다."
"응?"
"화산은 전통적으로 구파일방과 연대를 해 왔다. 오대세가와 손을 잡은 역사가 없다는 말이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네가 모르지는 않겠지."
"뭐, 그야 그렇지."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모를 수가 없다.
당가가 화산과 손을 잡기로 한 이유도 결국은 구파일방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한 것이지 않은가? 같은 정파라고는 하나, 공동의 적이 없어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이미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당가와 손을 잡으면 지금의 화산에는 확실히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화산이 다시 구파와 연대하여 구파일방에 복귀하는 데는 문제가 될 수도 있어."
백천이 진중하게 청명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선택한 것이냐?"
청명이 묘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사숙 그 전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음?"
"구파일방에 복귀해서 좋은 게 뭔데?"
"……으응?"
백천이 이게 뭔 황당한 소리냐는 듯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의 고개가 삐딱하게 꺾인다.
"좋은 게 있어?"
"그야……."
백천이 살짝 머뭇거렸다.
딱히 생각이 나지 않아서가 아니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아서다.
"구파일방이라는 명성은 네가 생각하는 이상의 파급력이 있다. 다른 건 다 접어 두고서라도 일단 우수한 제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고, 무림에서의 발언력이 커지지. 그리고……."
"그게 당가와의 동맹 이상의 이득이라고?"
"당장은 당가와의 동맹이 가지는 이득이 더 크겠지. 하지만 동맹으로 선택할 것이라면 아무래도 오대세가보다는 구파일방이……."
"사숙."
"음?"
"사숙은 자존심도 없어?"
"……."
백천이 눈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냐?"
"우릴 구파일방에서 쫓아낸 게 누군데?"
"그야……."
구파일방이지.
그 구파일방 놈들!
"그 새끼들이 우릴 구파일방에서 쫓아냈어. 그런데 이제 힘 좀 세졌다 싶으니까 헤헤대며 다시 구파일방에 한자리 내어 달라고 하겠다고? 옛일은 다 잊고 다시 잘해 보자면서?"
"……."
"아니! 뭔 호구 새끼도 아니고!"
청명이 눈을 까뒤집었다.
'그 새끼들한테 고개를 숙이라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목숨을 걸고! 아니! 정말 목숨을 바쳐서 중원을 구해 주었더니, 은혜도 모르고 제 잇속만 챙긴 놈들이 구파일방 아니던가?
태상노군도 이런 일을 겪었으면 들고 있는 지팡이로 대가리를 내리쳤을 것이다. 그런데 태상노군도 아니고 청명더러 이걸 참으라고?
에이.
말도 안 되지.
"이상한 환상 가지지 마. 사숙. 그 구파니 어쩌니 하는 놈들이 정말 필요할 때 서로를 도와주는 관계였다면, 화산이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거야."
백천이 입을 다물었다.
청명의 말에는 조금의 틀림도 없었다. 구파가 조금씩만 도와줬더라도 화산이 이리 몰락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청명은 그 허울뿐인 구파일방으로 다시 복귀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구파고 나발이고 그냥 세면 그만이지.'
중요한 것은 필요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들이지, 필요하지 않을 때 어깨에 힘을 실어 줄 허울뿐인 관계가 아니다.
"그럼 네 말은, 당가는 과거의 구파일방과 달리 서로 어려울 때 도와주는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거냐?"
"그렇게 만들어야지."
청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얻어 내는 관계 같은 건 없어. 만들어 가는 관계가 있을 뿐이지. 당가는 화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들이야."
백천이 가만히 청명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백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청명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건 사실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신뢰가 가는 놈이 청명인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놈이 청명이니까.
"네 계산으로는 우리가 손해 볼 일은 없다 이거겠지?"
청명이 멍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사숙."
"응?"
"어디랑 동맹을 맺는다고 우리가 손해를 보겠어?"
"……."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거 아냐? 화산은 이제 막 개털에서 벗어난 문파일 뿐이야. 거지가 금덩어리 하나 주웠다고 부자 되는 거 아니라고."
"끄으으응."
백천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말은 맞는 말이다.
최근 호재가 겹치고 있긴 하지만, 화산은 여전히 옛 영광을 되찾지 못한 몰락한 문파일 뿐이다. 냉정하게 따져 보면 오대세가 급에서 화산에 먼저 손을 내민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 맞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백천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추진하자!"
"사형!"
"괜찮으시겠습니까?"
백천의 결정에 유이설과 윤종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백천은 단호했다.
"정신 차려. 하필 이 동맹을 물어 온 게 저놈이라 불안한 거지. 이건 무조건 호재다."
"……으음."
"그렇긴 하지만……."
사실 이들에게 이 동맹이 얼마나 큰 이득이 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말 이런 일을 장문인께 여쭙지 않고 저희끼리 결정해도 되는 겁니까?"
윤종의 물음에 백천이 미간을 좁혔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니다. 하지만 일에는 시기도 중요하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끌다가 이 동맹을 망친다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겠지."
"으으음."
"우선은 내가 장문인께 받은 권한으로 밀어붙인다. 대신 윤종 너는 지금 빨리 동맹의 조건을 서찰로 작성하여 화산으로 보내거라! 청명이 네가 옆에서 확인하고."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백천의 단호한 얼굴에 윤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숙!"
백천이 슬쩍 청명을 돌아보았다.
'망할 놈.'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망할 놈이다.
사문의 어른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 으음.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시간을 두고 고민을 해 봐야…….
- 고민은 무슨 얼어 뒈질 고민입니까! 천하의 당가가 우리랑 동맹을 맺어 준다는데! 어디 우리가 조건을 고민합니까! 청명이 놈이 어련히 알아서 했으려고요! 괜히 애가 물어 온 일에 초 치지 마시고, 당장 수결부터 쓰십시오!
백천의 얼굴이 개운해졌다.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현영 사숙께서 해결해 주시겠지!'
일단 청명이 얻어 왔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날름 삼킬 양반이 아니던가! 이번 일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이제 당가의 일은 마무리가 된 건가?"
"응. 이제 운남으로 가야지."
청명이 고개를 돌려 조걸을 바라보았다.
"사형. 운남으로 가는 상행은 준비가 끝난 거지?"
"……."
순간적으로 조걸의 얼굴이 살짝 미묘해진다.
"처, 청명아. 그게 말이다."
"응? 왜? 벌써 출발했어?"
조걸의 이마에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힌다.
"어, 없대."
"응?"
"상행이 없대."
"……뭔 소리야. 지난번에 운남으로 가는 상행이 곧 출발한다고 빨리 합류하라고 했었잖아?"
"그게……. 아버지가 우릴 빨리 성도에서 달아나게 하려고 거짓말을 하신 거래."
"……."
"대충 상인들 모아서 바깥으로 보내고 성도에서 멀리 떨어지면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셨대. 그러니까……."
"가짜 상행이었다?"
"그, 그렇지."
조걸이 살짝 청명의 눈치를 보았다.
조평이 거짓말을 한 걸 알면 이 패악무도한 놈이 또 어떻게 나올지, 벌써부터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하지만 의외로 청명의 반응은 선선했다.
"거 진짜 상인이시네. 그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해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다니."
"……."
이거 칭찬인가? 욕인가?
"뭐. 자식이 걱정되면 그럴 수도 있지. 여하튼 그럼 운남으로 가는 상행이 아주 없다는 거야?"
"아니, 아냐! 있기는 있어. 그런데 운남과 거래가 워낙 제한적이다 보니 다음 상행이 출발하려면 적어도 한 달은 더 걸린다고 하시더라."
"그걸 좀 당기면 안 되나?"
"최대한 빨리 당겨도 그 정도래."
"으음, 그러면 너무 늦는데……."
청명이 뒷머리를 두어 차례 긁었다.
이미 당가에서 시간을 지체했다. 화산에서 목이 빠져라 청명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장문인과 장로님들을 생각하면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는 어렵다.
백천 역시 비슷한 생각인지 미간을 좁혔다.
"혹여 다른 상행을 알아볼 수는 없느냐?"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운남으로 가는 상행은 굉장히 제한적입니다. 소수의 상단만 참여할 수 있는 데다가, 일이 하나만 잘못되어도 다시는 운남으로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상행에 뒷일을 꾸미고 싶어 하는 곳은 없을 겁니다."
"으으음. 그렇구나."
이 이상 사해상회에 부탁을 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조걸의 아버지에게 너무 많은 부담이 주게 된다.
"그럼 어떻게……."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모두의 고개가 청명에게로 돌아갔다.
"어떻게 하려고?"
"걱정하지 마. 뭐 별것도 아닌 일인데."
"응?"
청명이 씨익 웃었다.
"이럴 때 도와주는 게 친구 아니겠어?"
"……응?"
조걸이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쾅!
당군악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곳은 사천당가의 가주 집무실이다.
당가에 성격 급한 놈들이 어디 한둘이겠느냐마는, 감히 사천당가 가주의 집무실 문을 저딴 식으로 열고 들어오는 놈은 있을 리 없다. 그것도 기별도 넣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렇다는 건…….
"조건이 하나 더 있어요!"
"……."
당군악은 슬그머니 눈을 뜨며, 문을 차고……. 아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바라보았다.
"또 뭐……."
"아니, 조건이 아니라 부탁이라고 하죠! 운남으로 가는 상행을 하나 알아봐 주세요. 거기 껴서 운남에 들어갈 생각이거든요!"
"……."
"시간 없으니까 얼른 준비해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아무래도 섬서에서는 '부탁'이라는 말이 사천과 다르게 쓰이는 모양이었다.
부탁하는 놈이 저리 목 뻣뻣하게 외쳐 대니 말이다.
"……운남까지만 가면 되는 건가?"
"아니요. 깊이 가야 돼요! 야수궁 있는 데까지요!"
"……."
청명이 당군악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쉽지 않은 일이라고는 하던데. 그래도 당가라면 할 수 있겠죠? 에이, 그래도 당간데. 설마."
"……."
"가능하죠?"
"……여라."
"네?"
당군악의 얼굴에 혼이 빠져나갔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이 썩을 인간아."
생전 처음으로 가주의 자리에 오른 것을 후회하는 당군악이었다.